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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Mar 07. 2020

악덕 PD

기자가 악덕 PD 되다.

지난해 6월 말쯤.

서초동 검찰청을 20개월 넘게 출입하다가 생방송 아침 뉴스 ' 뉴스 투데이' PD로 인사 발령이 났다.

보통 뉴스데스크나, 뉴스투데이 등 뉴스 고유의 영역은 기자들이 PD가 되어 뉴스 진행을 한다.

시청자들은 화면을 통해 앵커를 만나고, 리포트로 기자들을 접하지만 뉴스 PD는 카메라 라인과

연결된 뉴스센터에서 수많은 모니터를 보면서, 라이브로 화면 하나하나 콜 사인을 하는 역할이다.


뉴스 진행 PD가 되고 처음에 가장 힘들었던 게

주요 뉴스 헤드라인 뽑는 거였다.

15초 , 두 문장 분량으로

주요 뉴스 4개 후보군을 정해야 하는데 

밤사이 새 기사 중 어떤 뉴스가 가장 중요할지

판단해 야근자(국제부, 사회부, 해외 특파원 등)들이 만들어준 리포트의 순서를 배치한다.


매일 새벽 6시. 정확하게 M.K.S 방송 3사 헤드라인이 동시에 돌아가면, 전 국민 앞에서 시험 성적표를 받아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기사의 가치를 보고 판단하는 기준은 다를 수 있다. 나의 판단이 옳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다고 타사에선 뭘

주요 뉴스로 가는지 물어볼 수도 없지 않나.

 그런데 신기한 건 뉴스 타이틀이 돌면

 방송 3사 헤드라인이 거의 순서도, 굵은 제목의 복대 자막도 비슷하게 나간다. 역시, 기자들의 생각은 일정 범위를 벗어나진 않나 보다.



오늘 새벽 1시 30분쯤.

보도국 뉴스룸에 전화벨이 울렸다.


기자    "대구 박**인데요. 도심의 한 아파트 두 동이 코호트 격리가 됐어요."

PD ㅡ "국내 첫 사례 아닌가요? 그런데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기자   "정부에서 발송한 문자도 확인했고요. 내부 인터뷰도 마쳤어요. 근거 자료 다 커버됐습니다."

PD ㅡ "그럼 기사 먼저 보내주세요.

주요 뉴스로 뽑아서 준비하겠습니다."


뉴스를 만드는 PD는 평균 23개의 리포트(기자들이 쓴 기사)를 다시 봐야 한다.

전날 저녁 메인뉴스에서 방송된 기사와 시제가 바뀌어 반영됐는지, 밤 사이 업데이트될 사안은 없는지, 앵커 멘트 내용과 분량은 적절한지 등..


1시간 45분짜리 뉴스를 준비해야 하다 보니 코너(이 시각 세계, 아침신문보기, 연예 톡톡 등) 작가분들 원고도

봐야 하고, 방송 1,2,3부 중간 광고 때 우측 상단에 노출되는 짧은 상단 제목들도 뽑아야 하고 그렇게 준비하다 보면 새벽 3시쯤 배달된 조간신문들도 체크한다.


오늘 아침엔 우리 정부가 일본에 맞대응 한 조치(오는 9일부터 일본인 무비자 입국 중단 등)가 중요 뉴스인데

지역 MBC에서 발품 팔아 열심히 취재해준 박재형 기자님 덕분에 더 따끈따끈한 새 기사로 시청자를 만날 수 있었다.


새벽 5시 59분 36초. 뉴스센터에서 "타이틀 스타트"를 외치고.

59분 59초. 헤드라인 "스타트"를 외치며 주요 뉴스 4개가 끝나면 "카페라 투 스탠바이. 카메라 투! 앵커 줌인. 홀드"로 사인을 하면 앵커가 시청자들에게 첫 소식을 전한다.


PD가 센터에서 진행하며 하는 얘긴 앵커 인이어와 카메라 감독, 기술 감독 등 모든 스태프분들이 듣고 계시기 때문에 잡담이나 쓸데없는 얘기, 실수를 해선 안된다. 처음 라이브로 뉴스를 진행할 땐 많이 떨렸는데, 하면 할수록 재미있고. 내가 뉴스 진행 PD도 적성에 맞는구나 싶을 때가 있다.


신문기자 생활만 5년 넘게 했고, 법조(법원, 검찰)를 출입하다 MBC에 입사했는데. 이젠 신문기자로 일한 시간보다 방송기자로 보낸 세월이 두 배쯤 많아졌다. 신문기자 시절엔 바이라인이 몇 개가 달리는 날도 부지기수. 소위  에이스 기자들은 1 톱 3박(한 개 톱기사, 3개 박스 성 기사)도 척척 막아내는데 (*내 긴 아님)  방송은 기자 한 명이 리포트하면 그 사람 입이 묶였다고 해서 

다른 기자가 대독 하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밤 사이 야근자들도 사회부 기자들은 사건사고 종합을 하고, 국제부 기자들도 외신 뉴스 한 사람당 한 개씩 처리하는데 작년에 PD로 오고 나서 야근자 한 명에게 리포트 2~3개씩 주문해서 한 기자가 다른 내용으로 몇 개 리포트를 하는 상황이 벌어지다 보니 주말 앵커를 맡고 있는 선배가

 하루는 뉴스를 마치고 센터서 나오는데 나를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악덕 PD"


"네? 선배? 저요?"


"그래. 악덕 PD로 소문났어. 야근자들 많이 괴롭힌다며. 리포트도 몇 개씩 시키고."


"아.. 이게 모두 새 뉴스로 시청자들을 만나기 위해서, 또 우리 앵커님을 위해서 그런 겁니다."


그렇게 나는 '악덕 PD'가 됐다.



출입처를 나가면서 취재 기자를 할 땐 "내 기사가 오늘 왜 뉴스에서 빠진 거지?" 하며 속상해할 때가 있었다. 이것저것 취재한 것을 이것도 저것도 다 중요한 것 같아 이 얘기 저 얘기 다 다 붙일 때도 있었다. 그런데 PD가 되고 보니 15초짜리 헤드라인 두 문장을 고민하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부족한 기자였나 깨닫게 된다.


내가 보고, 내가 판단한 것이 전부가 아니고

더 중요한 가치, 중요한 기사들이 많은데

 나는 넓게 보는 안목이 없었다. 중요한 한 가지를 얘기하기 위해선, 다른 것은 과감하게 쳐내고 버릴 줄 아는 용기도 없었다. 제목은 편집부에서 알아서 달아주겠지 라며 대충 제목을 달아 기사를 보낼 때도 많았다.


그런데 취재 기자들의 기사를 읽고 제목을 달아야 하고, 순서를 배치해야 하고, 그 기사로 주요 뉴스를 뽑고, 뉴스를 진행하는 역할이 되다 보니. 기자에게 있어 중요한 덕목이 취재 , 기사 쓰기 외에도 얼마나 많은 게 필요로 하는지 깨달아가고 있다.


악덕 PD는 그렇게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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