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 | 어긋난 계획이 더 좋았던 이유
난 계획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아니다. 예전에는 계획이 지켜질지 여부와는 별개로 세세한 계획을 짜는 행위 자체에 재미를 느끼고 푹 빠지곤 했다. 하지만 완벽한 계획서가 주는 만족감은 잠시뿐, 막상 행동할 때가 되면 계획 자체의 무게에 짓눌려 움직이지 못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계획서에 적힌 날짜를 그냥 흘려보내기를 반복한 끝에, 내가 계획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쯤 시작된 MBTI의 유행도 내 이런 성향을 받아들이는 데 꽤 도움이 되었다. 지금은 저질러서 돌이킬 수 없게 해 버리는 대담함(사실 대책 없음에 더 가까운)이 나에게 계획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안다.
나의 이런 ‘비계획주의’ 성향은 여행할 때 특히 두드러진다. 아직 완전한 즉흥의 경지에는 못 미쳐서 교통편과 숙소 정도는 미리 정해두지만, 이외의 일정은 머리가 아닌 그날의 기분과 발걸음에 맡긴다. 하지만 빼곡한 계획표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듯이, 여행 스타일도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그 시작은 2019년이 시작된 직후인 어느 날, 고등학교 친구 동동이의 한마디 카톡이었다.
“웡이(내 고등학교 때 별명이다)! 여행 가자!”
여행지는 서울에서 출발할 나와 부산에서 출발할 동동이 모두 가기 편한 곳 위주로 찾다가 안동으로 정했다. 지도에서 맛집 검색 결과가 빼곡하게 표시된다는 점도 물론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팔팔한 20대 초반이던 우리는 새벽 3시가 넘도록 카톡을 주고받으며 열심히 계획을 세웠다. 사실상 대부분이 ‘뭐 먹지’에 대한 이야기였긴 했지만, 어쨌거나 나름 명확한 동선과 알찬 식단으로 구성된 야무진 계획이 만들어졌다. 여행 첫날 새벽같이 일어난 우리는 ‘점심은 하회마을에서 먹자’는 약속을 확인한 후, 가벼운 위장으로 각자 안동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정오쯤 안동 터미널에서 만나자마자 우리는 왁자지껄 수다 파티를 열었다. 밀린 이야기는 하회마을로 향하는 시내버스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안동 시내’가 아닌 외곽을 도는 노선이어서 그런지 버스에도 사람이 많이 없었고, 정류장에도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버스는 서울 시내에서는 상상도 못 할 속도로 질주했다.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당황스러운 속도감 속에서도 우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다 문득, 동동이가 잠깐 대화를 멈추고 미심쩍은 표정으로 네이버 지도를 확인하더니 다급히 버스의 stop 버튼을 눌렀다. 우리가 수다를 떠느라 질주하는 버스가 지도에서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빨리 목적지를 지나치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낯선 도시의 낯선 버스와 더더욱 낯선 그 속도에 취해 있던 우리는 무작정 버스에서 내리면서도 그저 깔깔대며 웃었다. “와 진짜 웃기다!” 그땐 그런 나이였다. 그 후 부지불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침묵은 짧았지만 놀랍도록 고요했다. 한낮의 거리가 그렇게 조용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버스가 길 너머로 사라진 이후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늦겨울의 황량한 땅에서 제멋대로 자라고 있던 잡초들 사이사이에 드문드문 그림처럼 서 있는 집들과 작은 밭들에서는 시골에서 흔한 개 짖는 소리, 새소리, 심지어 풀벌레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그 공간에는 소리마저도 우리뿐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밝은 하늘 아래 어울리지 않는 고요에 감탄하던 것도 잠시, 차가워진 머리로 현실을 맞닥뜨린 우리는 곧바로 지도 앱을 열어 하회마을로 가는 길을 찾았다. 다음 버스는 20분 후에 올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살짝 기울어진 표지판과 누군가 쓰다 내놓은 듯한 식탁 의자 하나가 끝인 황량한 정류장에서 20분 동안 기다리는 대신 도보 7분 정도 거리의 다음 정류장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인적이 드문 곳답게 인도라고 할 만한 길조차 없어서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찻길 옆의 공간으로 걸어야 했다. 그런 도로에서는 트럭이나 버스 등 큰 차들의 존재감이 특히 압도적이라서 우리는 멀리서부터 무게감이 느껴지는 차 소리가 들려오면 황급히 마른 풀밭 위로 올라서야 했다.
