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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Oct 19. 2020

음식으로 누군가를 괴롭힐 수 있을까?

<오늘도 괴롭히는 도시락> 2019


난 미각이 없다. 아니 없다기보다는 극도로 무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단맛과 짠맛 정도는 구분할 수 있지만 르 꼬르동 블루를 수석 졸업한 셰프님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파스타와 오뚜기 3분 레토르트 파스타 맛은 구분하지 못한다. 양쪽 모두 똑같이 맛있다. 꽁꽁 언 냉동 삼겹살과 저온숙성 호주 프리미엄 와규의 차이도 거의 못 느낀다. 그저 맛있는 고기이자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일 뿐.


이처럼 음식이나 맛에 민감하지 않은 내가 회사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 보니 문화충격을 받기 일쑤였다. 일하는 중 시간이 늦어져 저녁을 먹고 계속 업무를 해야 하는 상황. 멀리 갈 수 없기에 근처에 보이는 베트남 음식점을 가리키며 어떠냐고 묻자 후배가 말했다.

“아… 쌀국수… 선배, 제가 사실 아까 점심때 면을 먹었거든요.”


점심에 면 요리를 먹어서 저녁으로 또 먹을 수는 없다고?!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너 지금 똑같은 쌀밥을 수십 년째 먹고 있을 텐데 그건 뭐니 그럼?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그들이 아닌 ‘내가 이상한 사람’ 이라는 걸 겸허히 받아들이게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한 끼 식사는 되는대로 적당히 때우는 게 아니라 지친 일상의 소중한 힐링이자 삶의 활력소였던 것이다. ‘부대찌개? 나 그저께도 부대찌개 먹었어’, ‘저 점심에 제육볶음 먹었는데 또 돼지고기 집에 가자고요?’ 이런 대사들을 정말 많이 들었다. 다양한 음식을 즐기려는 식도락가들의 삶,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혼자 사는 싱글 남성에게 이런 체질과 입맛은 사실 굉장한 행운이다. 맛에 민감하지 않아 뭘 먹어도 맛있는 데다가 어지간해선 질리지도 않는다. 매일은 아니어도 가끔 퇴근이 이른 저녁이나 약속이 없는 주말에는 직접 밥을 해 먹는다. 배달음식을 좋아하지 않기에 언제나 직접 만들어서 먹는 편인데 ‘오늘은 뭘 해 먹을까’, ‘재료는 뭐가 남아있지’ 같은 고민들이 꽤 성가셔 언제부턴가 항상 똑같은 음식을 만들어서 먹게 됐다. 메뉴의 유지 기간은 딱 1년. 뭘 먹을지 하나를 정하면 1년 동안은 오로지 그것만 해 먹는 것이다.



올해는 치즈오믈렛의 해였다. 작년엔 토마토파스타와 시리얼로 1년을 보냈고 재작년은 데리야키 소스 닭가슴살 덮밥, 그 전엔 낫또를 곁들인 고등어구이였다. 재료를 남김없이 효율적으로 쓸 수 있고 똑같은 것만 계속 만들다 보니 점점 실력도 는다. 감금당해 15년간 군만두만 먹던 오대수의 현신이라고 놀리는 친구들도 있지만 나는 편하기만 하다. 다만 너무 한 음식만 고집하다 혹 건강상의 문제라도 생길까 싶어 1년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주로 새해 1월 1일에 심사숙고하여 메뉴 교체를 단행한다. 남들이 거창한 새해 계획을 세울 때 나 또한 ‘올 해의 메뉴’를 선정해야 하는 막중한 고민을 하는 것이다.


오롯이 나만을 위해 만드는 1년 365일 똑같은 요리. 그러나 누군가에게 만들어주기는 좀 그렇다. 솜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미각이 둔해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를 몰라 양념이나 간을 거의 안 하다 보니 사찰음식에 버금갈 정도로 슴슴하고 밍밍한 건강식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그저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수명을 연장키 위해 의무적으로 만드는 밥이다 보니 즐거움이나 행복,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본능적인 행위에 그치는 것이다.


‘소울 푸드? 먹방? 줄 서서 먹는 맛집? 그게 뭐 대수라고 여기저기서 난리람. 어차피 꾸역꾸역 욱여넣고 배에 들어가면 다 똑같은 거, 그냥 몸 움직이게 하는 연료 아니냐?’ 이처럼 먹거리에 있어서 한없이 냉소적이기만 하던 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잘 차린 강된장 보리굴비정식처럼 구수하게 찾아온 밥 영화가 한 편 있었으니…






이혼 후 두 딸을 끔찍이도 아끼며 키우는 싱글맘 엄마 카오리. 낮에는 도시락 공장, 밤에는 이자카야에서 투잡을 뛰며 사랑과 정성으로 두 딸을 기르지만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막내 후타바의 반항기가 점점 심해져간다. 반항이라고 해서 어마어마한 건 아니지만 엄마 말은 들은 체 만 체 만사에 짜증만 내는 사춘기 소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렸을 때는 엄마 곁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생글생글 웃던 막내딸이 이젠 자기 방문에 ‘무단침입금지’ 푯말을 걸어놓을 정도로 까칠해졌다. 어쩌다 이렇게 버릇없어졌을까. 카오리는 결심한다. 나도 더 이상 가만있지 않겠어!



