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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May 01. 2020

이천 참사, 12년 전 화재와 '판박이'

12년 전 현장에서  만났던  '의인'을 추억하며...

이천 물류창고 화재 소식과 속보를 접하면서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12년 전, 이천 냉동물류창고 화재 현장을 취재했던 기억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2008년 1월 7일 경기도 이천의 한 냉동물류창고에서 불이 났다.

나는 사고 발생 다음날쯤 취재 팀에 합류했던 것 같다. 각 언론사들이 전사적으로 팀을 꾸리고

공격적으로 취재를 하는데, 역시나 현장에 갔더니 낯익은 기자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시꺼멓게 불에 탄 냉동창고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무너져 내려있었고

폴리스라인 안쪽으로 어떤 기자가 들어갔다가 제지를 당했다며 경찰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자들은 현장에 남아있는 유독가스에 그대로 노출됐던 것 같다. 기본적인 마스크 착용도 안 했으니.. 기자의 몸 건강보다는 현장에 남아있을 '단서'를 하나라도 더 찾는 데 촉각 곤두세워져 있었다.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수사본부나 취재본부가 꾸려진 곳엔 언론사별 기자들이 수두룩했고

무엇부터 어떻게 취재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지역 주재기자 선배가 밥은 먹고 일해야 한다며 사고 현장과

가까운 쌀밥집을 데려갔고, 그곳에서 경기도 관계자를 만나서 인사를 했던 것 같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정신이 없었는데. 얼마 후 명단을 확보했다. 생존자 명단.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있었다.

사고 현장엔 대부분 일용직 노동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 사고 당시 상황을 전해 듣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생존자들도 대부분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고 있어서 휴대전화 신호음만 울리고

음성 메시지로 넘어가는 번호가 대부분이었다. 명단에 이름을 쭉 훑어봤더니 낯익은 나라 이름이 보였다.

'카이룰루' 비고란엔 '우즈베키스탄'이라고 또렷하게 쓰여있었다.


전화를 걸며 주문을 외웠다. '제발 받아라. 받아라..제발..'

수화기 너머로 러시아어가 들렸다 .

"알로."


마치 어둠 속을 밝히는 빛줄기가 내 마음을 비추는 것 같았다.


병원 치료를 마친 상태였고,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고 했다. 정확한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고, 회사에 보고한 뒤 카이룰루 씨를 만나러 갔다. 굉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으면서 삽시간에 불바다가 됐던 화재 현장에서 그는

본인만 살아남고 사촌 형을 구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카이룰루 씨는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 한국인 아주머니를 구한 '의인'이었다.


구 소련에서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이나 중앙아시아지역 사람들은 인구의 60% 이상 러시아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한다. 카이룰루 씨 역시 러시아어가 편했던 사람이었고, 이천의 어느 작은 카페에서 만난 생존자와 기자는

마치 고향사람을 만난 것처럼 편하게 당시 상황을 전하고, 전달받았다.

회사에 보고를 했고, 카이룰루 씨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여러 언론사 기자들의 전화가 빗발쳤지만

카이룰루 씨는 통화가 곤란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아마도 자기 앞에 앉아서 이야길 듣고 있는 기자에 대한

배려였던 것 같다.


화재는 예견된 참사였다. 평소에 안전불감증이 걸린 사람들처럼 안전에 대한 의식들도 부족했고. 공사 현장

건물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다. 정확한 사고 원인, 사고 지점은 그도 나도 몰랐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인재(人災)였다는 것.


[참고 : 당시 인터뷰 기사]

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0801081856311#c2b 



취재 경쟁이 붙는 현장에선 목격자나 증인, 생존자 등 중요한 취재원과 인터뷰 한 뒤엔  소위 '단독 보도'가 나가기 전까지 '보안'을 지켜달라며 단도리를 한다. 당시엔 지금보다 매체 수도 적었고, 방송 3사와 종합일간지가 전부였는데도 그랬다.  자사 이기주의, 혹은 기자의 '단독 보도' 욕심이라고 욕먹을 만한 대목이. 매체가 늘어난 지금도 사고 현장에서 기자들의 '단독 경쟁'은 피를 말린다. 문건 하나, 목격자 한 명, 사진이나 영상 등 증거가 될만한 그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기자들은 애를 쓴다.


카이룰루 씨와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기자 선배와 연락을 했다. 지면에 실을 사진을 찍고, 나는 인터뷰한 곳에서 기사를 송고했다. 그는 사촌 형과, 자신의 거취 문제 등으로 불안해했고 나는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이천시와 경기도 관계자 등에게 문의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오후 6시가 넘어서 인터넷에 '카이 룰루' 관련

단독 기사가 올라왔다. 카이룰루 씨가 전화를 안 받으니 나에게 그의 위치를 물어보는 기자도 있었다. 당시 나는

경향신문 3년 차 기자였고,  단독 인터뷰는 표절이 불가하기 때문에 회사에서 인터넷 판에 기사를 먼저 올렸는데. 다음날 아침 중앙일보 지면에 똑같은 기사가, 사진만 '경향신문 제공'으로 해서 나갔다. 카이룰루 씨에게

전화해서 물어봤더니, 해당 기자와 통화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몇 분 후 미디어오늘 측에서 기사 표절시비 논란이 있다며 사실관계를 확인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참고 : 당시 미디어 오늘 기사]

https://n.news.naver.com/article/006/0000025897


당시 이천 냉동창고 화재를 취재하면서 오열하는 유족들과 우왕좌왕하던 수사대책본부 측 사람들 모습이 떠오른다. 업체 측 대표가 시민회관 강당에서 죄송하다며 무릎을 꿇자 유족들 고성이 터져 나오던 것도.


이천 냉동창고는 현장점검 없이 '소방필증'을 받았었고, 대형 화재가 나기 전에도 작은 화재 신고가 있었지만 크게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다. 그렇게 예견된 인재가 발생하자 누구도 책임지려 하는 사람이 없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인터뷰하는 내내 나는 참 부끄러웠다.

우즈베키스탄에선 '대우'를 국민 브랜드로 생각할 정도로 대한민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은데, 그런 나라의 실상은 일용직 노동자의 눈에도 참 허술했던 것 같다. 안전점검도 소홀히 하고, 비용 문제로 일용직 노동자를 계속 바꿔가며 쓰고..



얼마 후 '의인 이수현 재단'에서 연락이 왔다.

2001년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숨진 고 이수현씨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의인이수현재단설립위원회' 에서 카이 룰루 씨와 의인을 발굴한 기자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싶다했다.


기자 생활 3년 만에 처음으로 받은 상은 '특종상 '도  '이달의 기자상' 도 아닌 의인 발굴 '감사패'였다.

그 '감사패'의 무게는 컸다. 앞으로 내가 기자생활을 하면서 '어떤 기자로 살아가야 하나' 고민하게 해준

고마운 상이기도 했다.


[참고 : 당시 미디어오늘 기사]

https://n.news.naver.com/article/006/0000026459


 


12년이 지난 지금.

비슷한 사고를 뉴스로 접하면서 비록 나는 해당 취재부서에 있는 것도, 취재 현장에 있는 것도 아니지만

사고 발생 경위와 수습 과정 등이 그때 그 현장과 취재에 대한 기억이 필름처럼 떠오른다.


카이룰루 씨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만약 카이룰루 씨가 뉴스로 이 사고 소식을 접한다면 어떤 심경일까.


시간은 흘러 지금 나는 그때 카이룰루 씨보다 더 많은 나이를 먹게 됐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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