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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야간버스가 선물한 새벽의 빈틈

아비뇽&카르카손, 사라예보 | 지루함은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다

by 이끼레몬소르베


아침시간에는 지루함을 느끼기 힘들다. 평일에는 일어나자마자 정신없이 출근 준비를 해야 하고, 주말에는 느지막한 아침에 아늑한 침대에서 여유 부리는 달콤함을 누리기 바쁘다. 사실 익숙하고 편안한 환경에서는 약간 심심할 수는 있어도, 고역스러울 정도의 지루함을 느낄 틈 자체는 거의 없다. 집 안에서 유튜브나 ott 영상을 보기만 해도 서너 시간이 훌쩍 가버리고, 화면에서 눈을 떼어 주변을 보면 당장 처리할 집안일들이 눈에 들어오기 일쑤다. 집에서 정 할 일이 없으면 편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동네 산책을 나서면 된다. 하지만 아침은 핸드폰에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 심심함과 함께 서둘러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보통 귀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낯선 도시에서의 이른 아침 시간은 때때로 뜻밖의 고역을 안겨준다.




배낭여행할 때는 돈을 아끼려고 야간버스를 애용한다. 야간버스는 교통과 숙박을 동시에 처리해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단점도 많다. 대체로 너무 일찍 목적지에 도착해 버린다는 것이 그중 하나다.


지난 6월, 류블랴나에서 사라예보로 향하는 야간버스에 올랐다. 중간에 환승과 국경 심사를 해야 하는, 은근 부담스럽고 번거로운 여정이었다. 자정쯤 보스니아 국경을 무사히 넘은 후 긴장이 풀려 정신없이 잠에 빠져있을 때쯤 버스가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낮은 하늘에 어슴푸레한 여명이 슬그머니 올라오고 있었지만 아직 대부분의 풍경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6월 초입의 새벽 공기는 아직 꽤 쌀쌀했다. 티셔츠에 카디건에 바람막이까지 입을 수 있는 건 다 껴입었지만 피부에 닿는 차가운 공기를 다 막을 순 없었다. 거리의 상점이 다 문을 닫은 새벽시간인 데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마땅히 들어갈 곳도 없었다. 호스텔이 열리기까지는 다섯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다. 심지어 역의 대합실도 열리기 전이어서 그저 기차역 출입문 앞 복도 바닥에 배낭을 깔고 앉아 도시가 깨어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대합실 옆 조그마한 간이 창구에는 새벽 차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고, 그래서 잠들기도 애매한 분위기였다. 핸드폰을 하려 해도 와이파이가 시원찮고, 데이터는 아껴야 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이었다. 그나마 나랑 같은 버스를 탔던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나처럼 후줄근한 몰골로 여기저기에 앉아 있다는 점이 은근한 위안과 더불어 내적 친밀감을 주었다.


서로 대화는 않더라도 그 사람들과 있으면 햇볕이 따뜻해질 8시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7시가 가까워지자 한 명 두 명 엉덩이에 깔았던 배낭을 어깨에 둘러메고 역 밖으로 휘적휘적 나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남은 사람이 나밖에 남지 않았다. 기차역은 갈수록 더 북적거렸고, 더 이상 앉아있기 민망했던 나는 아무런 대책 없이 무작정 배낭을 메고 역을 나섰다. 바깥 하늘은 그새 환해졌지만 아직 그늘이 있는 곳에는 새벽의 차가움이 머물고 있었다. 지도를 대충 보니 도시에 작은 강이 있는 것 같았다. 일단 강가에 가면 앉을 공간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늘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하늘에 따뜻한 빛깔이 감도는 이른 아침은 평화로웠다. 도로에 차들도 얼마 없고, 건물 안에서도 새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실개천 같은 강가에서는 간혹 조깅하거나 산책하는 사람과 마주치곤 했지만, 작은 물소리와 새소리가 또렷이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주위의 풍경이 삭막한 콘크리트에서 유럽풍의 아기자기함으로 변해갈 무렵, 햇볕은 새벽이 물러간 자리에 남은 추위의 흔적을 다 말려버리려는 듯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도심과 제법 가까워졌음에도 여전히 들어갈 만한 곳을 찾지 못했던 나는 나무그늘이 반쯤 걸쳐진 벤치에 걸터앉았다. 여유로운 일요일 아침의 표본이었지만 그때 느꼈던 감정은 오히려 조급함이었다. 조급함은 지금 당장 목표에 다다르지 못할 때 생긴다. 느긋하게 호스텔이 열리는 시간이 되길 기다리기엔 남은 시간은 너무 길었고, 지루함은 너무 컸다. 출출해서 줄곧 배낭에 넣고 다니기만 하던 과자를 꺼내다가 부스러기를 다 흘려버려 한바탕 배낭과 옷가지와 벤치를 다 털어내는 난리를 벌이기도 했지만 그런 이벤트도 잠시뿐이었다. 그저 멍하니 강변을 바라보며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6년 전 아비뇽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밤새 달린 버스가 아비뇽에 도착했을 때는 배터리가 거의 남지 않은 상태였다. 겨우 길을 찾는 데 쓸 수 있을 만큼만 남아 있어서 얼른 아비뇽까지 가는 길을 지도로 검색하고 방향을 대충 외운 후 바로 전원을 껐다. 버스가 나를 내려준 곳이 마을과 꽤 떨어져 있는 도롯가 공터였다. 내 첫 배낭여행의 첫 해외 소도시 여행이어서 인적 드문 새벽에 인도도 없는 도로를 따라 걷는 것은 은근히 겁나는 일이었다. 다행히 아비뇽의 성벽은 생각보다 빨리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때부터는 붕 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이 되기 시작되었다. 그러던 중 내 앞에 고대 로마의 다리, 생베네제 다리(Pont d’avignon)가 나타났다. 오래된 석조 다리는 은은한 아침 햇살을 받아 잔잔히 빛나고 있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관광객은 물론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 자체가 드물어 강변 부근은 고즈넉했다. 반짝이는 강물 위로 고고히 떠있는 다리의 자태는 왠지 모르게 감동적이었다. 마침 다리가 잘 보이는 강가에 적당한 바위가 보여, 그 위에 배낭을 풀고 앉았다. 가만히 다리를 보고 있자니 배터리가 없어 사진을 못 찍는 게 너무 아쉬웠다. 그때 배낭에 빈 드로잉 노트가 들어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공책을 꺼냈다. 평소 ‘오늘은 그려야지’, ‘내일은 꼭 그려야지…’ 항상 생각하지만, 막상 책상에 앉아 노트를 꺼내어 그리는 과정까지가 너무 번거롭기도 하고 아무도 보지 않을 것임에도 잘 그려야 한다는 압박감이 은은하게 내재되어 있어서 쉽사리 그림을 시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연고 없는 도시에서 갈 곳이 없는 아침시간은 내게서 그 장벽을 가려주었다. 그림을 그리거나 작업을 할 때 특히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내게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는 점도 선뜻 노트를 펼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입시미술을 졸업한 순간부터 연필을 거의 놓다시피 했어서 처음 선을 그리는 감각이 어색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다리의 모습을 그려나갔다. 낡은 벽돌의 질감을 따라 선을 긋고, 어둠을 칠했다. 결과물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집중해서 종이에 연필선들을 남기는 과정들은 조금씩 나를 깨웠다. 그림과 함께 내 안에서 흐릿해져 가던 내 일부가 점점 선명해졌다. 정체성이 살아나는 과정이었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했다. 잘 그리고 말고는 생각보다 중요치 않았다.


