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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자의 수난시대-7

렌터카로 프랑스 훑기

by 임경희


세 시간 동안 지하철 타고 샹젤리제 쪽으로 가서 거리도 구경하고, 에펠탑이 잘 보이는 광장에서, 여행의 마지막 밤이니 저녁 식사도 우아하게 즐기고 싶었다. 예약해 놓은 바토무슈 유람선에 올라 야경에 취해 노래도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파리 약국에 가서 내가 알려준 영양크림은 꼭 사야겠다고 말한다. 친구들이 전혀 몰랐던 그 화장품에 대해 말해줬던 내 입술을 쥐어뜯고 싶다. 저녁 먹고 유람선 타고 지하철 막차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너무 빠듯하다고 설득한다. 저녁식사는 포기해도 된다고 입 모아 대답 한다.


한국 여성들 필수 코스라는 몽쥬약국은 시내 외곽이라 샹젤리제 근처의 도매약국을 검색해 놓긴 했었다. 시내까지 나가면 9시가 다 되어 약국이 문 닫을 시간이니 포기하자고 한번 더 사정했지만, 막무가내다.

이번에도 숫자에 밀린다.



시간이 부족하다. 뛰어야 한다.

1호선에서 2호선으로 지하철을 갈아타면서도, 착오 없이 단숨에 달려갔지만 이미 약국은 문을 닫고 있다. 그러나 무서울 게 없는(?)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기세에 놀란 직원의 도움으로 진입에 성공, 그게 뭐라고 전리품 쓸어 담듯, 화장품들을 획득한다.


약국에서 나오니 9시 반, 택시를 타면 좋겠지만 파리에서 택시는 거의 콜택시다.

세 명이상은 탈 수 없어 세 대를 부르기란 너무 복잡할 것 같다. 버스 노선을 느긋하게 검색하느니 뛰는 것이 빠르겠다며 뛴다.

파리에서의 기억은 마치 마라톤선수처럼 뛰었던 기억밖에 없다.


유람선을 타기 위해선 일단 빤히 보이는 에펠탑 방향으로 뛴다. 몇 시가 마지막 배 출발 시간인지는 서두르느라 깨알노트를 놓고 왔기에 알 수 없다. 한 시간 이상을 탄다는 것과 그렇게 되면 지하철 막차도 끊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만 커진다. 유람선에서 내린 후 세 대의 택시로 숙소까지 가는 것은 부담스럽다. 시간을 아끼려면 무조건 뛰어야 한다.


잡힐 것 같던 에펠탑은 마술을 부리는지 죽을 것처럼 숨차게 뛰어도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러닝머신 위를 뛰는 것 같다. 꼬불꼬불 방사선 길을, 하염없이 멀고 먼 길을, 화장품이 든 똑같은 쇼핑백을 하나씩 들고, 일곱 명의 할매들은 뛰고 또 뛰었다.


에펠탑에 다다르자 이미 한계인 듯 가쁜 숨을 내 쉬었지만, 내 정보에 의하면 우리 유람선, 바토무슈는 에펠탑에서도 1.2km 이상 떨어져 있는 왼쪽 두 번째 다리, 일마교 밑에 있었다. 확실하게 알고 가자며 빵집 직원에게 물어보니 그 애는 오른쪽 다리 밑 이란다. 직원 말을 더 신뢰한 친구들이 왼쪽을 주장하는 내 말을 무시하고, 오른쪽으로 뛰었다.

한참을 달렸지만 바토무슈 승선장이 보이지 않자 다시 반대편으로 뛴다.

이봉주 선수처럼 뛴다.


매 시간 정시에 시작하는 에펠탑의 레이저 쇼는 반짝반짝, 엄청 신비스럽고 예쁜 것 같은데 우리는 그 멋지다는 에펠탑을 한 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헉헉대며 달리고만 있다.


점심부터 그때까지 거의 먹은 것이 없어 배 위에서 먹으려고 빵을 샀다. 7개의 바케트빵 봉다리를 하필 달리기에 제일 약한 친구가 들고 맨 뒤에서 사력을 다 해 뛰었다.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무사히 배에 올라 빵을 먹으려니 빵이 두 개나 없다. 빵 두 개를 떨어뜨린 줄도 모른 채 죽어라 뛴 것이다.


7개 정도는 떨어뜨려야 마녀가 찾아오든, 프랑스 미남이 따라오든 할 텐데 두 개만 떨어뜨리니 따라오는 사람은 없고, 괜히 빵만 축났다며 한바탕 또 웃는다.


