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기 - 영화 '척의 일생'과 칸트의 관념론 + 소설 '척의 일생'
우연히 유튜브 리뷰(링크)를 통해 알게 된 영화 "척의 일생"(the Life of Chuck).
그분 역시 '간만에 인생영화를 만났습니다'로 소개를 시작했는데, 나에게도 오랜만에 만난 인생 영화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올해말 한국에서도 개봉할 영화로 내용은 최대한 자제하는 걸로... (앞서 소개한 리뷰도 결말을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그보다는 이 영화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철학적 개념인 칸트의 '관념론'과 이 영화를 살짝 이어본다.
이 영화는 스티븐 킹의 동명 소설 "the Life of Chuck"을 원작으로 닥터 슬립(이 역시 스티븐 킹 원작) 감독인 마이크 플래너건이 메가폰을 잡았다. 주연은 사실 여려 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도 어벤져스의 '로키'로 잘 알려진 배우 '톰 히들스톤'의 명연기가 가장 인상 깊게 남는다. 그의 멋진 춤 솜씨와 깊이 있는 표정연기가 이 영화의 완성도를 크게 높였다. 나는 몰랐었는데 원래 연기파 배우로 잘 알려져 있는 배우라고...
영화를 너무 재미있게 봐서 리뷰를 찾아봤는데 평점이 기대보다 낮아서 놀랐다. (로튼토마토 신선도 81%, 관객점수 88%) 이유를 찾아보니 공포영화 전문 감독과 공포 소설의 제왕의 작품에서 기대했던 내용과 너무 달라서 실망했다는 쪽과 마지막 결론부가 이해가 안간다는 쪽, 나레이션이 너무 많다는 쪽,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생에 대해서 너가 뭘 안다고 나를 가르치려 드냐?'가 주된 원인이었다. 깊이 있는 내용이나 메세지가 있는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잘 맞지 않은 듯.
하지만 나에게는 차가운 철학적 개념이 긴 인생을 살아온 한 작가를 만나서 이런 따뜻한 이야기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게다가 스티븐 킹 특유의 미스테리적 요소와 독특한 구성, 플래너건 감독의 훌륭한 연출력과 톰 히들스톤의 멋진 연기는 재미로도 이 영화에 좋은 점수를 주게 만든다.
영화를 너무 재미있게 봤던지라 바로 원작 소설 구해 읽어보았다. 원작 소설은 2020년 발간된 "피가 흐르는 곳에"(If It Bleeds)에 두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첫번째 단편인 '해리건 씨의 전화기'도 Netflix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두 작품 모두 미스테리 요소는 조미료 정도이고 삶에 대한 그의 생각들이 담긴 소설들이라, 영화 '쇼생크탈출'(스티븐 킹 원작)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
소설은 영화와 완전히 동일한 스토리이지만, 좀 더 평이하게 느껴졌다. 영어로 읽어서 더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영화에서 많이 부각되었던 장면들이 막상 소설에서는 담담하고 짦막하게 흘러간다. 소설에서 자세히 묘사되는 것들이 영화에서는 생략되기도 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마이클 플래너건 감독이 스티븐 킹의 글을 정말 좋아한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의 메세지는 글로 읽을 때보다 영화 속에서 더 강조된 느낌이고, 영화의 특징 상 어색할 수 있는 마지막 부분은 오히려 손대지 않고 그대로 원작을 따랐다. 불만 중 하나인 '나레이션이 너무 많다'는 부분도 소설의 멋진 문체들을 회손시키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고 싶었던 감독의 욕심(또는 겸손?) 아니었을까? 단순히 원작을 그대로 가져온 것도 아니다. 소설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여러 영화적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잘 가미했다.
킹은 소설의 서문에서 이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느 날 아침 산책을 하던 중, '어떤 노인이 죽을 때,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이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제가 직접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 속담을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한 노인을 잃을 때 그의 지혜도 함께 잃게 된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문구를 킹은 칸트의 '관념론'과 연결지어 '누군가 죽으면 그의 인식 안에 있던 우주는 어떻게 될까'라는 재미있는 상상으로 연결한다.
Do I contradict myself? (내가 나 자신과 모순되는가?)
Very well then I contradict myself, (좋다,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과 모순되련다 )
I am large, (나는 광대하다)
I contain multitudes. (내 안에는 다수가 있으므로)
영화와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시구 역시 스티븐킹을 만나 그 의미가 확장된다.
일반적으로 이 시는 입체적인 자아와 민주주의의 다양성에 대한 포용으로 해석되지만, 킹은 이 시에 인식론을 더해 '하나의 우주'를 담은 개인으로 묘사한다.
어떤 개념이나 이론들은 어느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의 머리 속에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것들인 경우가 많다. 정리되지 않은 채 존재하던 그런 것들은 천재나 스승을 만나 명확한 이론이나 개념으로 정립된다. 칸트의 관념론 역시 부처의 사상 속에, 아프리카 속담 속에, 그리고 같은 상황을 서로 다르게 인지하는 우리에 삶 속에 존재하고 있던 개념이다. 누구나 자기 머리 속에 있는 세상을 생각해본 적이 있지 않을까?
그는 이러한 생각을 체계화 했다. 1781년 '순수 이성 비판'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그는 자신의 이론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칭하면서, 자신의 이론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뀌어 놓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모든 인식이 대상에 따라야만 한다고 가정되어 왔다. ... 이제는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따라야만 한다고 가정해 보는 것이 어떠한가.
공간은 결코 사물 자체의 속성이 아니며, 사물들 상호 간의 관계 속에 있는 속성도 아니다. ... 공간은 오직 감성의 주관적 조건일 뿐이며, 이 조건 아래서만 우리에게 외부 직관이 가능하다.
시간은 사물 자체에 달라붙어 있는 어떤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 시간은 오직 우리 직관의 주관적 조건일 뿐이다.
그의 이론을 한줄로 정리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객관적인 외부 세계(물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그외부 세계의 재료(자극)을 받아들여 구성해낸 현상이라는 것이다. 즉,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우리의 감각 기관이 받아들인 외부의 자극을 번역해서 만들어낸 세계라는 것, 즉 밖이 아니라 내 머리 속에서 있는 세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물자체를 접하기에,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저 우리의 감각과 경험이 해석한 내용을 체험할 뿐이다.
그의 이론은 시간이 상대적이라거나(상대성 이론), 지구가 태양을 돈다거나(지동설) 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개념이지만, 조금만 직관해 들어가면 얼마나 타당한 이론인지 곧 이해하게 된다.
복잡한 내용은 생략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점은 결국 우리는 우리 각자의 세상, 각자의 우주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각자의 감각과 경험으로 해석된 다른 대상을 체험하는 셈이다. 우리는 종종 서로 다르다고 말하지만, 사실 각자가 살고 있는 세상 자체가 다른 것이다.
스티븐 킹은 여기에 한가지 생각을 추가한다. '그럼 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의 도서관, 그의 세계, 그의 우주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는 이러한 생각을 미스테리로 풀어나갔고 더 나아가 이런 관점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자신만의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이야기한다. 나이든 할아버지의 따뜻한 시선으로...
좀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여기까지만.
구지 복잡한 칸트의 '관념론'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여든을 앞 둔 고령의 작가가 평생을 만들어온 자신의 우주를 바라보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이 그에게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이 소설은 언젠가는 사라질 스티픈 킹 자신의 우주와 독자들의 우주에 보내는 찬사의 편지인 셈이다.
"I am large, I contain multitudes."
"나는 광대하다, 나는 다수를 포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