그날 이후, 그 여행에서 틈만 나면 노트와 연필을 꺼내 그림을 그렸었다. 그냥 눈앞에 그리고 싶은 풍경이 나타나면 멈춰 서서 그 모습을 노트에 새겼다. 몇 번을 하고 나서는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게 됐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지워져 가던 자신감과 열정도 되살아났다. 이 참에 여행이 끝나도 계속 그림 그리는 습관을 이어나가자는 다짐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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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9일, 아비뇽에서 / 2019년 6월 11일, 카르카손에서


그 시절을 떠올리며 가방을 열고 공책을 꺼내 들었다. 첫 배낭여행 이후 어딜 가든 꼬박꼬박 종이 노트를 들고 다니는 습관은 유지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진득하게 보고 그림 그리는 습관을 이어나가자는 다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중간에 몇 번인가 그림과 친해지는 시기도 있었지만, 사라예보에 도착했을 때는 또다시 종이에 그리는 그림과는 어색한 사이가 되어있던 시기였다. 사라예보 이전의 도시들에서 몇 번인가 저녁 시간에 일부러 그림을 그려보려 하기도 했지만, 그전까지는 안 하던 스트레칭을 몇 년 만에 하는 것처럼 선들이 삐걱거리기만 해서 몇 번 낙서를 시도하다가 노트를 덮곤 했다. 하지만 갈 곳 없이 지루한 아침의 넘쳐흐르는 시간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낙서를 가능하게 했다. 처음엔 선 긋는 것조차 어색해서 이상한 형태만 그려졌다. 그러다 등 뒤에 서있는 나무에 얼기설기 자란 가지와 이파리들이 보였다. 보이는 대로 나무를 그렸다. 하나를 끝까지 붙잡고 완성할 지구력은 아직 없었지만, 그리던 중 힘이 빠지면 주제를 바꿔서 다시 그렸다. 배낭에 달린 카라비너를, 밴치 밑에 핀 들꽃을, 그것들을 그리는 내 손을 그렸다. 그러다 보니 내가 좋아하던, 그림이 있어서 충만하다는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때 그린 그림은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 위한 것 이상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서서히 잊히던 내 모습을 되살려내는 과정이었다.


IMG_2837.jpg 2025년 6월 1일 사라예보에서


빈 시간을 어떻게 채우는지를 관찰하는 것은 그 사람을 정의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 바쁘게 움직이는 현대 도시의 분위기는, 그 속에서 멈춰있는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뭐든 해야 할 것 같다’는 강박이 내면에 자리 잡고, 그 강박은 빈 시간을 내버려 두지 못한 채 온갖 것들로 채우게 만든다. 그 온갖 것들에는 종종 목적 없이 쇼츠 돌려보기와 같은 엉뚱한 것들까지 끼어들곤 한다.


때때로 사람의 내면은 우주에 빗대어진다. 사람이 우주라면, 사람을 구성하는 것의 대부분은 스스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암흑물질일 것이다. 하지만 바쁜 틈 속에서는 우주의 별빛처럼, 혹은 해가 진 후에도 환한 사무실처럼 밝혀진 영역만을 돌아보기에도 벅차다. 반면, 지루한 시간은 평소에 눈길이 닿지 않던 내면의 암흑물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깊은 여유를 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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