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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Jul 20. 2020

“호랑이를 그리면 고양이라도 나와”

마흔 ,  또 다른 도전


#나의 첫 직장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졸업하기 전 취직이 됐다.

LG 상사 모스크바 지사에서 나인 투 식스의 단조로운 삶이 나와 그리 맞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나의 첫 직장생활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면, 당시 법인장을 모시고 러시아 산업부 차관급 인사의 다차(별장)에 초대받아 다녀왔던 일이다. 러시아 고위 관료들의 삶은 어떠한지, 비즈니스로 만난 인간관계가 삶으로 연결되어 소중한 인연으로 맺어지는 순간들은 어떠한지 지켜보면서 우리나라 기업인들이 사업 확장을 위해 현지에서 얼마나 고군분투하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LG상사 법인장님에겐 딸이 하나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았고,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회계사 시험에 합격해 잠시 휴학을 하고 모스크바에 어학연수를 왔다. 영어는 자유롭게 구사하지만 러시아어는 어려워서 외출조차 쉽지 않은 법인장님 딸이 어느 날 주말에 같이 뮤지컬을 보자고 제안을 했다. 사실 러시아 직원들은 일과 생활의 경계가 명확했다. 그들은 금요일 오후 6시 '땡' 치면 칼 퇴근을 하고 월요일 오전 9시까지 전화를 꺼놓는다. 듀얼폰이라고 해서 유심 칩 2개를 꽂고, 업무 전화는 업무시간에만 받고,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개인번호는 회사에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어디 그런가. 직장 상사의 딸이 제안하는 것을 쉽게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시카고', '42번가'의 거리 등 미국에서 직접 원정공연을 온 팀들의 공연을 보면서 어느새 나도 뮤지컬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 호랑이를 그리면...


직장생활 6개월 만에 뜻한 바가 있어 퇴사를 했다. 그래도 법인장님 딸과는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다. 더 이상 상사의 딸이나 아버지 회사의 직원 관계가 아니었기에, 어느 시점엔가 자연스럽게 호칭도 정리됐다.

Y 언니는 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복학을 했다. 나도 기자 시험 준비를 목표로 한국에 잠깐 나와서 필요한 책들을 하나 둘 모으고 있었는데, 하루는 Y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이대 캠퍼스 혹시 와 본 적 있니? 네가 모스크바에서 너네 학교 캠퍼스를 보여줬잖아. 나도 우리 학교를 한번 보여주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면 지하철 2호선 이대역에서 만나자.”


이대 역을 나와 캠퍼스로 가는 길은 비좁았고, 많은 인파를 속을 뚫고 가느라 어디가 어디인지 정신이 없었다.  

Y 언니는 캠퍼스 곳곳을 소개하며 언니 어머니께서 학교를 다니셨을 때는 건물은 어떠했고, 지금은 어느 용도로 쓰고 있고.. 차분히 설명을 해줬다. 마치 외국인에게 한국 대학 캠퍼스 투어를 시켜주는 가이드처럼 친절하게 안내했다.

 

Y 언니는 채플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우리 엄마도 학교 다닐 때 여기서 예배 보셨대. 근데 거의 여기서 예배 보는 날이 거의 없어. 현주야, 너는 한국에서 기자 시험 준비할 거라고 했지? 러시아 전문기자? 특파원이 되고 싶다고? 그래. 꿈은 크게 가져야 해. 호랑이를 그리면 고양이라도 나온다잖아.  너의 꿈을 응원할게.”


호랑이를 그리면 고양이라도 나온다...

Y 언니의 말이 한동안 내 귓가에 맴돌았다.


그래. 그거다! 전문기자가 될 수 있을지, 러시아 특파원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왕 마음먹은 거 끝까지 도전해보자. 언니의 응원의 한 마디에 큰 용기를 얻었다.



# 17년 후


지난 18일(토) 이대 캠퍼스를 다시 찾았다.

언니와 함께 걸었던 그 캠퍼스는 너무 많이 달라져서 어디가 어디인지 잘 구분은 안됐지만 ‘호랑이를 그리면 고양이라도 나온다’는 언니의 목소리는 아직도 그곳에서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쉬는 날, 이대를 찾은 이유는 나이 마흔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서다.

이대 '저널리즘스쿨'에서 언론인, 기자, PD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매주 1회 3시간씩 강의를 하게 됐다. 법조기자(검찰 출입)를 하면서 강의를 나간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기회가 왔을 때 새로운 도전을 해보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진로를 바꾸는 것은 절대 아님. 기자를 '천직'으로 여기고 살고 있음.)


일단 가족들이 이 소식을 반겼다. 남편도 돕겠다 했다. 우리 딸은 유치원에서 엄마 직업이 “경찰이기도 하고 검찰이기도 해요”라고 말하는데(경찰 출입을 하다가 검찰 출입을 하다가 계속 바뀐다는 뜻..), 이젠 “학교 선생님이기도 해요”라고 말할 수 있다며 좋아했다.


회사에 사전 승인을 받고, 힘들게 결단을 내린 작은 도전.

17년 전의 나처럼 막연히 기자를 꿈꾸는 친구들에게,  그 친구들이 '호랑이를 그려서 고양이'라도 만날 수 있도록 작은 보이 되고 싶다.


첫날 강의 직전, 미국에서 유학 중인 장미란 선수에게 연락을 했다. 미란이가 박사 학위를 받고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미국으로 갔을 때, “장 교수님~”부르며 우리 미란이를 응원했던 생각이 나서다.


“미란아, 언니 오늘부터 이대에 강의하게 됐어.”


“언니한테는 도전이 참 잘 어울려요. 진심 멋져요!”


장미란 선수는 40대 아줌마의 용감한 도전을 응원해줬다.

 

일요일인 어제(19일)는 국제부 야근 당직을 서고(밤새고) 아침에 퇴근했다. 평일엔 서초동 검찰청에서 바쁘게 하루를 살고, 토요일엔 짬 내서 학생들을 만나고. 모든 게 쉽지 않겠지만, 어디든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시간을 아끼고, 세월을 아끼며 뚜벅뚜벅 걸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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