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더지> 2011
세밑 한파가 몰아친 12월 31일 밤의 인천 동부경찰서는 조용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사람들은 귀가를 서둘렀고 가족들과 따뜻한 저녁을 나눠 먹으며 연말 가요대상을 보거나 특집 TV쇼를 보며 조잘조잘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밤샘집회나 1인시위도 없는 평화로운 밤이었기에 전의경 대원들 중에도 휴가나 외출을 나간 녀석들이 많았다.
같은 날 전입 온 동기 대부분 데모 진압이 주 임무인 기동대로 배치된 것과는 달리 비교적 꿀보직인 유치장 근무로 빠져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동기 녀석이 급작스레 휴가를 냈다. 그래서 원칙적으로는 안 되지만 하룻밤 근무를 대신 서주기로 했다. 형사 당직실을 통과해 지하로 한 층을 더 내려가면 있는 동부서 유치장. 오래된 경찰서답게 페인트칠은 벗겨지고 녹이 벌겋게 슨 쇠창살이 살벌하게 나를 반겼다. 아무리 한가한 날이라도 손님(?) 서너 명은 있을 거라 들었는데 날이 날이라 그런지 유치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네가 용구 대신 오늘 근무하기로 한 의경이구나? 조용한 날 잘 왔네. TV 보든 인터넷 하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아침 교대자 올 때까지 수고 좀 해줘. 오늘 밤은 뭐 별일 없을 거야.”
같이 밤 근무를 하게 된 오늘의 파트너 경사 아저씨는 나른하게 몇 마디 던지고는 열중하던 인터넷 맞고로 시선을 돌렸다. 철창 안쪽으로 한니발 렉터나 조커 같은 범죄자들이 득시글댈 것만 같아 하루 종일 쫄아있었던 게 민망할 정도로 유치장은 고요했다. 새벽 3시가 좀 지났을까? 창밖으로 눈이 포슬포슬 내리는 게 보였다. 운치 있고 낭만적인 1월 1일 밤이다. 이런 건 부대에서 야근하면서가 아니라 연인과 어깨를 맞댄 채 알콩달콩대며 바라봐야 하는 건데…
“…치직! 지지직!!”
순간 무전기에서 날카로운 목소리의 음어들이 튀어나왔다. 송현동 관내 살인사건 발생, 피의자 1명 검거, 형사과장에게 바로 연락, 지방청 감식반 도착할 때까지 파출소 경력들은 현장 통제 철저, 당직실과 유치장 준비… 갑자기 터진 강력 사건에 종합상황실과 형사과는 물론 경찰서 전체가 숨 가쁘게 돌아갔다.
방패 들고 우루루 몰려가 데모나 막을 줄 알았지 할리우드 영화에나 나올 법한 살인 사건에 휘말린 건 처음이라 당황했다.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자 경사 아저씨는 심드렁하게 인터넷 맞고 창을 닫더니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며 말했다. “네가 할 건 별로 없어. 이따 신체검사, 소지품검사 같은 거 할 때만 좀 도와줘. 에휴, 오랜만에 조용한 당직 되려나 했는데 막판에 된통 큰 일 터지네. 자자! 손님 받을 준비 하자.”
살인범이 온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사람을 죽인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소름이 쭈뼛 돋을 만큼 무서운 한편으로 호기심도 잔뜩 부풀어 올랐다. 형사기동대의 이스타나 차량이 서정에 도착했고 얼핏 보면 조폭과 구분이 안될 만큼 험악하게 생긴 형사 아저씨들이 우루루 차에서 내리더니 부산하게 움직이며 소리쳤다. 걸걸한 목소리들이라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당직 검사 연락 …그럼 수사 지휘를 먼저 …이건 긴급체포라 서류가 달라요 …근데 좀 재워야 하지 않나 …과장님은 뭐래 …그래도 아직 애잖아요 …담임 휴대폰 번호 왔네 …그럼 조서는 내일 …아뇨 기자들은 아직…”
이내 덩치가 산만한 형사 둘이 범인을 질질 끌고 유치장으로 들어왔다. 씨름 선수 같은 아저씨들 사이에 낀 왜소한 체구의 살인자를 힐끗 훔쳐봤다. 어? 뭐, 뭐야 이게?! 살인자는 인천 J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중학교 때 친구들이 많이 간 학교라 너무나도 익숙한 복장이다. 매년 서울대도 많이 보내는 똘똘하고 공부 잘하는 인문계 명문인데… 그런 학교 아이가 어째서?! 자세히 보니 얼굴은 곱상했지만 눈동자가 묘했다. 이런 눈동자는 처음 봤다.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도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초점은 아예 없었고 비틀거리느라 걸음도 제대로 못 걸어 형사들이 양쪽에서 들어 옮기다시피 했다.
