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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Aug 01. 2020

검찰 고위급 인사를 앞두고..

영원한 것은 없다


<7말 8초 인사>

업무에 복귀한 지 한 달이 됐습니다.

1년 만에 같은 출입처로 돌아온 터라 주인이 바뀐 집에 사람도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검찰에서는 검찰총장이 일하는 대검찰청을 ‘큰집’이라고 부르고, 전국 검찰청 중 가장 규모가 큰 서울지방검찰청을 ‘작은집’이라고 부릅니다. 큰집과 작은집 사이에는 횡단보도가 있습니다. 그 횡단보도만 건너면 이 집도 저 집도 금세 도착하는데, 막상 작은집 주인이 큰집 주인이 되는 경우는 거의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일을 시작하자마자 사상 초유의 법무부 장관 수사지휘권 발동을 취재하면서 추미애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사이에 수사지휘와 수용 과정을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중앙지검 수사 사건과 7말 8초에 예정됐던 검찰 고위급 인사를 취재하면서 많은 생각이 듭니다.


<검찰 취재 기자>


10년 전, 5년 차 기자로 서초동에 처음 왔을 때 저는 당시 저는 큰집 취재를 했습니다. 물론 검찰총장과 차장, 그리고 각 부장(검사장급)님들을 취재하기 위해선 나름의 ‘공부’가 필요했었지요. (*검찰은 부장보다 차장이 더 높은 자리입니다. 말 그대로 넘버 투. )


검찰과 법원을 출입하는 기자들을 법조기자라고 부르는데, 각 사별로 같은 팀 안에도 검찰 출입과 법원 출입을 나눕니다. 당시 제가 일했던 팀에서는 저를 처음부터 ‘검찰 취재’로 분류했습니다. 스포츠에서 공격수를 ‘검찰’, 수비수를 ‘법원’으로 이해하시면 빠를 것 같습니다. 아무리 공격으로 득점 포인트가 높아도, 수비를 못해 구멍이 나면 대물을 먹기 때문에 업무의 경중을 따지기가 어렵겠지요,

당시 검찰총장은 김준규 총장, 대검 대변인은 조은석 전 고검장께서 하셨고 곧 한찬식 검사장께서 대변인직을 이어받았습니다.

저는 공격수였지만 기본적인 이 분야 지식이 전무했던 터라 법원을 석 달 정도 출입하면서 업무를 익혔습니다.  매일 판결문 마와리를 돌았습니다. 선고되는 사건 목록을 챙기고, 검찰이 어떤 방법으로 사건을 수사하고 재판에 넘기는지(*기소), 재판에서는 이 사건의 증거를 어떤 기준으로 분류하고 인정하는지, 검찰에서 ‘유죄’로 판단한 사건이 왜 법원에서는 ‘무죄’가 되는지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지검 1층 기자실 내 작은 골방(말진, 막내 기자실 방)에서 몇 달간 생활하면서 중앙지검 현안 사건들을 챙긴 뒤에, 드디어 횡단보도를 건너 큰집으로 입성했지요.

그때는 마치 초고속 승진을 해, 내가 검사장급에서 총장급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하며 어깨에 뽕이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의 의기양양함은 ‘우병우’라는 수사기획관을 만나고 난 뒤 깨졌습니다. 기자가 공부하지 않고 질문하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를 깨닫게 해 준 계기도 됐습니다. 지금은 대검 ‘선임연구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수사기획관 자리는 당시
대검 중수부 사건을 취재할 수 있는 일종의 수사 관련 언론 창구 역할을 담당했던 자리입니다.
중수부에서 진행 중인 사건을 중수부장이나 중수 1, 2 과장에게 직접 물어보기 전에 압수수색, 출금, 소환 등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일은 수사기획관을 통해서 확인을 했습니다.

나름 공격수로 분류돼 큰집으로 왔는데, 수사기획관 앞에만 가면 내가 작아지고, 만날 때마다 뭘 먼저 물어야 하나 입이 안 떨어졌습니다. 내가 손에 쥔 게 없으면서, 내가 발품 팔아 확인한 게 없으면서 확인하러 올라갔다가는 정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한소리 듣게 됐으니까요.



<7층 사람들>

큰집 8층엔 안방(검찰총장실)과 작은방(차장실)이 있고, 7층엔 부장들(검사장급) 방이 있습니다. 큰집에 있는 형사부장님의 경우, 전국 검찰청에서 올려 보낸 경찰-> 검찰 수사 사건을 보고받고 지휘하는 자리입니다. 반부패 부장님은 전국 청의 특수사건을 보고받고 지휘하는 자리고요. 기조부장님은 검찰총장의 ‘브레인’ 같은 역할을 하는 분들입니다.

