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모단 May 05. 2020

우리 함께 싸우는 이 길의 끝에는…

세가마크3 게임 <더블드래곤>


  “사이좋게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이 있다. 이들의 행복을 질투해서인지 갑자기  무리의 악당들이 나타나 여자를 기절시키고 어딘가로 끌고 간다. 백주대낮에 벌어진 납치극. 남자는 연인을 구하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떠난다.”


  셰익스피어 시절에 쓰였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고전미가 물씬 풍기는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는 게임 더블드래곤은 1987년 테크노스재팬에서 발매된 횡스크롤 액션 게임이다. 이후에 발매되는 <파이널 파이트>, <천지를 먹다> 등의 게임은 물론 <스트리트 파이터> 등의 대전 격투액션게임의 원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전설적인 작품이다.

  당시 대한민국의 수많은 초중고 남학생들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혹은 끝나지 않았음에도) 득달같이 오락실로 달려가 50원짜리 동전을 줄줄이 넣어가며 사랑하는 여인을 되찾기 위한 사투를 벌였다. ‘나 말고는 모두 적’이라는 명쾌한 세계관 속에서 악을 제압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쾌감은 소년들이 이때까지 맛보지 못한 신세계였다.

 


  특히 팔꿈치 치기로 불리던 백엘보 기술이 제대로 적중하면 어떤 적이든 단 한 방에 시원하게 나가떨어지는데 이때의 통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적의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서있는 스탠딩 상태와 더불어 더블드래곤의 상징과도 같은 기술이었기에 쉬는 시간만 되면 교실 뒤편에서 친구들끼리 치고 박으며 실전에 적용시켜 보기 일쑤였다. 아무리 소년이라고 해도 인간의 뼈 중에 가장 딴딴한 팔꿈치 뼈였기에 부주의하게 엘보를 날리다가 갈비뼈에 금 가는 녀석들이 한 학교에 한두 명쯤 꼭 있었던 것도 역사적인 사실.  

  이렇게 오락실, 즉 아케이드 시장을 평정한 더블드래곤은 이내 수많은 가정용 게임기로 이식됐다. 패밀리(패미컴), 재믹스(MSX), 겜보이(세가마크3) 등의 플랫폼으로 넘어온 이후 아이들의 투쟁은 오락실뿐 아니라 집에서까지 이어지게 됐다.




  1990년 당시의 국민학교 3학년, 10살짜리 꼬맹이들에게 오락실은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애증의 공간이었다. 험악한 중학생 형들이 잔뜩 있어 언제 삥 뜯길까 두려우면서도 휘황찬란한 화면과 천지를 뒤흔드는 요란한 사운드의 매혹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짤랑짤랑 동전 소리가 날 정도로 여유 있는 아이는 거의 없어서 대부분 뒤에 서서 구경만 하는 갤러리 모드였다. 나 또한 다른 사람이 플레이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는 게 대부분이었다. 설령 돈이 있다한들 모두가 지켜보는 인기 게임 앞에 당당히 앉아 플레이하는 건 엄두도 못 내는 소심 소년이었다. 게임 도중 뒤에서 누군가 키득대면 ‘내가 잘 못해서 비웃나 봐’ 라고 자책하며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였으니까.  


  그러던 중 같은 반의 진우라는 녀석과 가까워지게 됐다. 진우가 반장, 내가 부반장이라서 환경미화나 이런저런 활동을 같이 하며 친해진 것이다. 국민학교 친구들이 으레 그러하듯 어느 날은 ‘우리 집에 가서 놀자!’ 라는 초대를 받아 방문하게 됐는데 녀석의 집은 무려 ‘목욕탕’ 이었다. 이런 달동네 학교에 목욕탕집 도련님이 있다니! 부잣집 아들내미답게 거실 TV 앞에는 겜보이가 놓여 있었고 더블드래곤 팩 또한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 외동아들이라 늘 혼자서만 놀던 걔는 이 게임을 몇 달간 했는데도 아직 끝까지 가본 적은 없다고 했다.

  엔딩을 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혼자 깨기는 영 힘드니 다음날 아빠랑 같이 용산전자상가를 찾아가 다른 팩으로 바꿔올 계획이라고 했다. 때문에 오늘은 더블드래곤 팩을 갖고 있는 마지막 날인 것이고, 그런 날 마침 오락을 좋아한다는 내가 놀러 왔으니 2인용으로 함께 플레이하자고 제안했다. 가슴이 뛰었다. 항상 남들의 플레이를 뒤에서 지켜만 봤지 직접 뛰어든 적은 없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승낙했다. 우리는 조이스틱을 집어 들고 연인을 되찾기 위한 전장에 들어섰다.

  


  10살 소년들의 반사신경과 동체시력, 판단력은 아직 한참 미완이다. 오락실의 고인물 형들처럼 능숙하게 조작하질 못하니 싸움은 꽤나 길어졌다. 공원 산책로, 지하철, 번화가를 지나며 적을 아무리 물리쳐도 그들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세어 보진 않았지만 수백 명은 족히 넘고 어쩌면 천명 단위까지도 될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사실 동네 깡패가 아니라 남미의 마약 카르텔급 아닌가?  

