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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May 09. 2020

학연 지연 없이

법조 기자 세계에서 살아남기

 검찰청과 법원을 출입하며 기사 쓰는 사람을 법조기자라고 한다.

3호선 교대역 위에 서울중앙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을 지나 서울지방검찰청과 고등검찰청 앞

횡단보도를 건너면 2호선 서초역에 대검찰청과 대법원이 있다.     


10년 전 어느 날, 나는 법조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땐 검붉은 중앙지검 1층에 기자실이 있었고, 소위 말진 기자들(연차가 낮은 기자들)을 위한 창가 쪽 골방에서 생활을 했다. 어떤 출입처보다 기자 실장의 존재감이 두드러졌던 ‘용 실장’님이 계셨고, 매일 아침 7시면 용실장님이 신문 스크랩을 해서 기자들에게 나눠줬다.     

그때도 신문 스크랩 기능이 있었지만 용실장님이 만든 일명 ‘용 일보’에서 뽑는 1면 기사는 나름 검찰발 ‘단독’ 기사 중 사건의 중요도가 있거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기사들이 있었다.

용실장은 워낙 오래 기자실장을 하다 보니 나름의 안목으로 기사에 대한 가치판단을 했던 것 같다.     

1층 기자실 문을 열면 독서실 칸막이처럼 각 언론사별 기자석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중간엔 낡은 소파가 있었다. 기자실을 들어서자마자 우측엔 용실장님 자리와 말진용 골방이 있었고, 골방을 들어서는 쪽에 두툼한 사전이 있었다. 법조인 인명사전으로 불리는 법조인대관.     


성경 책보다 더 두껍고 무거운 법조인대관을 펼치면 판검사들의 이름과 사진, 출생지, 학력, 취미, 가족관계, 종교 등 모든 게 다 나와 있었다. 대부분 SKY 출신, 그중에서도 유독 서울대 법대가 많다 보니 기자들 중엔 서울대를 졸업했거나 혹은 법대를 나온 기자들이 많았다.      

서초동 기자실로 처음 출근하던 날 법조인대관 앞에서 마치 묵념이라도 하듯 한참을 멍 때렸던 기억이 난다. 러시아 유학파 출신이다 보니 그 두꺼운 책자를 아무리 뒤지고 뒤져도 ‘학연’ ‘지연’을 엮어서 넉살 좋게 “선배님~”하고 찾아갈 법조인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중앙지검 2층 식당에선 각 언론사별 법조팀이 회의를 한다. 현재 진행 중인 중요사건 또는 지금 검찰이 들여다보는 사건, 또는 국민의 관심도가 높은 중요 재판 등 사건의 흐름과 일정을 챙겨서 기자 1은 그날 누굴 만나 뭘 확인하고, 기자 2는 별건의 판결문을 챙겨서 단서가 될만한 것을 찾고, 기자 3은 오늘 차장검사 티 타임을 챙기고... 한 회사 기자들이 법조팀이란 이름으로 나와 지하철 2호선과 3호선 사이 각각 다른 건물 다른 기자실에 앉아 있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서로 공유하고, 마치 퍼즐 조각 맞추기를 하듯 그렇게 호흡을 맞췄다.     

법조팀에선 팀플레이가 중요하다. 공격수와 수비수가 호흡을 잘 맞춰야 성과가 난다. 매일 점심시간엔 선배들이 ‘팀 약속’을 잡아왔고, 학연 지연이 없었던 나는 매일 점심마다 선배들이 만든 밥자리에서 ‘우리말이지만 우리말 같지 않은,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넘어가는지 모르게 몇 달을 보냈다.     


마치 제2외국어를 배우듯 사전을 끼고(법조인대관) 법조인의 정보를 스크린 한 다음, 실용 회화 단계로 입문(조간 모니터 및 공소장 등을 토대로 취재수첩에 궁금한 내용을 적어서 티타임에 질문하기)을 했다. 당연히 언어 발달 속도는 더뎠다. 석 달이 지나니 조금씩 외국어가 들리는 것 같았다.     

호랑이 굴에서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는 옛 속담처럼, 언제까지 팀 선배들의 인맥에 기대 살 순 없었다. 어떻게 서초동에서 살아남지? 법조 기자 세계에서 살아남지?...선배가 취재한 기사에 숟가락 하나 얹어서 단독보도를 하는 것도 맘이 편치 않았다. 나도 밥값을 하고 싶었다.      


가만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 또 밤마다 취재원들을 만나 술을 마시며 일과 개인의 삶의 경계가 허물어져가는 상황에서 주말이면 곰이 겨울잠 자듯 이불과 한 몸이 되어 살고 있었는데,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갑자기 실낱같은 희망의 빛이 비쳤다.     

그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바로 등산.     


당시엔 법무부와 대검찰청에서 매달 셋째 주 토요일에 산악회 모임을 열었다. 검찰 간부들과 기자들이 셋째 토요일에 모인다고 해서 일명 엠쓰리(M3)로 불렸다.     

주말이면 잠이 고픈 선후배 동료들을 대신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M3에 손들고 가는 것.     

