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걱정 보따리를 짊어진 즉흥 여행자 지망생

결국은 뭐든 될대로 된다

by 이끼레몬소르베

나는 어떤 것에든 금방 빠졌다가 금방 질려 하는 편이다. 취미든 일이든 처음 며칠, 길면 몇 개월은 푹 빠져서 에너지를 막 쏟다가도 약발이 떨어지면 바로 시들해져서 손을 거의 놓고 만다. 늘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이른바 ‘도파민 중독’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일상이 조금씩 지루해진다 싶으면 난 어김없이 어딘가로 떠나고 있었다. 여행을 특별히 좋아하는지 자문해 보면 ‘딱히…?’라는 대답이 나오지만, 지금까지의 행적을 보면 분명 싫어하진 않는 것 같다. 여행도 내가 벌였던 다른 많은 짓과 마찬가지로 앞뒤 안 재고 즉흥적으로 꽂혀서 비행기 표부터 사는 바람에 떠나야 했던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도 제일 처음 혼자서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했을 때는 여행 두 달 전부터 대강 갈 곳들과 루트를 미리 다 계획하고 예매를 했었는데(그마저도 딱 하루만 신경을 쓰고 말았다) 점점 더 대담(?)해져서 가장 최근에 간 여행에서는 출국 날 경유지에서 모든 계획을 다 짜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계획 없이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서 일정을 유연하게 바꿔 가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출국 하루 전날까지도 막연하게 ‘대충 가서 그날그날 여행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아무 대비도 안 하고 있었다가, 출국 당일 두 가지 장벽을 만났다.


첫 번째는 인천공항에서 표를 발권할 때였다. 난 즉흥 여행을 꿈꾸는 사람답게 귀국 비행기 표도 없이 출국 표만 달랑 끊은 채 공항으로 향했는데, 체크인 카운터 직원분께서 “귀국 표가 없으면 독일에서 입국이 안 될 수도 있으세요.”라고 친절하게 알려주시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바르셀로나에서 한국으로 오는 7월 7일 자 비행기 표 결제를 해야 했다. 조금 더 여유롭게 할 수 있었으면 무려 20만 원을 아낄 수 있는 표였던 것을 알고 나서는 너무 아까워서 머리를 싸매고 몸 둘 바를 몰랐다.


두 번째 장벽은 정해진 예산이었는데, 마지막 여행지가 바르셀로나로 고정되어버려 그전 일정들을 어느 정도 정해놨어야 했다. 유럽의 교통편들은 사용 일자가 다가올수록 점점 비싸지는데, 아직 여행 시작 전인데도 루트를 대충 구상해서 교통비, 숙박비를 계산해 보니 미리 생각한 예산에 간당간당한 수준이었다. 도대체 난 무슨 생각으로 이 정도 금액으로 성수기 유럽에서의 무계획 즉흥 여행을 추진했던 건지 의문을 잔뜩 품으며 베트남 하노이의 노이바이 공항에서 경유하는 10시간을 십분 활용해 열심히 손품을 팔아 전체 루트를 짰고, 첫 번째 여행지인 프랑크푸르트에서 3박을 머무는 동안 그 루트에 필요한 모든 숙소와 교통수단 예약을 끝내버렸다. 이로써 내게 필요한 계획이 모두 세워졌다. 그건 ‘류블랴나에서는 이 숙소에 사흘 동안 머물고, 그다음 야간 버스를 타고 사라예보로 이동해 이 숙소에서 3일을 머문다.’ 이런 식으로 어디서 며칠을 지내다 어떻게 다음 도시로 이동할지만을 정한 계획이었다. 매일 어느 곳으로 갈지는 즉흥 여행의 영역으로 남겨두었다. 사실 내가 그 도시에서 갈 곳이 어디일지 미리 다 알고 갔던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어쨌든 이제 모든 계획을 촘촘하게(?) 다 짰으니 미래 걱정은 내려놓고 현재의 여행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즐기면 됐지만, 밤이면 밤마다, 또는 시간이 날 때마다 예약한 숙소들의 페이지로 들어가 숙소의 치명적인 단점들을 다 샅샅이 찾을 것처럼 꼼꼼히 후기를 읽었고, 조금이라도 안 좋은 후기가 발견되면 또 걱정으로 몇 시간을 보냈다. 결국, 몇 개 숙소는 무료 취소 기한이 끝나기 직전 취소해 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온라인 예매 사이트인 북킹닷컴(Booking.com)을 들락날락하는 게 새로운 취미가 되어가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유롭게 인생을 즐기고 싶어서 한동안 일을 쉬고 여행하는 삶을 택했던 건데,

여기까지 와서도 맨날 걱정만 하고 있잖아?’


결국 여행이든 일상이든 다 내 삶의 일부이고,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잘 살아가는 것의 일부일 텐데 난 여행에서까지 평소의 나쁜 습관을 끌어오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여행에서든 일상에서든 ‘내일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겠지?’ 같은 사소한 고민부터 ‘3, 4년 후의 내가 스스로 먹여 살릴 수 있을까?’ 같은 막연한 불안까지 어떤 종류든 항상 걱정거리를 스스로 만들어내곤 했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막상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빛나도록 좋았던 때든, 그 순간을 빨리 벗어나기만을 바랐던 때든 모두 과거나 미래에서 벗어나 오로지 그때 그 순간을 살았던 순간들이었다. 계획은 어느 정도의 안정성을 보장해 주는 역할을 할 뿐, 삶을 완벽히 통제해 주지는 않는다. 그것을 알기에 항상 걱정 뭉치를 채워놓고 들고 다녔다. 하지만 당장 3시간 후에 어떤 일이 있을지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불확실성은 불안을 가져다주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예상치 못한 기쁨은 계획에 없었기에 더 크게 다가오기도 한다. 즉흥적으로 움직이기를 좋아하다 보니, 오히려 내가 진짜 원하던 것과 우연히 발걸음이 겹칠 때도 많았다.


이 글도 그렇다. 이것이 앞으로 어떤 형태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쓰다 보면, 지금의 내가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가게 되겠지.

6년 전 여름 산티아고 순례길, 고비사막에서 문명과 떨어져 보낸 일주일, 두 달 동안의 발칸 여행, 그리고 틈틈이 다녀온 짧은 국내 여정들...

그 중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기억부터 하나씩 꺼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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