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터카 반납장소가 어디더라?
현숙이가 사진 찍어 놨지?
반납할 주차 구역을 촬영했던 현숙이 한참을 뒤지더니 사진이 지워졌다 한다. 나중에 보니 나와, 순자도 찍었던데 그때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 주차장은 엄청나게 넓다. 주차 빌딩이 여러 개 있는데 ZONE으로 구별된 빌딩 하나의 규모도 정신 못 차리게 크고 높다. 유선형으로 한참 올라가다가 알파벳으로 나누어진 구역에 따라 갈라진다. 입구가 여러 개이고 복잡해서 처음부터 목표 구역을 정확히 알고 찾아가야 한다.
공항에서 출차할 때 구역 사진을 찍었으니 아무 생각 없이 잔뜩 긴장하여 출구만 찾아서 나왔기에 무슨 존인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행히 레드 존이 생각났고, (화이트, 블루, 레드 존으로 나누어져 있다.)
레드 존 A~G 중 어딘지 머리를 쥐어짜 보고 있는데 현숙이가 그냥 레드 존에만 주차하면 된다고 한다. 직원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현숙이 말을 믿고 레드 존, 아무 곳에나 주차한다.
다른 친구들은 짐을 다시 정리하고 미리 정리해 둔 나와 수지, 둘이 렌터카 반납 수속을 하려고 사무실을 찾아 나선다. 처음에 차를 빌렸던 본관 주차장 과는 꽤 떨어져 있어 G존에서 사무실까지 가는 길도 쉽지 않아 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엄청나게 헤맨다.
힘들게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예의 경극배우 아가씨는 여전히 쌀쌀하게 레드 존 G에 주차하면 하루에 45유로씩 주차료를 물게 되니 얼른 차를 레드 존 D에 다시 주차하고 오라고 한다.
레드 존 G에도 겨우 주차했는데 다시 출차한 후, D존을 찾아가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 탑승시간이 임박했다 사정해도 막무가내다.
할 수 없이 다시 G 존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방금 왔던 길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레드 G 2147이라고 주차해 둔 주차장 번호는 적어 왔지만 시간이 촉박하다고 생각하니 더 허둥댄다. 겨우 찾아갔는데 이번엔 분명 그곳에 주차해 둔 차가 감쪽같이 없어졌다. 차 키로 아무리 눌러봐도 반응하는 차가 없으니, 정말 미칠 것 같다. 인내심이 극에 달하고 맥이 빠져서 그냥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수지가 차를 찾았다고 멀리서 소리친다. 주차장 번호 끝자리, 1자를 위에 점 하나 붙여 7 자라고 잘못 봤던 것.
다시 Exit으로 나갔다가 티켓을 넣고 들어와야 한다고 해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티켓이 자꾸 도로 나오며 차단기가 열리지 않는다.
스피커폰을 마구 누르며 거의 울부짖는다.
Help me, Help me please!
하도 시끄러우니까 불쌍했던지 차단기를 열어 주어서 일단 레드 존에 다시 진입, 돌고 돌아 겨우 레드 D존에 주차할 수 있었다.
열흘 동안 우리의 손발이 되어 준 고마운 차였지만 무사히 주차를 마치니 괴물처럼 다시 달려들 것만 같아 뛸 듯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을 벗어난다.
입국수속이 끝나자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릴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내 안의 모든 피가 다 빠져나간 듯 거의 탈진상태가 된다. 친구들은 면세점을 구경한다 했지만 난 얼마 안 남은 시간 그냥 혼자이고 싶었다.
평소 애용하던 화장실 옆 식수대를 과감히 지나쳐 나에 대한 마지막 선심처럼 거금 3유로짜리 에비앙물을 주저 없이 사서 벌컥벌컥 단숨에 마셔버린다. 그리고 눈에 띄는 간이침대에 내동댕이치듯 쓰러져버렸다.
늘 그랬다.
여행이 끝나면 돌아갈 내 나라와, 내 집과, 반겨줄 내 가족이 있다는 게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했다.
이번엔 더욱 절실하여 완전히 방전된 상태로 돌아왔으니, 다시 시작하는 일상이 그렇게 소중 할 수 없다.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힘든 여행이었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 운운하며, 언젠가 다시 꿈꾸고 있을까?
그리하여 칠순이가 된 후에도 한번 날고 싶다고 칠순이.. 날다 를 그려보고 있을까?
----끝----
그 후 십 년.
더 이상 매일 숙소를 옮기는 여행은 지양한다.
여러 명이 가는 여행도 되도록 피한다. 뜻이 꼭 맞는 사람과 원하는 곳에 오래 머물며 충분히 호흡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
젊을 때부터 명품백, 비싼 옷, 가구, 그릇등 잡다한 물건엔 관심 없었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오직 하나, 떠나는 것만 좋아했다.
가고 싶은 곳, 그곳이 해외면
6개월 전부터 여행을 시작한다.
각종 공동구매, 땡처리 비교사이트를 검색하여 싼 항공권을 무이자 x개월로 결제한다. 저렴하고 취사가능하고 이브자리 깔끔한 숙소를 선점한다.
트레킹을 좋아하니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한다.
(비상식을 충분히 산다)
거대하거나, 올망졸망하거나 상관없이 자연 앞에선 무얼 먹어도 꿀맛이다.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비결(?)이다. 학생 때부터 계속된 거지여행의 업글 정도랄까? 평균 생활비를 많이 초과하지 않는 범위의 비용으로 여행을 기획한다.
혼자 가는 여행도 좋아하지만...
병태가 목숨 걸고 말리니까, 전혀 다른 이유로 함께 다닌다. 여행 싫어한다고 박박 우기는 병태에게 혼자 가겠다고 위협하며 데리고 다닌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따라다닐 정도로 관심 없으니까 모든 것을 백퍼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최고의 여행 파트너다.
그러므로 병태와 함께하는 여행은 계속 진행 중이다.
그래서 칠순이는 날았을까?
결론은... 날았다.
아주 잘, 행복하게 날았다.
십 년을 그리던 샤모니 몽블랑 언저리를 열흘 동안 걸었다. 올해, 6월에..
그 이야기는 천천히 이어 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