부모 알기를 우습게 아는 딸을 혼내주기 위한 엄마의 복수극이 시작된다. 그 복수의 방법은 바로 엄청나게 귀엽고 예쁜 점심 도시락을 싸주는 것이다. 휘황찬란한 총천연색의 도시락. 유명 캐릭터나 그림은 물론 글씨도 한가득 넣고 연예인의 캐리커처도 등장한다. 계절에 맞는 풍경이나 대사는 물론 여름에는 납량특집 도시락까지. 쿨하고 도도한 반항소녀 후타바에게 이 도시락은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럽기만 하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에게나 어울릴법한 귀여운 도시락이 매일같이 계속되자 점심시간이면 반 친구들이 몰려들어 오늘은 또 얼마나 예쁜 도시락일지 구경하는 지경에 이른다. 친구들의 관심도 부담스럽고 아이들 소꿉장난 같은 도시락도 창피하다. 후타바는 엄마에게 항의한다. 이런 거 그만두고 제발 평범한 도시락을 싸 달라고. 하지만 엄마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네가 반항을 멈추면 엄마도 이 도시락 그만둘게~”



엄마와 딸의 귀여운 투쟁기를 담은 <오늘도 괴롭히는 도시락(今日も嫌がらせ弁当)>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잔잔한 소품 같은 일본 영화다. 매정한 딸을 괴롭히기(?) 위해 매일 새벽에 일어나 정성껏 만든 도시락 사진을 올린 엄마의 실제 블로그 ‘카오리의 그저 괴롭히기 위한 도시락’ 에서 따온 제목처럼 영화 속에선 밥과 반찬, 도시락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퀄리티에 마치 미술작품을 방불케 하는 도시락들을 보고 있으면 이 도시락을 만든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타인과 조금만 달라도 배척과 손가락질 당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일본 사회에서 홀몸으로 두 딸을 키우는 게 어디 보통 일이었으랴. 세상의 편견에 굴하지 않고 가녀린 양 팔로 아이들을 끌어안고 씩씩하게 살아온 엄마에게 막내딸의 무심함은 얼마나 아프게 다가왔을까. 바깥에서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까지는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었지만 믿고 의지해온 내부로부터의 균열은 말도 못 하게 쓰라렸을 거다. 막내의 마음을 어떻게든 돌려보기 위해 아무리 피곤해도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딸을 괴롭힐 영양 만점의 귀요미 도시락을 준비하는 엄마 카오리.



영화는 두 시간 내내 엄마의 무한한 사랑과 그 사랑을 듬뿍 담은 복수(?)에 집중한다. 처음에는 마냥 거북하고 부끄럽기만 하던 엄마의 도시락에 조금씩 마음을 여는 후타바. 그녀 또한 학교에 좋아하는 남학생이 생기자 대회에 출전하는 그를 위해 만들게 되는 인생 첫 도시락. 소중한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한가득 담아 식사를 준비한다는 것의 숭고함. 상대방의 건강과 생명, 행복을 위해서 차리는 따뜻한 밥 한 공기의 힘. 힘겹게 도시락을 만들어보고 나서야 엄마가 지난 3년간 매일 아침 자기를 위해 준비한 정성스러운 한 끼 식사가 얼마나 귀한지를 깨닫게 되는 후타바.


전형적인 서사지만 기교 하나 부리지 않고 우직하게 나아가는 영화다. 누가 실화 아니랄까 봐 드라마틱한 반전이나 갈등도 없어서 결국 딸은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해 어엿한 사회인으로 발돋움한다. 학창 시절 내내 애정으로 똘똘 뭉친 밥과 반찬을 먹고 자란 아이란 얼마나 행복하고 건강할까. 후타바는 몸과 마음, 둘 다 튼튼할 게 분명하다.



영화는 여기에서 끝나지만 실제 주인공들의 삶은 계속된다. 찾아보니 엄마 카오리상의 블로그는 아직도 운영 중이고 가장 최근 포스팅인 2020년 9월의 글을 보면 막내딸이 회사에서 일하는 자기를 위해 만들어줬다는 도시락을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자랑하고 있다. 딸바보가 따로 없다. 물론 엄마처럼 말도 안 되게 예쁜 도시락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밥과 고기, 계란, 콩, 방울토마토까지 균형을 살려서 예쁘게 담은걸 보면 피는 못 속이나 보다.


무엇을 먹을지 잠시 고민하는 시간조차 귀찮아 1년 내내 똑같은 밥만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3년간 단 하루도 메뉴가 겹치지 않을 정도로 맛있고 개성 넘치는 도시락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 둘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두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다. 먹게 될 사람을 향한 깊은 애정과 정성이 담기지 않은 음식이란 그야말로 속 빈 강정에 불과한 것. 영화를 보며 조금은 반성하게 됐다.


그래서 결심했다. 앞으로는 대충 때우기 위한 식사 말고 스스로의 몸을 좀 더 아끼고 사랑하기로. 그런 의미에서 1년에 한 번 연례행사로 교체하던 식단을 이제는 1년에 두 번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S/S시즌과 F/W시즌으로 나눠 보다 다양하고 세분화된 제철 음식을 만들어 먹는 걸로.

전국의 싱글 요린이들, 모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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