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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자의 수난 시대-2

렌터카로 프랑스 훑기.

by 임경희

이번 여행에서 호텔을 고를 때 제일 신경 쓴 것은 단연 위치다. 주로 작은 도시를 둘러보는 일정이어서 도심의 아파트형 호텔을 일찌감치 예약했었다. 마침 사람들 밥 해 먹이는 게 취미인 바람직한 친구, 순자가 취사는 거의 도맡아 한다.

귀찮으니 좀 사 먹자 해도 어느새 김밥까지 뚝딱 준비하는 그 애를 아무도 막지 못한다.

사실 외식이라 해봤자, 바게트 빵에 우유나, 피자, 스파게티 정도겠지만 순자가 만들어 주는 감자밥과 연어 샐러드등은 웬만한 식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다.


이 날은 제일 기대했던 몽블랑에 오르는 날이다.

물론 케이블카로 올라가지만 미리 본 몽블랑 정상은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빨간 산악열차를 타고 빙하지역도 보고, 중간 높이 봉우리인 브레방에도 가자.

당일 자유이용권으로 이 모든 것을 탈 수 있고 안시에서 한 시간 거리이니 빨리 서두르자며 호텔 방을 나서는데


갑자기 현숙이가 신음소리를 낸다. 차 키가 없단다.

어제 순자와 둘이 마트에 다녀오면서 마지막으로 차 키를 만진 친구들이다. 우선 그 애들 가방을 샅샅이 뒤졌고, 그 후엔 일곱 개의 가방 모두. 호텔 방구석구석, 혹시 호텔 마당에 떨어뜨린 키를 누가 주워서 차를 열어봤다가 아무것도 없으니 쓰레기통에 버렸는지 모른다며 호텔 부근 쓰레기통까지 샅샅이 뒤져본다.


그래도 차 키를 찾을 수 없으니 호텔 직원의 도움을 받아 렌터카 회사에 분실신고를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경우는 흔할 테니 근처의 같은 렌터카에서 여분의 키를 보내 줄거라 믿었다. 어떤 경우에도 보상 가능한 비싼 보험에 가입했으니 잘 해결될 거라 맘 편히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기가 막혔다.


-보험계약서에 차 키에 대한 조항은 없으며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여분의 차 키는 없으니 차는 그 자리에 두고 다른 차를 새로 빌려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

기존의 차는 파리까지 견인하는데 그 모든 비용은 우리가 지불해야 한다.-


갑자기 온몸의 기운이 주르륵 빠져나간다.

오토 카가 귀하다는 프랑스에서 7인승 오토 카를 렌트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렌터카가 제일 많다는 파리공항에서 삼 개월 전부터 예약하여 겨우 빌린 것인데 이런 작은 도시에서 그런 차를 빌릴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럼 기차로 다녀 봐?

저 보따리들을 이고, 지고?

프랑스 사람들이 줄줄 따라오며 사인해 달라 할걸? 그럼 어떡하지? 여기서 좀 놀다가 기차로 파리에 가서 파리 구경이나 샅샅이 해야 하나?



그 와중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때 미나가 사촌오빠가 전직 프랑스 대사라고 말한다.

"빽 뒀다 뭐 해? 빨리 전화해 봐."

사촌 오빠와 통화 후 대사관에서 바로 전화를 걸어준다. 이래서 모두 빽, 하는구나.


마약인 모르고 운반했다가 몇 년씩이나 수감 됐었다는 어느 여성분에게 대사관에서 손 한번 제대로 써 주지 않았다는 기사가 생각난다.

여행 중 차 키를 잃어버린 전 대사의 사촌동생에게는 3분 만에 전화가 온다.

뭐라도 도움이 될까 하는 기대감도 있지만 살짝 씁쓸한 마음도 있다. 대사관에서 나서줬음에도 대답은 한결같다.


누군가 도난당한 것으로 신고하자고 한다. 그러면 우리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좀 줄지 않을까? 좋은 생각 같진 않지만 별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자 그 방법이 최선인 듯 우르르 경찰서로 향한다.


몽블랑에 오르겠다고 사흘 전부터 고산병 예방약을 먹어서 어지럽다는 친구들 세 명을 부축하고, 산 정상은 춥다며 내의 입고 다운파커로 중무장한 채 집을 나섰는데 그날 안시는 섭씨 30도. 점퍼 속으로 땀은 주르르 흐르고 누가 봐도 추운 지방에서 도망쳐 온 패잔병의 모습이다.


아름다운 안시호숫가에 쪼그려 앉아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동전이라도 던져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노래가 절로 나오고 있었다.


쭈뼛쭈뼛 살금살금 들어선 경찰서에서의 도난신고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안시는 치안이 안정된 조용한 도시로 어젯밤에 나가봤지만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차 열쇠를 도둑맞는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도난 신고 접수조차 거부한다.


열쇠만 도난당했다면 안 믿을 거라며 생각해 낸 꾀라는 것이 열쇠와 5유로가 들어있는 동전지갑이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지나가던 강아지도 웃을 참으로 기막힌 꾀였다. 한풀 더 기가 꺾인 패잔병들은 밥이나 먹자며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온다.


식사 후 렌터카나 알아보자며 다시 나가려는데 자기네 방에 들렀던 순자와 현숙이가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 들어온다. 차 키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뒤져도 보이지 않던 현숙이 가방에 있었단다. 모두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특히 열쇠 분실의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순자는 그동안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하도 떨고 다니기에 모두들, 누구 하나 다치기라도 해서 중단되는 여행이면 어쩔 뻔했냐며 여행은 다음에 또 와도 되지 않겠냐며 위로하기 바빴는데 긴장이 풀리자 털썩 주저앉아 아주 통곡을 한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정신력이란 것을 그때 다시 느낀다. 손가락 하나 들 힘도 없더니 다들 갑자기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치는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달려 나가 힘차게 시동을 걸고 엔진소리도 요란하게 샤모니로 향한다.


그렇게 많이, 오랫동안 그리워한 샤모니 몽블랑이었건만 도착한 시간은 이미 네 시가 지난 시간. 에귀 뒤미디 전망대까지 가는 케이블카도, 중간 봉우리 브레방도, 빙하지역으로 가는 빨간 기차도 모두모두 이미 마감돼 버린 시간이다.


속이 많이 상했지만 포기할 건 잽싸게 포기해 버리는 것이 우리 팀의 특징이며 장점이다.

아쉬운 대로 굽이굽이 마을을 도는 코끼리열차 비슷한 꼬마기차를 타고 탈탈탈...

이름도 예쁜 샤모니몽블랑을 하염없이 돌고 또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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