얼핏 보면 동네 무서운 삼촌들에게 삥 뜯기는 불쌍한 아이처럼 보였지만 양 손과 교복 마이에 잔뜩 묻어있는 검붉은 흔적들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피해자의 피다. 피는 학생의 몸과 옷 여기저기 잔뜩 튀어있었다. 그래 이 친구는 명백한 살인범이다. 용의자도 아니고 현행범. 도대체 새해 벽두부터 무슨 일을 벌인 거니 너는. 형사들과 경사 아저씨가 유치장 입감 수속을 진행하는 동안 신체검사와 위해물품을 체크했다. 주의사항이나 화장실 이용법 등을 안내해줬지만 아이의 머릿속에 전혀 입력이 안 되는 느낌이었다. 얘는 지금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상태구나.
순간, 유치장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우리 아들은 아무 잘못 없다 이놈들아! 차라리 나를 잡아가라. 웬수같은 남편 때문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고! 아이고 우리 아들, 아이고 우리 아가!!” 형사들은 아주머니를 진정시키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울며불며 아들의 이름을 외쳤다. 뒷목 잡고 쓰러지는 게 아닐지 걱정될 정도로 아주머니의 숨은 꺽꺽 차올랐다. 뜯어말리는 형사들과 통곡하는 어머니가 드잡이를 벌이는 난장판 속에서도 정말 아무것도 안 들리는지 학생은 유치장 가장 안쪽, 외진 곳에 주저앉아 멍하니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본격적인 조사는 날이 밝는 대로 시작되겠지만 너무도 궁금한 나머지 ‘112신고상황 처리내역서’를 통해 대강의 스토리를 파악했다. 학교 야자를 마치고 밤 11시경 귀가한 J고교 2년생 A군, 집 거실 바닥에는 휘발유가 뿌려져 있고 술에 만취한 부친이 모친의 머리채를 붙잡고 얼굴을 폭행 중인 장면을 목격, 말리려는 아들 A군에게도 폭언을 휘두르며 주방 칼로 위협, 칼을 빼앗기 위해 옥신각신하던 중 격분한 피의자 A군이 피해자의 하복부와 흉부에 십여 차례 자상을 입혀 과다출혈로 사망케 함. 모친이 곧바로 119 신고… 이웃집의 증언에 의하면 평소에도 빈번한 폭력 행사… 밤마다 깨지는 소리가 났다 진술…
보고서 속 활자를 읽을수록 가슴속이 무거워졌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 이 아이도 그동안은 꾹꾹 참고 잘 견뎌 왔겠지. 그런데 오늘만큼은 유달리 참기 힘들었나 보다. 12월 31일이라 다른 때보다 마음이 더 허했던 걸까? 엄마의 비명, 비릿한 휘발유 냄새, 깨지는 그릇 소리. 펑펑 내리는 눈 속에서 자기 신세가 견딜 수 없이 처량하게 느껴졌을까? 한없이 따뜻하고 휴식 같아야 할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너에게는 지옥 그 자체였나 보구나.
남 같지 않아 한참을 지켜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아있다. 미세하게 오른손을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람을 죽인 손. 오늘 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냥 이 모든 게 나쁜 꿈이었으면 좋겠지.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났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싹 다 정리되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절대 그럴 수는 없단다. 지랄 같지만 이게 현실인 걸.
슬쩍 사무실 바깥을 보니 당직 경사 아저씨는 친한 형사들과 캔커피에 담배를 나누며 검거 과정과 자초지종을 듣고 있었다. 시간깨나 걸릴 듯 보여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다음 철창으로 몸을 향했다. 유치장 근무자가 유치인에게 사적인 말을 거는 건 절대 엄금이고 큰 징계까지 받을 수 있다는 신신당부는 충분히 들은 상태였다. “저기 학생, 제 얘기 들려요?”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 보았지만 반응이 없다. 왜 그랬는지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냥 어떤 말이든 몇 마디 건네고 싶었다. 정말 아무 거나. 시답지 않은 얘기라도.
