함께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은 후, 코글이 영자에게 제안한다. 병태가 너무 지친 것 같으니 오후에 지누단다로 이동해 온천욕을 하려던 계획을 포기하자고. 이곳에서 숙박하면서 한식으로 원기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으로 일정을 대폭 수정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단다. 원래의 내일 일정은 올라올 때와 다른 코스에 있는 봉우리를 한번 더 오른 후 멋진 전망을 자랑하는 로지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로 했었다.
온천과 멋진 전망의 포기는 아프지만 다시 올라가야 하는 고생을 끝내고 싶은 마음과 닭다리의 유혹이 더 달았다. 무엇보다 너덜너덜해진 몸 안에 활기를 찾아줄 먹을 것이 절실했다. 한식당이 있는 이 로지의 샤워실이 온천보다 훨씬 좋다는 코글의 너스레를 이젠 반도 믿지 않지만 병태의 컨디션을 핑계 삼아 못 이기는 척 이곳에 머물기로 한다. 거의 비슷한 메뉴판을 내미는 여느 로지와 달리 한식이 주메뉴인 이곳은 한국사람들이 80% 정도이나 외국인들에게도 인기라 식당은 늘 붐빈다. 트레커들에게 로지의 식당은 유일한 휴게소요, 국제교류의 장이요, 정보 나눔터이다.
예정과 달리 일찌감치 일정을 끝내버린 병태는 이제 배부르고 등따시니 식당으로 마실을 나가자 한다. 창이 넓은 창가에 앉아 둘은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구경한다. 그러다가 이곳 로지에서 며칠씩 쉬며 책도 읽고, 인터넷 서핑도 하고 오가는 사람들과 대화하기에 치중하는 미국인 노부부와 눈이 마주쳤다.
전직 배구선수였다는 72살 존스와 70살 아내 베티는 헉 소리 나올 만큼 젊어 보인다. 이런 고산 트레킹을 일 년에 한 번 이상 다닌다고 한다. 대신 전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쉬며 즐긴다.
몇 년 전 캐나다 횡단열차에서 만나 나흘동안 함께 지내며 의형제까지 맺었던 캐나다인 노부부도 캠핑카를 타고 몇 달씩 여행한다 해서 놀랐는데 모두 그렇진 않겠지만 여행지에서 만나는 서양 노인들의 여행 스케일이 부럽기만 하다.
존스와 베티의 이야기는 그칠 줄 모르지만 그들의 에티켓과 배려는 본받을만하다. 카트만두에 들를 예정이라니까 노트북을 펼치며 사진과 지도를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해 주시는데 목소리는 조용하고 나긋하다. 대화상대가 그리웠던 건 확실하지만 결코 허둥대며 무례하지 않다. 그들의 말을 오분의 일도 못 알아들었지만 마치 그러는 게 예의인 듯 영자는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린다.
아침엔 한국 젊은이들에게 우리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온라인에서 만났다는 그들은 여자 셋, 남자 하나로 ABC를 향해 올라가는 중이다. 방과 포터를 공유하며 경비를 절약한다. 당차고 알뜰한 자식 또래의 그들이 예뻐서 아낌없이 퍼준다. 그동안 애써 만들어 가져온 음식들을 외면했던 병태가 얄미워서 보란 듯 싹싹 긁어준다. 그들이 환호하며 맛있게 먹자 병태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지금부터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좀 남겨놓지.."
"됐거든~~ 당신은 이미 자격 상실이야."
-다시 포카라로-
세끼를 우리 음식으로 든든하게 먹고 나니 힘이 솟는지 병태가 다시 ABC로 가자며 너스레를 떤다. 제일 수월한 하산 코스로 일정을 바꿨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올만하다. 이 길을 어떻게 올라왔을까 싶게 가파른 경사를 다람쥐처럼 잘도 내려온다. 거의 쉬지 않고 뛰어 내려왔더니 점심시간쯤 도착한 곳이 오늘 묵을 마지막 로지란다. 참치 회덮밥을 상상하며 참치 볶음밥을 주문했는데 아무리 뒤적여도 밥 속엔 통조림 참치조차 보이지 않는다. 밥은 너무 짜서 몇 수저를 못 먹겠다. 무어든 흡입 수준으로 먹어치우던 코글도 반 이상을 남긴다.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을 가진 채 둘러본 로지는 먹거리만큼 스산해 보인다.
안락한 잠자리가 지척에 있다고 생각하니 간사하게 더는 이런 곳에서 못 잘 것 같다. 둘의 마음을 눈치챈 코글이 넌지시 권한다. 한 시간만 더 내려가면 택시 타고 포카라에 갈 수 있다고. 포카라엔 호텔이 즐비하고 삼겹살에 소주도 먹을 수 있다고. 평소 그리 즐기지 않았던 삼겹살을 그날 밤 먹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다. 모든 결정권은 영자가 쥐고 있고 병태는 침을 꼴닥이며 영자 눈치만 보고 있다.
그래, 가자 포카라로.
히말라야는 그만 작별하고 익숙한 문명으로 돌아 가자.
한 시간 후 셋은 택시에 몸을 실었다. 두 시간을 털털거리며 달려 도착한 포카라의 모텔은 이렇게 호사스러운 방이 세상에 존재했나 싶을 만큼 감격스럽다.
우리만의 욕실에서 뜨끈한 물로 샤워 후 코글과 함께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기로 한다.
코글은 삼겹살과 소주의 열렬한 팬이다. 이젠 코글이 우리의 손님이라며 병태가 집게와 가위를 잡고 부지런히 고기를 구워 코글의 접시에 놓아준다. 허기를 참으며 굽기만 하는 병태가 고마워 영자는 연신 상추쌈에 쌓인 고기를 병태의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모든 일정을 무사히 끝내고 일주일간 함께 지낸 코글과 마지막 식사다.
코글이 부러워했던 병태의 고어텍스 점퍼와 접으면 한 줌 되는 영자의 구스점퍼를 선물로 건넨다. 병태 것은 좀 싫증이 난 것이지만 영자 것은 요긴하게 입던 것이다. 에티켓 팁도 다음팀을 위해 절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넉넉하게 쥐어준다. 그리고 진심을 담은 포옹을 나눈 후 그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