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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다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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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경희 May 24. 2024

다시 여행 -비가 몹시 내린 날

꽃비에 취한 날

예고대로 비가 내린다

걱정 없다. 우산 쓰면 된다.

필요한 정보는 만족할 때까지

뒤져  누리려고 애쓰는 영자는

우산 쓰고 걸을 수 있는  

동네 길을 열 개도 넘게

찾아놓았


오늘 여기 다 갈 거야

모두 평지니까  20k는 걸어야지.

비  오는 날도 죙일 걷자고?

못 걸어 죽은 귀신이 붙었나?

ㅋㅋㅋ 봐줬다

네, 다섯 개로  순하게 양보한다


미우지 해안도로 끝에   주차하고

광바위길을 걷는다.

너무 일러 마이산에선 알현하지

못했던 벚꽃이  통영에  오니

온 거리가 꽃동네다.

비가 오니 꽃비다

혼자 쓰는 우산이 저다지도 삐딱한 이유가 뭘까?   습관된 배려  때문이라며 이쁘게 봐 준다


꽃비 내리는 바닷길을

우리만 걷는다

돌아올 때는  팔각정 쉼터에  

어르신 한 분이 앉아있다

비 오는 날을 즐기시는 낭만파?

아님 할머니 하고 다투시고

분을 삭이시는  중인가?

전자이길 바라며 지나친다.

오늘은 하릴없이 아무 길이나

기웃거리고 아무 생각이나

하는 날로 정했으니 뭐.




거의 50년 만에  해저터널도

휘리릭 둘러보고.



서둘러 별렀던 맛집으로 간다

그동섬산행만 하느라

검색해서  저장해 놓고 

못 가본 통영의 맛집 중  

상위권을 차지한 곳이다.  

비 오는 일임에도

대기시간  십 분.  

대기자 명단에  이름 올려놓 

바로 옆의

전혁림 미술관으로 향한

색채의 마술사다운 외관.

강렬하고 따뜻한 색채로

구상과 추상을 오가며

작가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풀어낸 작품들.

좋아하던 작품들을

오랜만에 마주하니

참 좋다.



봄날의 책방

시간이 없어 들어가 보진

못했지만  벚꽃 가득한 계절이라

더욱 정스럽다.

파란 문 안에는 하얀 블라우스에

순면 꽃무늬 치마를 입은 여인이

반갑게 맞아줄 것 같던

예쁜 책방.



바삭한 튀김이 올려진 텐동은

기대만큼 흡족하다.


모처럼 창이 넓은 카페에 퍼질러

앉아  아보카도를 마시며

여유를 누려본다.

무어든 가성비를 들이대는 영자는

늙은 부부가  카페에 가봤자 각자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 뻔하니까  여행지에서도

거의 카페에 들르지 않는데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오늘은

예외다.

모처럼의 비멍에 마음이 촉촉하다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으므로

밍기적 거리는 병태 손을

잡아끌고 간 수변공원

비 맞는 벚꽃은 왠지  처연하다.

벚꽃에 취한 김에 시장에 들러 

회와 야채, 소주를 사고

숙소로 돌아와  비 오는 바다 보며 

술에 취해 보고 싶


그 시간만 기다리며 낮시간을

묵묵히 견딘 병태는 신났다

흥정엔 약한 영자는

주르륵 늘어서 있는 횟집 중

초입에 있는 곳에서 부르는 대로

지불하고 회 접시를 받는다.

어차피 둘이 먹기엔 충분하다


야채 사러 좌판 할머니에게 간다.

비 오는 날 종일 쪼그려 앉아 계실

할머니 앞엔 세 개의

붉은 통이 놓여있다

다 합해도 몇 만 원일 것 같은

야채들.  여행 마지막 날이라면  

많이 팔아드리고 싶은데..


젊었을 때 부부가 많이  돌아댕겨.

너무 많다고 조금만  주셔도

된다는  상추를 검정에 봉지

꾹꾹 눌러 담으신다

까만 할머니의 손톱이 유난히

오래 마음에 걸린다.

거스름돈 천 원을 무심코 받아

온 것도  내내 후회스럽다.


숙소에 돌아와

뜨끈한 물속에 몸  담그고

찝찝함을 잊는


비 오는 창가에  앉아

세상 편한 자세로 

소주 반 병을 마셨는데 

몸이 술을 거부하네. 

창밖에선 파도까지 일렁이는

기막힌 밤바다  앞임에도...


살짝 취해서 날아오르는 순간을

즐기는데 이젠 그것도 쉽지 않다.

슬프다


늘  하던 대로 병태는 침대에

누워 리모컨을 집어 들고, 

영자는 베란다 부엌으로 나간다

문을 닫아 소음을 차단시킨 후,

식탁 의자에 앉아  폰  속에

고개를 처박는다.


집이건 여행  중이건

저녁 식사 후 老者부부의 시간은  

어디서거의 다.

느닷없이 처량하다

때문이겠지?


내일  역시 오래 별렀던  

소매물도 등대섬을 갈 예정이니

그 섬을 기웃거리

살짝 가라앉는 마음을

힘껏  밀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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