  어찌 됐든 싸움은 계속됐다. 더블드래곤에는 일격에 모든 위기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슈퍼 필살기 같은 게 없다. 소모된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아이템도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은 두 사람이 악으로 깡으로 헤쳐 나갈 수밖에 없는 거다. 계속 싸우며 스테이지를 나아가다 보니 뭔가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조금씩 생겨났다. 둘이 가깝다고는 해도 아직 새 학기이고 친구가 된지는 고작 한두 달 밖에 되지 않는다. 막 고백에 성공해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연애 극초반의 연인들처럼 아직 서먹하다면 서먹하다고도 할 수 있는 사이이다.


  그런데 누군가 머리끄덩이라도 붙잡히면 다른 한 명이 본인의 안전은 살피지도 않고 부리나케 달려와 적을 떼어내 주고, 한 명에게 너무 많은 적이 몰려 위험해지면 나머지 사람이 수라장 한복판으로 득달같이 달려들어 주저 없이 주먹을 날린다. 나 하나의 생존보다 ‘우리, 함께, 같이’ 라는 가치가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뜨거운 등을 맞대고 뒤에 서있는 이 녀석이 든든하고 의지가 된다. 길은 아주 멀고 험하지만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목숨을 걸고 뚜벅뚜벅 걷는다. 고개를 돌려보면 내 옆에는 항상 같은 곳을 바라보는 동지가 있다.  백만 명의 적이 눈앞을 막아서도 이 아이와 함께라면 어깨 걸고 당당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10살 사나이 가슴 깊은 곳이 불가마라도 집어삼킨 듯 뜨거워졌다.     

 


  투쟁은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적의 최종 보스는 끝판왕답게 총을 들고 등장한다. 주먹싸움에 총? 건슈팅 게임 장르도 아니고… 하지만 토 달 시간조차 없다. 진우는 왼쪽, 나는 오른쪽. 누구도 작전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서로의 몸짓만으로 의중을 읽고 적절히 포메이션을 나눠 싸움을 이어갔다. 누가 총 아니랄까봐 (심지어 권총도 아닌 소총이다) 보스의 3점사 사격 한 번이면 사경을 헤매다가 쓰러진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밝았던 창밖은 이미 어둑해져 진우네 엄마나 아빠가 당장이라도 집에 돌아와 ‘게임기 얼른 끄고 학원 가야지!’ 라며 호통을 치실 것만 같다.


  보스와의 싸움이자 시간과의 싸움이다. 초조함이 느껴졌지만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차근차근 공략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점프킥 공격에 이은 진우의 주먹 연타가 보스의 안면부에 통렬하게 적중하면서 길고 긴 싸움은 끝났다. 적장이 쓰러졌다. 우리가 물리친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조이스틱을 하늘로 집어던지며 환호했다. 진우가 나에게 달려들며 와락 끌어안았는데 부잣집 도련님 치고는 꽤 저돌적이라 소파 뒤로 넘어가기까지 했다. 길고 긴 10년의 인생 중에 이토록 짜릿한 성취감은 처음이었다. 어깨와 손목에 통증이 좀 느껴졌지만 대단치는 않았다. 어딘가에서 그리스 전쟁의 여신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두 명의 작지만 위대한 승리자들이여, 오늘 밤만큼은 마음껏 울어도 좋다!’

  

  잊고 있던 TV 화면으로 눈길이 갔다. 대부분의 게임에서 최종 보스를 물리치면 감격스러운 엔딩이 나오거나 ‘Thank you for playing' 등의 문구가 나오면서 끝나는 게 일반적인데 벽에 매달려 있는 여자 친구는 아직 내려올 생각이 없고 나와 진우의 1P, 2P는 서로 주먹을 쥔 채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게 뭐지? 한동안은 상황 파악이 안 되다가 어렴풋이 분위기를 읽었다. 아직이다. 게임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다. 마지막의 마지막 최종장에 다다른 지금, 둘이 싸워서 단 한 명의 승자를 꼭 정해야지만 게임이 끝나는 것이었다.



  우린 말을 잃었다. 시체로 뒤덮인 대지를 함께 헤쳐나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둘이 죽일 듯이 싸우라고? 이렇게 잔인한 경우가 어디 있어! 저 여자가 도대체 뭐라고 우리의 티타늄처럼 강고한 우정을 시험하는가. 불쾌함에 인상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그냥 게임기 끌까? 어쨌든 이게… 다 깬 거잖아?”

  “그렇지? 왕도 깼고 다 끝난 건 맞지…”

  찜찜함은 좀 있었지만 그렇다고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며 피를 볼 순 없다는 생각에는 진우도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TV를 지켜보던 내 친구는 화면 아래쪽에 있는 낭떠러지를 응시하다가 말을 꺼냈다. 보스와 싸울 때는 일종의 핸디캡이자 배수의 진 같은 느낌으로 존재하는 함정 같은 곳인데 이곳에 떨어지면 그 즉시 사망이다.

