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좋은 음악이 쾅쾅 가슴을 뒤흔드는데 오스트리아 작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이 빛이 되어 여러 갈래의 거대한 동굴, 천정에서부터 바닥까지 가득 쏟아져 내려오다가, 점점이 흩뿌려지고, 너울대며 춤추다가, 다소곳이 숨죽이고..
감히 숨을 쉴 수 없다.
클림트의 색채가 얼마나 영롱하고 환상적인지 모두 반쯤은 넋이 나가 풍덩 빠져 허우적거린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며 장치 때문에 반드시 이곳에 와야 관람할 수 있을 것 같아 많이 안타깝다.
우리 어린아이들에게 이런 걸 보여준다면 꿈과 상상력이 쑥쑥 자랄 것 같은데..
전시장에서 수많은 그림을 감상해 봤지만 이렇게 그림 속에 함께 들어갔다 온 것 같은 벅찬 느낌은 처음이었다. 요즘에는 미디어 아트가 발전하여 우리나라 어느 곳이든 볼 수 있을 정도지만 여행 중이던 9년 전엔 처음 접해 본 전시였다. 거대한 동굴에서의 빚의 향연은 가히 충격적이고 감동 그 자체였다.
클림트에 맘껏 젖어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이제껏 친구들에게 별로 못 들었던 찬사가 쏟아진다. 잘 알려지지 않은 보석 같은 곳에 데려와 주어 모두들 고맙다고 해서, 으쓱 기분이 좋았다.
이젠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론 알프의 주도시인 리용으로 간다. 리용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각의 도시고, 기뇰이라는 인형극으로도 유명하여 시간이 되면 인형극도 보고 싶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역시 시간 탓으로 인형극은커녕, 인형도 못 봤다.
늦은 저녁에야 도착했지만 리용의 인상은 너무 좋았다. 예약한 아파트가 맛 집이 밀집한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것도 좋았고, 숙소 직원이 너무 유쾌하고 친절해서 또 좋았고, 무엇보다도 지하철에서 만난 학생커플과 함께한 푸르비에르 성당이 너무 좋았다.
리용의 명물인 푸르비에르 성당에 가려고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데 아주 선량해 보이는 남학생이 쭈뼛거리며 말을 걸어온다.
여자 친구가 내 모자와 같은 걸 사고 싶다는데 어디서 샀냐는 것이다. 한국이라니까 엄청 실망한다.
그렇게 그 아이들과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들은 선약을 미루면서까지 우리를 성당으로 안내해 준다. 지하철과 모노레일을 갈아타고 가면서 버벅 거리는 대화지만 아주 즐거웠다. 금발의 예쁜 여대생이 쓰면 더 어울릴 것 같아 망설임 없이 모자를 벗어줬는데 어찌나 좋아하는지 우리도 덩달아 기쁘다.
그 애들 덕분에 쉽게 푸르비에르 언덕에 올라 성당과 함께, 론강과 손강이 흐르는 예쁜 리용을 내려다본다.
한참 놀고 난 후 그들과는 요란스러운 작별을 했다.
숲 속 오솔길 따라 걸어 내려오다가 이번엔 모로코에서 왔다는 초등학교 수영 팀을 만나 세계 공용어인 바디 랭귀지로 함께 사진 찍으며 즐거웠다. 리용에선 할 것도 볼 것도 많았지만,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이다.
부랴부랴 맛 집이 즐비한 우리 숙소로 돌아와 거의 파장시간이라 파스타만 가능하다는 식당에서 파스타를 골고루 주문하여 나눠먹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리용에서는 유명하다는 부숑이란 전통식을 꼭 맛보고 싶었는데 안타까웠고, 부숑이 아니더라도 리용은 꼭 다시 가보고 싶은 도시로 마음에 남아있다.
드디어 다음날은 베르사유를 거쳐 파리로 들어가는 날이다. 여행 내내 기상 당번은 나였다. 친구들은 매일 나만 믿고 늦장을 피웠는데 하필 그날 내가 일어나지 못했다.
유독 잠자리에 예민해서 여행기간 내내 3~4시간밖에 잠을 못 잤기에 하루쯤 푹 자고 싶다고 친구의 수면제를 얻어먹은 게 화근이었다.
어느 날보다 시간이 빠듯해 일찍 서둘러야 했는데 9시가 되어 친구들이 흔들어도 정신을 못 차릴 지경으로 약에 취해 있었다.
그리하여 예정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떠났으니, 베르사유에 세시가 넘어 도착한다.
아름다운 왕비의 정원을 건성으로 훑으며 이번 여행에서 늘 그랬듯이 빨리빨리를 외친다.
베르사유 정원에서만 놀기에도 하루는 모자랄 듯, 너무나 아름답고 넓은 정원을 꼬마열차로 휘리릭 돌아봤으니, 미리 예매해 갔던 비싼 입장료가 아깝다.
파리 시내에선 할 일도 많고, 볼 것도 많으니 서두르자며 궁전을 급히 빠져나왔건만, 듣던 대로 파리 시내를 운전하기는 너무 힘겨웠다.
시간을 아끼려고 시내 중심의 숙소를 예약했었다. 구글 맵에서 보이는 숙소는 센강 따라 일직선으로 가면 되는 아주 단순한 길이었다.
그러나 파리 근교에서부터 엄청나게 밀리더니, 정신없이 뻗어있는 나선형 도로는 살짝만 틀어져도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처럼 멀어진다.
분명히 우리가 가는 길 왼쪽에 있어야 할 에펠탑이 느닷없이 나타나 오른쪽에 떡 버티고 있고, 지금쯤이면 나와야 하는 콩코드 광장은 가도 가도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도 역시 순자가 운전하고 있었는데 나머지 6명이 더 긴장하여
"순자야 직진, 어~~ 어 순자야 오른쪽에 사람! 순자야 순자야 스톱 스톱!"
각자 입으로 운전을 해대니까 암만 침착한 순자라도 반은 얼이 빠진다. 앰뷸런스 앵앵대는 도로에 무작정 진입했다가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고, 직진신호 끊긴 줄 모르고 교차로에 들어섰다가 상대방 운전자에게 온갖 프랑스욕은 다 먹으며 눈물 나게 헤맨다.
베르사유에서 30~4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던 호텔을 찾느라 거의 초주검이 되어
세 시간쯤 파리 시내를 돌고 있는데, 이번엔 그야말로 날 벼락처럼 하늘에서 뭔가 묵직한 큰 화분 같은 것이 쾅!! 하며 바로 차 앞에 떨어진다. 고층 아파트에서 부부싸움이라도 벌어졌는지 고함소리와 함께 뭔가를 마구 내던지고 있다.
걸음아, 아니 차야 나 살려라.
육순이들의 줄행랑은 차 속에서도 계속된다.
그때도 정말 하늘이 도우신 것 같다. 간발의 차이로 우리 차에 떨어졌다면 누구 하나 크게 다쳤을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린, 또 하나의 웃지 못할 사건이다. 호텔 근처에서 끊긴 네비 때문에 역시 500m쯤 걸으며 헤맨 끝에 겨우 찾은 호텔, 공영주차장에 주차하고 나니 8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