“음… 나는 학생보다 4살 많은 형이에요. J고 학생 맞지요? 저 거기 축구하러 많이 갔었어요. 축제 때도 가봤고요. 아, 나는 오거리 옆에 있는 I고등학교 나왔거든요. 어떻게 좀… 괜찮아요? 음… 괜찮지는 않겠구나. 그냥 이런저런 얘기를 좀 해주고 싶었어요. 학생은 이제 내일부터 아주 힘든 길을 걷게 될 거예요. 경찰 조사, 검찰 조사, 변호인 접견, 재판, 항소… 뭐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다 받아야 되거든요. 엄청 피곤할 거예요. 거기다 어쩌면 신문 같은데 학생 얘기가 기사로 날 수도 있어요. 별로 안 좋은 내용일 테니까 그런 건 읽지 말고 무시해요 그냥.”
얘기를 듣기는 하는 건지 여전히 무표정이다. 눈은 뜨고 있는데 얼굴이 죽어있다. 도저히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안색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가도 그냥 몇 마디 더 보탰다.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이거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할 거예요. 나쁜 짓 했다고. 틀린 말은 아니죠. 그런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욕하고 돌 던지는 와중에 친구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도 있긴 있을 거예요 분명히. 저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한 명이고요. 그래서 이렇게 와서 얘기하고 있잖아요… 조사든 재판이든 다 씩씩하게 잘 받아내요. 평소 집에서 있었던 일, 당했던 거, 맞았던 거, 하고 싶은 말도 남김없이 다 하고. 그 후에 혹시 벌을 받게 되면? 당당하게 받아요. 그거 다 받고 나와도 학생은 20대 청춘이에요. 뭐든지 해낼 수 있어요. 응원할게요. 이제부터 마음 단단히 먹어요. 힘내요.”
“나의 소원은 평범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포스터에 적힌 문구처럼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 중학생 스미다. 하지만 세상은 소년이 평범하게 살도록 가만 두지 않는다. 어머니는 스미다를 두고 바람피우러 도망가고 아버지는 가끔씩 찾아와 돈 내놓으라 주먹질이나 해댄다. 학교나 담임은 방황하는 스미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 와중에 터져버린 동일본대지진이라는 감당 못할 재난에 삶의 터전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거나 죽음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다.
가족도 사회도 자연도 등을 돌렸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지옥 같은 이 세상에서 내가 더 살아야 될 이유가 있나? 왜 살아야 하지? 무엇 때문에? 계속 살다 보면 뭐가 좋아지긴 해? 전혀 안 그럴 것 같은데?’ 남에게 피해주지도 않고 남에게서 피해받지도 않으며 두더지처럼 조용조용 땅 속을 기어 다니는 평범한 삶을 추구했지만 누구보다도 평범하지 않은 삶의 격랑 속으로 휘말려버린 중학생 스미다군의 기록. 대지진 이후를 살아가고 있는 일본의 청소년들에게 보내는 기성세대 소노 시온 감독의 부끄러운 인사말. 영화 <두더지>이다.
아버지: 솔직히 말해서 네가 없었으면 좋겠어. 널 원한 적이 없다구. 저 강에 빠졌을 때 죽길 바랐어. 보험금이라도 들어오니까. 근데 정말 끈질기구나. 진짜 죽고 싶으면 죽어! 괜찮으니까. 나도 그게 좋고 엄마도 좋아할 거야.
스미다: 생각해볼게.
아버지: 좋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니까 이제 좀 후련하네. 역시 참으면 병이 돼. 아무리 부모라도 무조건 참으면 안 된다니까.
우리 모두가 그렇듯 스미다 또한 자기가 원해서 태어난 건 아니다. 지들 멋대로 잉태하고 출산해서 세상으로 끄집어낸 창조주 두 사람, 아비와 어미는 그런 스미다에게 있어 숨 막히는 재난 그 자체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근처의 노숙자들보다도 못하고 길가의 풀벌레, 돌멩이, 공기보다도 무익하며 해롭기만 한 존재들. 칭찬이나 애정은커녕 폭력배들의 빚 독촉이나 아들에게 선사하는 금수만도 못한 부모이다.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춘기 소년 스미다지만 누구라도 인정할 만큼 최선을 다해 잘 참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참아야 할까? 내가 죽으면 끝인가? 부모가 죽으면 끝일까? 늦은 밤에 찾아와 아들 덕에 사망보험금이나 타자며 ‘너만 없으면 내가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거’라 이죽거리는 아비의 얼굴은 안타깝게도 너무나 진심이다. 마지막 한 가닥, 아슬아슬하게 이어져있는 끈마저 끊어진 스미다는 결국 아비를 돌로 쳐 죽인다. 아무리 그래도 살인은 안 된다? 천하의 패륜아? 부모의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가족 간의 문제이니 대화로 해결해보라? 개풀 뜯어먹는 소리들 하시네. 세상 사람 그 누가 이 소년을 비난할 수 있는가.
