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잇기 - 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by 이끼
뷰티풀마인드.jpg 영화 <뷰티풀 마인드(Beautiful Mind, 2001)>

영화 <뷰티풀 마인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영화 '뷰티풀 마인드(Beautiful Mind, 2001)'를 보았다. 늘 보고 싶은 영화 목록에 들어 있었지만 선뜻 손이 안가던 영화였다. 실존했던 인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매력과 정신질환을 앓는 천재와 헌신적인 아내의 뻔한 휴먼 스토리라는 우려와의 저울질 때문이었다.

영화는 뻔함 속에서도 스릴러적인 요소, 조현병과 망상증 환자와 그 가족의 삶을 생각하게 하는 요소들이 재미와 생각할 거리들을 같이 던져주어서 좋았다. 스릴러적인 요소나 아내의 헌신에 영화적 허구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좀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영화의 재미를 생각하면 아카데미 작품상을 탈만 한 것 같다.

영화는 1994년에 노벨 경제학 상을 탄 천재 수학자 존 내쉬(John Nash)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는 실제로 '오만한 천재'였다. 그는 동료 수학자들을 대놓고 무시하거나 깎아내리는 발언으로 유명했고 남의 이론을 공부하는 것이 자신의 독창성을 해친다고 믿어 수업을 거의 듣지 않았다. 지적 경쟁심이 심해 동료들이 자신보다 먼저 성과를 내는 것에 대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꼈다. 성공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이 결국 자신을 '세계를 구하는 중요한 인물'로 믿게 된 과대망상의 심리적 토양을 제공했을 것으로 본다.

또한 이러한 그의 성격은 그를 사회적으로 고립시켰고, 이는 다시 그의 조현병을 악화시켜 결국 과대망상, 환청 등으로 현실 세계와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에게 지적 능력은 자신의 '존재 가치' 그 자체였고, 그것은 증명해야 한다는 그의 욕구는 그를 파괴시켰다.


인정 욕구

인정받고 싶어하는 본능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이다. 집단 내에서 생존하기 위한 진화적 본능인 샘이다. 인간의 뇌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와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칭찬이나 인정을 받을 때도 보상 호르몬인 '도파민'을 분비한다. 이 쾌감은 매우 강렬해서 우리는 그 기분을 다시 느끼기 위해 더 큰 성취와 더 많은 인정을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인정 욕구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이를 "열등감"과 "우월성 추구"로 설명했다. 열등감은 인정욕구의 불씨와 같아서 잘 발전시키면 '성장의 동력'이 되어 위대한 성취를 만들 수도 있지만, 타인의 기준에만 맞추려다 보면 '가짜 자아'에 갇혀 스스로를 모두 태워버리고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존 내쉬는 본인의 유전적 요소(조현병)에 과도한 인정 욕구가 더해져 빠져나올 수 없는 '가짜 자아'에 갇히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로울까? 꼭 학문의 분야일 필요는 없다. 자본주의와 소셜미디어는 사람들을 인정 욕구의 늪에 더 깊숙히 빠지게 한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관계, 끝임없이 남과 비교를 반복하며 인정 욕구를 채우려 한다면, 존 내쉬처럼 언젠가 '가짜 자아'에 갇히게 되지 않을까?


레프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톨스토이가 민담을 바탕으로 쓴 삶에 대한 철학적, 기독교적 통찰을 담은 단편 소설이다. 그 당시 그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음에도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결국 죽음이라는 허무로 끝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는 자신의 서재에서 밧줄을 치웠고, 총을 가지고 사냥나가는 것도 그만두었다. 자살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의 삶을 구원해준 것은 민중(농부)들의 삶이었고, 종교였다. 그가 생각했던 기독교는 권력으로부터는 먼 '사랑'과 '무저항 비폭력' 정신이었고 이는 '톨스토이즘'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시기에 쓰여진 이 소설은 다음 세가지 질문을 던진다.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당신은 이 세가지 질문에 대해서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소설 속 천사가 인간 세계에 와서 얻은 답은 '사랑', '자신의 미래', '사랑'. 너무 단순하고 교화적이여서 거부감을 느껴질 수도 있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로 치부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과학, 예술, 철학이 해결해주지 못했던 톨스토이의 허무를 채워주었다. 어쩌면 '열등감'을 마음 속에 가득채우고 허락되지 않은 '미래'를 향해 '욕망'으로 달리는 건 어른들이 아닐까?

존 내쉬는 말년에 자신의 회복은 아내 덕분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물론 현실은 영화보다는 냉혹해서 이혼과 재혼의 과정이 있었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무한 헌신적인 아내가 오히려 너무 비현실적이다. 어찌되었든 결국 그를 살 수 있게 해준 건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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