  “그래도 그냥 끄는 건 너무 아쉽다 야. 우리 그냥 멋있게 여기서 같이 떨어지자.”


  생과 사의 골짜기를 넘나들며 힘겹게 여기까지 와놓고는 전원 버튼만 톡 눌러 기계를 꺼버리는 게 멋대가리 없다는 진우의 의견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가 선택한 마무리는 동반자살, 확실히 드라마틱하고 멋진 제안이었다. ‘세상은 우리에게 서로 칼을 겨누라고 강요했지만 우린 너희가 정해놓은 룰대로 가지 않을 거야. 길이 없다고? 그럼 우리가 새 길을 만들지 뭐!’

  쿨가이였다 진우는. 같은 나이인데 어쩜 이렇게 생각이 깊은지 존경과 함께 약간의 질투마저 났다. 그래 대찬성이다. 승부로 점철된 비정한 세상, 까짓 거 뛰어내리자. 하나 둘 셋을 하면 같이 뛰기로 했다. 비록 게임 상이지만 죽음으로 직행하는 무저갱으로 뛰어든다는 건 역시 무서웠다. 저 세상으로 가는 두려운 길. 하지만 벗과 함께라면 용기를 낼 수 있다. 여자, 싸움, 욕망, 권력, 투쟁… 모두 덧없도다. 저 멀리 피안으로 떠나자꾸나. ‘하나 둘…’ 숫자를 세는 우리의 목소리는 명징하고도 담담했다.

  “셋.”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들의 낭랑한 카운팅과 함께 나의 분신, 나의 아바타, 나 그 자체가 깊고 깊은 암흑 속으로 몸을 던졌다. 죽음을 향해 속절없이 떨어진다. 허나 외롭지는 않다. 그 어떤 지옥이라도 내 옆에는 친구가 있… 친ㄱ… 내 친구가… 그대로 난간에 서 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조이스틱 고장인가? 아까 보스 물리치고 하늘 높이 던지고 떨어졌을 때 고장이 났나? 내 껀 멀쩡한데? 아니면 잠시 재채기나 하품이 나서 타이밍을 놓쳤나? 실수인가? 근데 왜 저렇게 기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웃고 있지? 저 표정은 마치… 브라이튼 항구에 한 발 늦게 도착해 발만 동동 구르는 런던 경찰을 증기여객선 1등실에서 와인잔을 든 채 바라보는 괴도 루팡의 얼굴 같잖아?!


  진우는 배를 잡고 떼굴떼굴 뒹굴면서 웃었다.

  “이겼다! 이제 엔딩 나온다! 내가 깼다! 으헤헤헤!”

  그는 뛰어내리지 않았다. 실수도 고장도 아니다. 애당초 떨어질 마음이 없었다. 그저 이기고 싶었을 뿐이다. 마지막 1:1 싸움의 승리 확률 50% 보다는 100%의 완벽한 승리가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토록 순수하면서도 처절한 승부욕. 이기고 싶다는 간절함. 이 아이는 나와 다르다. 나이가 같고 성별도 같지만 종 자체가 아예 다르다. 반드시 승리하여 브라운관 속 금발 여자를 차지하겠다는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왜 아까는 몰랐을까.


  납치됐던 여자 친구가 쇠사슬에서 풀려 내려온다. 그리고 진우의 캐릭터… 라기보다는 진우 그 자체와 키스를 나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한 절세 미녀와의 키스. 패자는 시신은커녕 이제는 그 흔적조차 없고 몇 시간에 걸쳐 싸워 온 기억은 희미해져 간다. 주인공 커플의 커튼콜은 화려한 박수와 함께 이어지지만 조연을 위한 자리는 그 어느 곳에도 없다.

  엔딩을 보며 너무나도 신나 하는 진우를 두고 힘없이 일어섰다. 나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진우네서 우리 집까지 가는 골목길은 지금까지 수백 번도 넘게 다녔을 익숙한 길인데 그날만큼은 아주 낯설었다. 정확하게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세상’이라는 게 도대체 어떤 곳인지, 다른 사람들은 얼마만큼의 비장한 각오로 이 약육강식의 밀림 속을 헤쳐 나가고 있는지, 그렇다면 나는 어떤 마음으로 이제부터 살아가야 하는지, 아니 살아남을 수 있기는 한 건지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결론이 나진 않았다. 60~70년간 견지해야 할 인생관을 결정하기에 10살은 조금 이른 나이였으니까. 하지만 누구보다 믿었던 친구에게 최후의 순간에 배신당하고, 여자도 빼앗기고, 결국엔 죽임까지 당했던 생후 9년 4개월 소년의 더블드래곤 한 판은 아주 오랫동안 씁쓸하면서도 복잡한 상처로 가슴 한 구석에 남았다.

  울먹거리며 집으로 향하던 어느 봄 밤의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