<두더지>에 등장하는 이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기괴하게 일그러져있다. 스미다는 물론이고 그런 스미다를 짝사랑하는 같은 반 여학생 차자와. 차자와의 부모. 사채업자. 칼을 가지고 다니는 평범한 학생. 사업이 부도난 사장. 동네 양아치. 방에 시체를 보관 중인 우익청년. 보트 타러 온 백수. 저마다 다양한 신경증을 앓고 있는 이들은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걸까.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어도 동일본대지진이라는 참화가 이들의 위태로운 마음속 불씨에 기름을 끼얹은 것만큼은 확실하다. 누군가들의 탐욕과 이익 때문에 만들어진 원전이라는 괴물로 인해 발생한 인재. 인간 스스로 일으킨 사고 때문에 인간들이 미쳐간다. 슬픈 자해다.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아야 할 청소년들은 무책임하게 방치되고 어른들은 광분한다. 철학의 부재. 생존의 우선. 무리 전체가 위협당하면 리더 수컷은 새끼 사자를 잡아먹는다. 동물의 왕국과 다를 바 없어진 약육강식의 일본. 사회 선생님의 희망찬 훈화 말씀은 공허하기 그지없다.
교사: 분발하고 힘내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일본인이다. 세상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고통을 일본은 경험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시 일어나려 하고 있어.
스미다: 모두가 그렇진 않습니다.
교사: 스미다! 인간은 말이야 아래만 보고 살아선 안 돼. 물론 너처럼 보트나 빌려주는 인간에게는 열심히 살겠다는 생각이 어려울지도 몰라. 그러나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특별하단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꽃들이라고. 모두가 특별해. 힘내라 스미다! 꿈을 갖는 거야!
스미다: 보트 가게 무시하지 마세요. 평범 최고!
충동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사람을 죽인 스미다는 이제 스스로 삶을 버리려 한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마지막으로 사회를 위해 좋은 일 해보겠다며 범죄자나 살인범 같은 인간쓰레기 몇 명쯤 죽이고 떠나고자 한다. 이리도 엉뚱하면서도 깜찍한 이타심이라니. 나는 인간쓰레기다. 그러니 나와 같은 인간쓰레기들 청소라도 좀 하고 떠나야겠다. 이렇게 해서라도 짧았던 삶에 약간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쇼핑봉투에 식도를 들고 다니는 스미다.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의 곁에는 다행히도 소녀 차자와가 있다.
세상 모두가 등을 돌린다 해도 나를 바라봐주는 단 한 사람. 좀 잘못해도 소리 높여 응원해주는 유일한 사람. 등을 때리고 울며불며 떼를 쓰다가도 결국 마지막에는 믿어주는 사람. 그렇게 단 한 사람이 내미는 손이 갖는 위력에 대해 <두더지>는 계속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자와: 자수해. 죗값을 치르고 나서 하고 싶은 걸 하자. 세상 사람들 생각하기 전에 우선은 스스로를 위해. 넌 스스로 정한 규칙에 얽매인 것뿐이야. 미래를 생각해. 세상을 다르게 봐야 해. 잘못한 일에 얽매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지. (…) 죽으려고 왔어? 절망해서 죽을 결심으로 돌아온 거 아냐? 그렇게 두진 않을 거야. 내가 지켜볼 테니. 네가 죽으면 슬퍼서 살아갈 수가 없을 거야 스미다. 어제 경찰 아저씨랑 상의했어. 살인과 시체유기에 대해서. 내일 자수하자. 미안… 내 맘대로 해서.
어둑어둑 푸르스름한 새벽녘의 호수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방황하는 청춘의 고뇌 그 자체인 스미다. 그런 소년의 곁에서 소녀는 함께 달려준다. 살아야 한다고. 힘내라고. 포기하지 말라며 악을 쓴다. 절대 죽지 말라는 그녀의 말에 스미다는 엉엉 운다. 울면서 달린다. 지진으로 모든 게 무너져 폐허가 된 마을 한복판으로 휘청휘청 달려 나간다.
기다리고 있는 게 아름다운 장밋빛 미래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달려보라고.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한 번 살아보라고. 꿈같은 거 없어도 괜찮고 평범해도 상관없으니까 조금만 더 기운 내보라고. 절망의 시대, 빛 한 줄기 닿지 않는 무저갱의 밑바닥에서 바득바득 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모든 두더지들에게 보내는 격려와 건투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