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과 하얼빈

잇기 - 김훈의 하얼빈과 우민호의 하얼빈

by 이끼

잇기 - 두 점을 이을 때, 두 선을 이을 때, 두 면을 이을 때. 우리는 새로운 차원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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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하얼빈(김훈, 2022)과 영화 하얼빈 (우민호, 2024)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 에드워드 카 -


작가와 역사가

김훈 작가도 우민호 감독도 역사가는 아니다. 그러므로 그분들은 역사가로서의 책임으로부터는 자유롭다. 하지만 그분들이 역사를 다루는 순간 그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들의 작품을 역사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작가들은 역사적 사실 위에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레 얹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가 만들어낸 역사 이야기를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그 작가가 그려낸 인물을 만나게 된다.그 인물은 실존 인물과 얼마나 닮아 있을까?

상관없다. 어차피 실제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는 본인 조차도 모를테니까.


김훈의 하얼빈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 '하얼빈'

지금까지 김훈 작가는 늘 나에게 생각치 못한 인물들을 내 앞에 데려다 놓았다. 그게 좋았고, 그의 꾸밈 없이 깊은 문장들이 좋았다. 그는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인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를 처음에는 '꽃은 피었다'로 썼다가 며칠 간의 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로 바꿨다고 한다. '꽃은 피었다'에는 객관적인 사실에 주관적인 정서가 담기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문장들은 그렇다. 주관적 정서가 담긴 표현을 자재한 채 객관적인 사건 기술이나, 묘사만으로 인물의 내면을 보여준다. 작가가 묘사하는 안중근의 내면은 어떤 것일까?

총구를 고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가늠쇠 너머에 표적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표적으로 시력을 집중할수록 표적은 희미해졌다. 표적에 닿지 못하는 한줄기 시선이 가늠쇠 너머에서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보이는 조준선과 보이지 않는 표적 사이에서 총구는 늘 흔들렸고,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는 방아쇠를 거머쥐고 머뭇거렸다.
방아쇠를 당기고 나면 실탄이 총구를 떠나는 순간 조준선은 지워졌고 총의 반동이 손바닥과 어깨에 걸렸다. 비틀린 조준을 다시 회복하고 나면 표적은 다시 안개 속에 묻혔다.
방아쇠를 당길 때,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는 몸의 일부가 아니라 홀로 독립된 생명체였다. 둘째 마디는 언제 당겼는지도 알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스스로 직후방으로 작동해서 총알을 내보냈다. 그러므로 이토를 조준해서 쏠 때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절망감과 복받침, 그리고 표적 너머에서 어른거리는 전쟁과 침탈과 학살과 기만의 그림자까지도 끊어버리고 둘째 마디의 적막과 평온을 허용해야 할 것이었다.


이러한 문장들을 통해 비록 작가가 만들어냈지만, 작가의 감정은 배제된 안중근을 만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문장을 쓰기 위해 김훈이 관련된 자료들을 얼마나 많이 모았고 고민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아래 문장들을 보면 안중근을 이해하기 위해 직접 유사한 총을 쏘아봤으리란 걸 가늠해 볼 수 있다.

안중근은 가랑잎 더미에 엎드려서 거총했다. 눈에서 가늠쇠를 지나 표적에 이르는 조준선이 총구 앞에 열렸고, 노루의 전신이 그 끝에 걸려있었다...
안중근은 왼팔로 총신을 받치고 오른손 검지를 방아쇠울 안에 넣었다. 엎드린 자리가 편안했다. 안중근은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를 방아쇠에 걸었다. 안중근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반을 내쉰 다음 숨을 멈추었다 바위는 보이지 않고 노루만 보였다. 조준선 끝에서 총구는 노루의 몸통에 닿아 있었다.
오른손 검지 둘째 마디는 안중근의 몸통에서 분리된 것처럼, 직후방으로 스스로 움직이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총의 반동이 오른쪽 어깨를 때렸다. 총의 반동에 어깨로 맞서지 않고, 몸안으로 받아들여서 삭여내야 한다는 것을 안중근은 소싯적부터 알고 있었다.
조준선 끝에서 노루가 쓰러졌다....
......총이란, 선명하구나.