자진해서 산행을 하겠다고 하니 모두 반겼다. 법무부나 대검 대변인실에서 중요사건 부장들을 게스트로 섭외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가야 하는데, 난 다행히 산행을 즐겼으니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출입 초반엔 명함 들고 부장검사, 차장검사 방을 가면 방에 뻔히 있는 것을 아는 데도 “약속은 하고 왔나” “지금 안 계시다” “다음에 약속하고 오라”며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런데 M3에서 등산복 차림에 모자를 꾹 눌러쓰고 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다 보면 ‘경계’가 허물어졌다.      


“아, 그때 다녀가셨는데 일이 많아서 죄송했어요. 언제 오시면 차 한 잔 하시죠.”     


한 번은 검찰총장이 검찰 간부들과 한탄강에서 검찰가족행사를 한다고 기자들에게 연락이 왔다. 8월 검찰 인사를 앞두고 있었던 행사니까 7월 말 8월 초쯤이었던 것 같다.     

대검 대변인실에 철원 한탄강 행사에 참석하겠다고 했더니 대검 기자단 간사 선배가 연락이 왔다. 검찰 내부 행사인데 그래도 참석하겠냐는 거였다. 난 주말에 특별한 일정도 없었고, 미혼이라 돌봐야 할 가족도 없었다. 무조건 간다고 했더니 대검을 출입하는 선배들 6명 정도가 물(낙종) 먹을 까 봐 가겠다고 했다.      

행사 당일 버스를 타고 철원으로 갔고 한탄강에서 기자들은 검찰총장과 같은 보트를 탔다.


1 호배.


1호 배에서 검찰총장과 대검 간부(검사장급)들, 그리고 기자들이 함께 노를 저으며 다른 배와 경주를 하는데, 어느 한 지점에 모든 보트가 멈춰 섰고, 퀴즈를 못 맞추면 일어서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야 했다. 불행히도 딱 걸렸다. 노래를 한 곡 해야 하는데 음치는 아니어도 딱히 잘하는 노래는 없고, 그래서 짧은 러시아 노래를 불렀다. 멜로디가 친숙한 ‘카츄사’     


갑자기 1 호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러시아어 전공하셨나 봐요?”

유학을 했고, 기자가 된 지 5년쯤 됐고, 법조 출입은 처음이라고 했고, 학연 지연이 없어서 제대로 아는 취재원이 없다고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검찰총장께서 물었다.     

“러시아 검찰총장이 오면 통역을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속으로 나는 ‘설마, 올까?’ 싶었고, 흔쾌히 통역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정확히 석 달 후.


설마가 사람 잡았다. 유리 차이카(갈매기)라는 이름의 러시아 검찰총장이 한국을 방문했다.     

러시아 검찰총장 방문 전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났다. 며칠 병원에 입원했고, 행사 일정은 다가오는데 대검 국제협력단에서 양국 검찰총장이 만나면 어떤 대화가 오갈지 전혀 정보를 주지 않았다. 행사 며칠 전. 국제협력단 담당 검사에게 전화해 언성을 높였다.     

“일반 통역도 아니고, 전문용어 통역인데 자료를 하나도 안 주시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내가 지금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아니고 도움을 주겠다는 건데.. 이러시면 저는 일 못합니다.”     

사실 그 검사가 무슨 잘못이겠나. 1 호배에 타고 약속을 했던 내 잘못이지.     

행사 당일까지도 말씀자료 조차 받지 못하고 회의실에 들어갔다. 진땀을 흘리며 통역을 했고.

모르는 전문용어들은 러시아 쪽 통역의 도움을 받았다. 공식 회담이 끝나고 담당 검사가 내게 왔다,      

“사실 총장님께서 즉석으로 말씀하신대서 저희도 받은 자료가 없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고생하셨고요. 오늘 통역은 저녁 일정 마칠 때까진 도와주셔야 합니다.”     


     (2010년 11월 10일 연합뉴스 보도 사진. 김준규 검찰총장 우측 필자)


그날 들은 정보는 ‘오프’를 전제로 들었고, 약속은 지켰다.


기사 한 줄, 취재 후기한 줄 쓰지 않았다.(물론 당시 법조팀과 회사의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날 이후 검찰총장이 간부회의에서 ‘도전 정신’을 언급하며 내 이야기를 두 차례 언급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 러시아로 유학 가서...”     

갑자기 먼저 만나자고 연락 오는 사람들, 밥 먹자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출입 첫날 법조인 대관 앞에서 “학연 지연 없는 사람은 여기를 출입하면 안 되겠다”며 좌절했던 기자가, 학연 지연을 넘어 인연을 만들게 됐다. 그렇게 서초동 기자생활은 이어졌고, 법조기자로서 전문성이 부족한데도 타사 법조팀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이직을 하게 됐다.     

그 시절엔 종합일간지와 지상파 3사가 전부였다. 종편이나 인터넷 매체도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다.     

법조팀 내에서 정확히 두 번의 이직이 있었고. 그렇게 MBC와의 인연도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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