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스틱과 무릎 보호대 없는 헐렁한 차림새로 시내 구경에 나선다. 그동안 과일에 굶주렸기에 과일 가게가 1순위다. 번쩍이는 큰 가게를 지나 허름한 작은 가게로 들어선다. 가게는 10살쯤 된 똘똘이와 어린 동생 둘이 지키고 있다. 똘똘이는 가격을 적어 보여주며 과일 팔기에 열심이다. 자세히 보니 30대 엄마는 커튼 뒤에 숨어 있다. 두 살쯤 돼 보이는 까만 사탕 눈의 막내가 자꾸만 영자를 보고 웃는다. 재롱을 떨어주니 의젓한 장남까지 과일 팔 생각도 잊은 채 신났다. 어느 틈에 슬며시 커튼 밖으로 나온 엄마도 영자와 병태의 재롱을 재밌어한다. 공연을 한 것인지 과일을 산 건지 요란을 떤 후, 옆 가게에서 땅콩도 사고, 군밤도 사고 검정봉지를 줄줄이 들고 부자가 된 것 같아 아이처럼 신난다.
희희낙락. 10분 정도 걸으니 페와호수의 선착장이다. 시간이 남아 탄 보트지만 주변 경관은 그럴듯하다. '소양강 처녀' '두만강' '백마강'까지 온갖 배와 강에 대한 노래를 목청껏 부른다.
"남은 팔 아파 죽겠는데 저는 노 젓지 않는다고 아주 신났네."
"에구머니나 울서방 팔 아팠쪄용? 내가 좀 저을깡?"
"됐거든?"
병태 팔이 아프든 말든 못다 한 노래까지 고래고래 마저 부른 후, 포카라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12시쯤 공항에 도착한다. 공항의 야외 카페에서 스낵을 먹으며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뜨고 내리는 비행기 구경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오전의 안개 때문에 지연된 비행기들을 먼저 보내느라 자꾸 연착된다는 방송이 나왔지만 느긋하다. 병태는 ABC까지 갔다 온 것이 군대 다녀온 것만큼 뿌듯하지만 절대로 내세우지 않고 끝까지 겸손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공항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인간은 ABC 다녀온 인간과 안 다녀온 인간,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며 있는 대로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한다. 합석한 네덜란드 할머니에게 어디 다녀왔냐고 묻더니 대답도 듣기 전에 우리는 ABC를 다녀왔다고 잘난 척한다. 옆자리 호주 할아버지와 중국 청년에게도 입술을 달싹거린다. 허락해 주면 마이크라도 잡고 떠들 기세다.
우리 비행기는 거의 세 시간 연착되어 4시 40분에야 출발한다고 한다.
카트만두까지 30분이면 갈 수 있고 한국행 비행기는 밤 11시 40분 출발이니 그동안 카트만두 시내 구경도 하고 쇼핑도 할 예정이었다. 마침 카트만두에서 카페를 운영한다는 교포를 만났다. 서너 시간 동안 시내 관광할 곳을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카트만두에 무사히 도착할 것부터 걱정하라 한다. 탑승 확정 방송을 들었다 했더니 탑승했다가 내리는 경우도 허다하단다. 경비행기는 이착륙 시 온전히 조종사의 육안에만 의지하기 때문에 안개 낀 날이나 조금만 어두워도 비행이 취소된다고 한다.
그때 우리 바로 뒷 항공편인 5시 비행기는 취소되었다는 방송이 나온다. 만약 오늘 카트만두에 가지 못하면 한국행 비행기를 놓치고 만다. 성질 급한 병태는 안절부절, 우왕좌왕하다가 공항직원에게 괜한 핀잔만 듣는다.
-카트만두 공항과 광저우 공항-
마음 졸이다가 무사히 탑승했고 이륙하고 나서야 큰 숨이 절로 나온다.
30분 만에 도착한 카트만두 공항은 관광객보다 훨씬 많은 호객꾼과 택시기사와 짐꾼들이 뒤섞여 아수라장이다. 시내관광을 위해 택시기사와 흥정하면서 관광 후 10시 까지는 공항으로 돌아와야 한다니까 그냥 공항에 있으란다. 평소 20분이면 시내까지 갈 수 있지만 지금은 러시아워라 왕복 네 시간이 걸린단다.
공항 밖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고 공항 안엔 쉴만한 의자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나마 탑승 세 시간 전인 8시 30분 이후에야 공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니 세 시간 이상을 숨도 쉬기 힘든 탁한 공기를 마시며 전쟁터 같은 북새통에서 꼼작 없이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공항 안이 그나마 나은 것 같아 경찰에게 사정하여 겨우 공항 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낮 12시부터 비행시간 30분 빼고 12시간을 포카라와 카트만두 공항에서 보냈고 경유지인 광저우 공항에서 다시 3시간 30분을 보내야 한다.
새벽에 도착한 광저우 공항 식당에서 가락국수를 팔고 있다. 화들짝 반가워 식당에 들어서는데 종업원 태도가 상당히 거슬린다. 가락국수 먹겠다니까 안된다며 입구를 막는다. 식당 안에 가락국수 먹는 손님이 보여 저 사람이 먹는 건 뭐냐고 따지니 마지못해 들여보내 준다. 그때야 알았다. 열흘 동안 수염을 깍지 않은 병태는 마치 노숙인 같다. 영자도 크게 나아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