김훈의 안중근은 어떤 사람일까? 작가는 안중근을 정의할 수 있는 몇가지 명제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

차갑고 선명한 총을 든 늘 흔들리는 인간, 적군을 풀어줌으로써 동료들을 죽게 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진 인간, 거사를 준비하며 왜 이토를 죽여야 하는지 고민하는 인간, 천주교인임에도 살인을 해야 하는 갈등 속 인간, 아내와 자식에게 도리를 다할 수 없었던 한 가장, 대의를 위해 끝까지 밀고나는 의지의 인간, 혈기 왕성한 서른 한살의 한 청년.

김훈의 안중근은 너무 영웅적이지도, 너무 나약하지도 않다. 그의 거사 역시 그렇게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다. 삶의 무게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 모습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더 울림이 있다. 김훈이 만들어낸 인물들은 그렇다. 이순신도, 안중근도 고뇌 속에서 그저 자신 삶의 무게를 묵묵히 지고 나아간다.


우민호의 하얼빈

기대와 달리 김훈의 하얼빈과는 전혀 다른 결의 영화였다. 처음에는 소설과는 다른 흐름과 역사에 없는 사건들이 불편하게 느껴졌는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감독의 의도가 느껴지고 다른 관점에서 보니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우민호의 안중근은 조금 더 단순하다. 시간적 제약과 내면 묘사가 불가능한 영화에서 감독은 인물의 몇가지 특징에 촛점을 맞출 수 밖에 없다. 그런 관점에서 우민호의 안중근은 두가지에 집중한다. 적군을 풀어주고 동지를 믿는 따뜻한 인간의 모습과 자신으로 결정으로 죽게 된 동지들을 대신해 이토를 죽이기로 결심한 강한 의지의 모습이다. 이 두가지에 다양한 인물들을 추가해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안중근에 반대와 협력을 이어가는 독립군 이창섭과 김상현, 안중근에게 집착하는 일본군 모리는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안중근의 내면과 고뇌를 보여주기 위해 창조된 인물들로 그 역할을 잘 해낸다. 소설 하얼빈이 거사와 관련해서는 안중근과 우덕순 개인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영화에서는 항일 조직 동료들에 집중되어 있다. 감독이 만들어낸 이러한 구성은 영화적 재미를 더한다.

인물에 대한 깊이와는 별도로 영화적 재미는 소설과는 다른 부분들이 있다. 영화는 문학, 미술, 음악이 함께 만드는 종합예술이 아닌가. 여러 장면들에서 영상미에 대한 감독이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두만강 씬은 아이맥스로 못봐서 아쉬웠다.

재미있었던 점 하나. 영화를 보며 우덕순의 연기가 김훈의 하얼빈에 묘사된 우덕순가 비슷하다고 느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배우 박정민이 소설 하얼빈의 우덕순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안중근 vs 안중근

동일 인물을 다르게 묘사한 작품을 보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배트맨에 나오는 조커의 경우 감독이나 배우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영화 '영웅'의 안중근이 흔히 우리가 아는 영웅의 모습이라면, 우민호의 안중근과 김훈의 안중근은 고뇌하는 한 젊은이로서 닮아 있다. 다시 생각해보니 다르다. 우민호의 안중근은 일단 키크고 잘생기지 않았는가. 이창섭 역으로도 배우 이동욱을 선택한 것을 보면 감독의 의도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의도가 나쁘지 않아 미소가 지어진다. 우민호의 안중근은 김훈의 안중근보다 덜 인간적이지만 더 매력있다.

물론 외모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끝에 나오는 이 대사는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문장으로 실제 안중근이 했던 말이라고 한다.

어둠은 짙어오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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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안중근은?

물론 진짜 안중근은 안중근 조차 모를 것인다. 나도 나를 정확히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현재를 살고 있는 나에 비친 안중근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은 우리가 아는 영웅이 아닌 동학농민들 진합하기도 했던 조선의 기득권 도련님일 뿐이라고 폄하하기도 하고 이토를 죽이지 않았다면 일본의 핍박이 덜했을 것이라고 하며 그의 거사를 폄하하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안중근도, 김훈의 안중근도, 우민호의 안중근도 진짜 안중근이 아닌 것처럼 그런 말들 역시 안중근을 재대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는 어차피 흘러간 것이고, 현재를 통해 해석될 수 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내가 바라보는 안중근일 것이다. 그 안중근이 말해주는 역사가 나의 역사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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