그렇게 별렀던 센강유람선이지만

가이드인 나는 주변 경치는 안중에도 없이 조바심만 나고, 천천히 도는 유람선이 야속하기만 하다. 제시간에 하선해도 거의 11시 반이 될 텐데 막차를 놓치면 아무래도 숙소로 돌아가기 힘들 것 같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지하철 노선도를 눈 빠지게 들여다보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적는다. 승선장이 일마역이니까 9호선을 타고 한 정거장 간 후에 1호선으로 갈아탄다. 반대 방향으로 가면 큰일이니까 가는 방향의 종착역을 잘 적어 놓아야 한다.


내릴 때가 다가오자 배 입구로 친구들을 줄 세우고,

“내리면 무조건 큰길 방향으로 뛴다.”

“또 뛰어?” 모두 울상이다.

“막 차 일지 몰라. 놓치면 집에 못 가.”

그리하여 우리는 또다시 뛰고 뛰어 무사히 숙소가 있는 바르세 유역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바르세요 광장은 10개 정도의 길이 방사선으로 뻗어있는 것 같았는데, 분명히 우리 호텔 도로 명을 기억하고 그쪽 방향으로 나왔건만 아무리 다녀도 그 길이 그 길 같고 어디에도 호텔이 보이지 않는다. 환할 때 왔던 길인데 이렇게 헤맬 줄 몰랐다. 나름 길눈 밝다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다들 같은자리를 맴돌고 있다.


시간은 또 자정이 훌쩍 넘어버렸고 거리엔 으스스 해 보이는 사람들만 눈에 뜨인다.

작은 호텔이라 부근 상점사람들도 모른다 하여 난감한데 다행히 순찰차를 발견, 경찰관 도움으로 겨우 숙소를 찾는다.

거의 한 시다. 마지막 밤도 그렇게 힘겹게 지나가고 있다.



아~~ 이제 집에 가는 날이다.

여행 다니면서 며칠 남았는지 조바심 내며 세어 본 적이 있었던가?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인천공항에서부터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방정맞은 생각이 들더니 마지막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빨리 내 나라, 우리 공항에 도착하는 날만 기다려졌다.



18시 50분 비행기지만, 캐리어를 맡긴 호텔에 들러 다시 짐을 싸고 주유소에서 기름도 채우고, 차를 반납해야 했으니 여유 있게 시간을 맞춰 떠나기로 한다. 호텔에서 공항까지는 40분 거리라지만 언제 우리가 구글맵 시간에 맞게 다닌 적이 있던가?

14시 30분에 주차장에 집합하기로 하고 두 팀으로 나눈다.


오르세 미술관 팀과, 오랑주리 미술관 팀.

너무 쫓기 듯, 뛰어다니기만 한 것 같아 오늘만은 여유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고, 모네의 수련을 자연채광으로 볼 수 있다는 오랑주리를 오랫동안 동경했기에 나는 오랑주리 팀이다. 우리 팀 세 명은 징그러운 달음박질에서 벗어나자며 모처럼의 여유를 즐긴다.


오랑주리는 널찍하고 한산해서 천천히 그림 감상하기 좋다. 곳곳에 의자가 있어 쉬다가 보다가 깜박 졸기도 하며 르노와르, 모네, 피카소 등 거장들의 작품들을 감상한다.


특히 아꼈다가 나중에 들어간 모네의 수련은

커다란 타원형의 방에 네 작품씩, 두 개의 방에서 관람할 수 있는데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작품을 바라보니 수련이 가득 핀 연못 한가운데 앉아 수련 향기까지 풍겨오는 듯해서 저절로 코를 벌름거리며 흠흠거린다.


밖으로 나오니, 전날 그렇게 걷고 싶었던 샹젤리제 거리가 지척이고, 에펠탑도 여기가 파리라는 듯 한껏 거만하게 서 있으며, 개선문도 보여서 비로소 파리에 오긴 했네 하는 생각이 든다.


잠깐 동안이나마 진정한 파리의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고 숙소로 돌아온다.

느긋하게 식사다운 식사 한번 해보자며 바르세요 광장에서 가장 편안해 보이는 식당 창가에 자리 잡는다. 프랑스에 와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코스요리를 주문한 후, 너무 예쁘게 장식되어 먹기 아까운 전채-연어요리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리는 듯하다. 스테이크에 후식으로 주스까지 마시고 나니 이젠 부러운 것이 없다.


가끔은 이런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낯 검은 사람들과 눈인사도 좀 나누고.. 싶었는데

우리는 왜 늘 쫓기 듯 뛰기만 했을까?

여유작작했던 우리와는 달리 오르세 팀은 여전히 오르세 박물관의 그 많은 작품들을 샅샅이 봤고, 퐁피두까지 보고 왔다며 흡족해한다.


어쨌든 예정한 시간에 공항을 향해 출발하는데, 이제는 적당히 헤매는 건 당연한 듯 살짝 헤맸지만, 첫날의 호텔에 들러 가방도 찾고, 주유도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마쳤으며

공항주차장, 제자리에 렌터카만 반납하면

끝이다...인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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