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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Feb 21. 2020

"당신이 살던 나라로 가세요"

연어의 마음

갈매기의 꿈.

어린 시절 갈매기의 꿈을 읽으면서 유학을 꿈꿨다.

멀리 많은 것을 보기 위해 높이 나는 주인공 갈매기처럼, 나도 인간으로 태어나 좀 더 넓고 많은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딸은 위험해서 유학을 보낼 수 없다"는 아버지를 설득하는데 걸린 시간은 3년. 아빠가

퇴근하기 전까지 내 방 불은 거의 항상 켜있었다. 스스로 공부하고 책임감 있는 자세로 생활하는 모습을 통해  아빠에게 믿음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날. 바이올린을 들고 동토의 땅 러시아로 향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성가대 봉사를 오래 했다. 악기는 내 삶의 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막상 전공을 하려고 보니 시창청음과 화성학을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배운 러시아 아이들과 경쟁하기란 쉽지 않았다.


우리나라 초, 중, 고 과정을 러시아에선 한 학교(슈콜라)에서 배우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강의 실을 옮겨 다닐 때마다 모르는 친구들에게 웃으며 "쁘리벳(안녕)"하며 인사했더니, 몇 달 뒤 한 친구가 오더니 "한나, 네 별명 알아? 쁘리벳이야. 쁘리벳".


러시아에서 내가 쓰던 이름은 안나, 한나다. 학교에선 성경에서 따온 이름을 썼다. 물론 친구들끼리 부를 때만..

그런데 '쁘리벳'이 되고 나니 친구들이 편지도 주고, 집에 초대도 해주고..마치 태어나서 한글을 처음 익히는

아이처럼 평일엔 공부한 것을 주말마다 생각나는 대로 편지를 썼다. 아이들의 답장에선 내가 문법적으로 틀린 말들을 바로 잡아주는 표현도 들어있었고, 그렇게 또 배워갔다. 주말에는 평일에 외운 단어를 수첩에 들고 시장에 가서 물건 값을 흥정하고, 반을 깎으면서 언어를 내 것으로 만드는 훈련(?)을 했다. 일요일엔 교회에 가서 설교 말씀을 듣고, 그 날은 다른 공부 안 하고 러시아어 성경 필사를 했다.


1년이 지나니 라디오가 들리고 3년이 지나니 극장 더빙판이 들리고 5년이 지나니 러시아어가 너무 편해

내가 마치 '고려인' 같았다. 그렇게 8년이 넘는 시간을 유학을 하는 동안 내 꿈은 계속 바뀌었다.


바이올린 연주가에서 무역업, 통역사, 외교관, 그리고...기자.


대학에 진학할 때 문학, 철학, 국제 정치학, 노영과..고민을 많이하다 언론학부에 들어갔다. 그 나라 역사뿐 아니라 근현대사와 시사적인 상식까지 다 배울 수 있는 학부가 언론학부뿐이었기 때문에 대학 4년을 마치기 전에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찾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진학했다. '나는 한국과 러시아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될거야.' '두 나라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면 좋겠다'.. 어린 마음에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중앙일보와 MBC 통신원을 하게 되면서 중앙일보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고, MBC 라디오에 전화 연결을 하면서 러시아 소식들을 전해주면서 깨달았다. 러시아는 유럽인데, 많이 변하고 성장했는데 사람들 기억엔 여전히 빵 사려고 줄 서있는 나라였다.


"비즈니스를 아무리 잘하고, 외교 관계가 아무리 개선되어도 언론 보도 한 줄이면 모든 게 올 스톱될 수 있구나.

내 꿈이 무엇이 됐든 특파원의 기사 한 줄에 한러 관계가 앞으로 나갈 수도 있고 멈출 수도 있다. 그럼 나는 러시아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제대로 알고 기사를 쓰는 러시아 전문 기자가 돼야 겠다. 그래! 기자. 기자다."


그렇게 유학을 마치고 연어의 회귀본능이 작용해 8-9년 만에 우리나라로 역유학을 왔다.

고대 안암동에 꾸려진 스터디 모임에 지원서를 내고 처음 글쓰기에 참석한 날. 고대 국문과 학생이 내 논술과 작문 글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논술과 작문의 기본적인 개념도 없으시네요. 당신이 살던 나라로 가세요. 안 그래도 우리나라 취업률 안좋고, 힘든데 당신은 이 길 아니어도 길이 많잖아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대학 졸업 후 무역 쪽에 관심을 갖고 LG상사에도 입사해 반년 정도 직장생활을 했었고, 유학 생활 내내 통번역 관련 아르바이트도 했다. 러시아어로 돈 벌 수 있는 길은 있지만, 모든 걸 다 버리고 꿈 하나만 갖고 처음부터 시작했고, 소위 언론고시라고 하는 시험에 붙을 동안은 그 어떤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고 공부만 하겠다고 마음먹고 이제 막 시작을 하는 사람에게..."당. 신. 이. 살. 던. 나. 라. 로. 가. 세. 요."......


스터디 분위기는 싸해졌고. 나도 많이 당황스러웠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지만, 국문과 학생에게 말했다.


"좋은 말씀 감사한데요. 제가 이제 막 공부를 시작했어요. 저도 생각하는 마지노선이 있습니다. 그 안에 결과가 없으면 님께서 님 말씀대로 하는 게 맞을 수도 있지만.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님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네요."


그리고 그 스터디를 나왔다. 다른 스터디를 구했고. 심지어 어떤 스터디는 내가 만들었다.


청년 백수로 청바지 하나에 흰 티셔츠 하나로  버티며  공부를 했더니.

하루는  같은 스터디원인 고대 신방과 학생이 학생증을 줬다. "나는 과외도 있고, 중도 이용할 시간이 많지 않아. 새벽같이 나와서 자리 맡고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느라 고생하지 말고, 내 걸로 책도 빌려보고 중도에서 편하게 공부해."


그렇게 만 2년을 꼬박 공부만 했다.

신문을 읽고, 좋은 글은 옮겨 적고, 스터디 모임 때 시사 상식 문제를 풀고, 일주일에 두 번은 어학원에서 토익 공부를 하고..시험에 계속 떨어지니 자신감도 떨어졌다. 그렇게 좋아하는 술도 끊고, 사람도 끊고, 공부만 했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있는데, 굳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욕심부린 것은 아닌가."


"그래. 딱 2년 반만 채우고 그때도 안되면 미련 없이 접자."


그렇게 마음먹고, 스스로를 위로했는데, 몇 주 뒤 바로 '합격'


2년 만에 합격.  언론사 지망생들이 많이 가입하는 다음에 '아랑의......' 카페에 "2년 차 백수가 기자 되기까지"라는 제목으로 합격 후기를 올렸더니 조회수, 댓글이 폭발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살던 나라가 아닌, 내 나라에서 '기자'라는 이름으로  15년째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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