그 행동을 몇 번인가 반복한 후, 한 번 더 풀밭으로 올라서 거대한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고개를 든 우리는 그만 벙쪄버렸다. 우리가 타야 할 버스가 눈앞을 쌩하고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분명 다음 버스는 20분 뒤에 온다고 했는데..?”
정류장에 설 일이 별로 없어서 질주하는 안동 버스의 성격을 조금만 더 생각해 봤더라면, 지도의 시간표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그런 깊은 고찰을 하기엔 새로운 경험의 바다에서 겨우겨우 헤엄치던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정류장에서 우리는 아까 놓쳤던 버스를 타려면 45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 희망적이진 않은 정보였다. 그때 동동이가 기가 막힌 제안을 해왔다.
“우리 그냥 하회마을까지 걸어가 볼래?”
그곳에서 하회마을까지는 걸어서 3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먼 길을 다 걷기보다는 우연히 버스와 타이밍이 맞으면 중간에 만나는 정류장에서라도 버스를 탈 생각이었다. 하지만 3시간 내내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두 발로 하회마을에 당도했다.
계획이 완벽히 어그러졌던 사건이었다. 도착했을 때는 하회마을 관람 시간이 1시간도 채 남지 않았던 시점이어서 마을 주차장과 입구의 세계 탈 박물관 정도를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계획의 관점에서 보자면 실패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이 여행을 기점으로 우리는 걷기 여행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3시간을 걸으면서 우리는 버스를 탔으면 순식간에 지나쳤을 안동의 소소한 풍경들에 온전히 들어가 음미할 수 있었다.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꼿꼿하게 흔들리던 갈대들과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비닐하우스와 밭의 풍경, 우연히 만난 6·25 전쟁 참전용사 기념비 등등… 예기치 못한 여정에서 우리는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던 안동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풍경들은 관광객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안동에서의 삶이었다.
안동을 느리게 가로지르며 우리는 다 기억나지도 않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하는 중에도 틈만 나면 ‘와 좋다’라는 말을 내뱉은 기억만이 어렴풋이 난다. 시간표와 일정에 맞춰 움직여야 했던 도시에서의 삶과 반대로, 우리가 내키는 대로 딛는 발걸음에 시간이 따라오고 장소가 다가왔던 몇 시간은 평소에 하지 못한 행동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일탈이기도 했다.
버스를 놓침으로써 지켜야 할 시간표가 의미를 잃은 기점부터는 아무도, 그 무엇도 우리를 재촉하지 않는, 시간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맛보았다. 습관대로 걷기만 했을 뿐인데도 끊임없이 새로운 볼거리, 이야깃거리들이 샘솟았다. 동동이는 길에서 만나는 강아지들을 모조리 찍으며 ‘포켓몬 고 대신 안동 강아지 고’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한창 유행하던 게임 포켓몬 고의 유저들이 걸어 다니며 포켓몬을 모으듯이 안동의 다양한 강아지를 사진으로 수집하는 소소한 놀이였다. <하회마을에서 점심 먹기> 일정이 예기치 못하게 지연돼서 굶주린 채로 3시간을 넘게 걸어야 했던 탓에 막판에는 주변의 풍경이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지쳤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하회마을 언저리에 자리 잡고 우리를 맞이한 간고등어 집이 준 감동은 그만큼 더 컸다. 밥을 한 공기 더 시켜가며 허겁지겁 먹어 치운 그 간고등어 백반은 아직도 인생 최고의 한 끼 top 10에 올라와 있다.
(나중에 보니 그 집은 한때 엘리자베스 여왕과 부시 대통령도 방문했던 유서 깊은 맛집이었다!)
그날 저녁, 안동 시내에서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갈 때도 우리는 일부러 버스를 타지 않았다. 간고등어 이후에도 굶주린 점심을 보상받으려는 것처럼 디저트와 찜닭까지 차례로 해치운 우리는, 배부름을 핑계 삼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찜닭 골목에서 숙소까지도 한 시간 넘게 걸어야 하는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하지만 그 거리가 힘들게 느껴졌던 기억은 전혀 없다. 시간이 만든 필터에 보정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밤길의 선선한 바람과 따뜻한 불빛의 거리는 지금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계획이 틀어지지 않았더라면 없었을 장면, 놓쳤을 대화, 지나쳤을 풍경들은 우리 여행의 일부가 되었다. 어그러진 계획이 오히려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된 셈이다. 그 하루는 내 여행 취향의 새로운 발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