큰집 7층 방문은 언제나 열려있었습니다. 검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검사의 장이 된 분들인데, 어떤 사안이든 그 사안을 바라보고 꿰뚫는 눈이 남달랐고, 위기 때마다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런데 1년 만에 다시 돌아오니 큰집은 작은집의 갈등, 또 큰집과 법무부의 갈등 때문에 7층에도 굳게 닫힌 방이 제법 많았습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15년 차, 40대 아줌마가 현장에서 취재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감사하고. 오늘이 현장 취재에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출근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두 집 사이에 걸린 큰집과 작은집을 비판하는 현수막을 보면 큰 글씨에 숨이 ‘헉’ 막히고, 글에 살기가 느껴져 등골이 오싹할 때가 있습니다.

큰집과 작은집을 왔다 갔다 하다 보면 하루 평균 만보는 걷습니다. 법원에 계신 친한 선배께서
기왕에 만보를 걸으면 100원이 적립되는 앱을 쓰라고 알려주셔서, 그 앱 덕분에 한 달 반에 한 번씩 공짜로 스벅 커피도 먹곤  하는데요. 어떤 날은 그렇게 발품 팔아도 굳게 닫힌 문을 열기 힘든 날이 있습니다. 건물과 자리는 그대로인데, 그 문 앞에 선 나도 그대로인데 방 주인이 계속 바뀝니다. 그래도 부속실 직원분들은 안 바뀌시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주이 바뀌면 공간의 기운도 공기도 확 달라집니다.

최근 큰집과 작은집 마와리를 돌면서 그 방, 그 자리에 계셨던, 지금은 나가셔서 개업을 하시고 대형 로펌에 몸담고 계신 한 분 한 분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길어야 1년, 큰집 주인은 임기를 꼭 채워도 2년인데, 그 자리에 오르신 분들은 무엇을 지키고 싶으신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부턴가는 큰집과 작은집을 둘러싼 로펌들을 찾아다닙니다. 점점 취재환경이 어려워지다 보니 내부 정보를 파악하는데 걸리는 시간보다, 로펌에 계신 선배 검사님들을 통해 듣는 정보가 더 빠를 때도 있습니다. 검사장 진급이 안돼 나가신 분이나, 검사장에서 고검장 진급이 안돼 나가신 분, 혹은 큰집 주인이 바뀔 때 무언의 압력으로 전화를 받고 나가신 전 검사장님들을 뵐 때면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오니까 마음이 편해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렇게 살았나 몰라. 지금 뉴스를 보면 정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뿐이에요.”

실제로 대부분 친정을 떠나 새 업무를 시작한 분들의 얼굴은 평안, 그 자체인 경우가 많습니다.

검찰 내부에서 초고속 승진을 하고 부장 되고 차장 되고 검사장 되고.. 그러다가 남들보다 빨리 집에 가게 된 케이도 있습니다.

“나와보니 내 나이가 너무 젊은 거예요. 나오기 전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나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제 기억에 서초동은 한시도 조용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10년, 검찰에 계신 많은 분들과 인연을 맺고, 또 떠나보내면서 깨달은 것은 ‘속도보다는 방향’입니다. 빨리 간다고  좋은 게 아니더라고요. 늦더라도 정도를 걷고, 욕심을 내지 않으면 큰 탈 없이 잘 갈 수 있더라고요. 지향점과 지양점이 분명해야 바르게 걸을 수 있더라고요.



<마지막 모습>


2011년 어느 날, 대검 홍만표 기조부장께서 총장님을 모시고 러시아 검찰청 답방을 다녀온 뒤 만났습니다.

“임 기자님, 러시아 마지막으로 다녀오신 게 언제세요?”
“공부 마치고 와서 업무적인 일로 출장 간 것 외엔 한 번도 없지요.”
“현지에서 통역한 친구가 임기자 님 학교 후배여서, 혹시 임 기자님 아냐고 물었더니, 그 선배는 저를 몰라도 저는 그 선배 이름을 들어서 알고 있다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유명인사예요. 나중에 꼭 한번 시간 내고 여행 가서, 후배들을 만나 꿈과 희망을 나눠주세요. 일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2016년 여름쯤, 돌 지난 딸아이를 데리고 3주간 러시아 여행을 갔는데, 학교 캠퍼스를 걷다가 문득 홍만표 부장님 말씀 생각나서 연락을 드려봐야겠며 ‘지금 어떻게 지내시지?’하고 포털에 이름을 검색하는데, 네이처리퍼블릭 사건을 구속되신 것을 알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2011년 여름, 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해서 실패의 책임을 지겠다며 검찰 내부망 이프로스에 글을 쓰시고 나가셨던 홍만표 부장께서, 비서울대 출신으로 힘들게 검찰 고위직까지 올라 실력과 인품으로 선후배의 존경을 받으셨던 분께서  그동안 쌓은 공을 한 번에...

무엇이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는 것인지, 아직 저는 알지 못합니다. 조금 늦더라도, 더디게 걷더라도 바른 길을 가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기자로서, 질문을 해야 하는 업이고, 정확히 알아야 정확히 쓸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에 앞으로 더 고민하고 질문하는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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