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고 쓴 글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미래를 기억해 현재를 구한다

by 황의현
8954680003_1.jpg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문학동네, 2022


이 책의 글은 소설이되 소설로만은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분명히 서사가 존재하기에 소설이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삶에 관해 글쓴이가 생각한 것을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 말하는, 서사가 있는 에세이처럼 읽히기도 한다.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서사보다는 글쓴이의 생각이 이야기들의 축을 이룬다.


소설 속 인물들은 비슷한 질문에 마주한다. 미래가 암담해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금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현재를 어떻게 버텨내야 할까. 이 상실의 고통을 무엇으로 달래야 할까.


김연수는 흥미로운 답을 제시한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대신에 기억하자는 것.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기억할 수 있는 대상은 지나간 과거이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어떻게 기억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소설 속 한 인물에 따르면 바로 미래를 상상할 수 없고 기억할 수 없다는 생각이야말로 인간 비극의 근원이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29쪽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내린 답은, 미래의 모습과 형태를 '망했다'라고 예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암담한 현실 속에 있어도 다른 모습과 형태의 미래를,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을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다. 적어도 과거에 어떤 미래를 꿈꾸었는지 기억하려는 시도마저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럴 능력과 의지가 버팀목이 될 때 '세컨드 윈드'(<난주의 바다 앞에서>)가 불어 와 새로운 삶이 오기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거센 모래 폭풍이라도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것(<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불어온 모래 폭풍도 버틸 용기를 얻을 수 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사랑의 단상: 2014」, 211쪽



이 소설에서 기억은 강한 힘을 가진다. 기억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 우리가 서로 확연하게 다르다고 인식하는 세 시간대를 연결한다. 기억을 통해 끝나 버린 사랑을, 세상을 떠난 사람을 현재에 붙들고 미래에 연결한다. 사랑했다는 기억을 품음으로써 사랑하는 법을 잊지 않는다(사랑의 단상: 2014). 한 사람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의 영역을 다른 사람의 기억을 통해 확장한다(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235쪽). 때로는 나도 남겼는지 모르는 과거가 누군가를 살린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현재란 곧 과거의 기억이 쌓이고 구성되어 이루어진 것이므로, 과거를 기억하겠다는 것은 현재를 놓지 않으며 미래를 계속 이어가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과거에 꿈꾸었던 밝은, 적어도 평범했던 미래를 어떻게든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를.


'기억'은 '과거'와는 다르다. 과거는 이미 일어난 일이고 돌이킬 수 없지만, 기억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선택해서 해석하고 남은 결과다. 과거가 상처를 남긴 것은 부정할 수 없어도, 그 상처를 어떻게 기억할지는 여전히 우리의 몫이다. 이렇게 기억은 과거의 굴레에서 현재를 해방할 수단이 된다. <진주의 결말>의 아버지가 말하듯이, 절망의 순간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 가운데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미래로 만들지 선택할 권리는 여전히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85-86쪽). 그리고 진주는 해방된다.


최진영의 단편집 <쓰게 될 것>(2024)에 실린 <인간의 쓸모>에는 유전자 공학의 결실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이미 결정된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유전자 공학의 혜택을 입지 못한 채 태어난, 따라서 앞으로 살아갈 삶이 어떤 모습일지 알지 모르는, 알고자 하지도 않는 이를 만난다. 그리고 깊은 상실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미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김연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의 절망을 근거로 미래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곧 미래를 상실하는 것이다. 미래를 상실했으니 현재도 의미를 잃는다. 그렇게 다다르는 곳은 비관의 막다른 길일 뿐이다.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가 과거에 상상했던 미래가 도래할 가능성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과거에 꿈꾸었던 미래가 어떤 형태인지를 기억할 능력과 의지를 잃지 않았다면 그런 미래를 만들 가능성 역시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현재에 충실하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지극히 당연한, 어찌 보면 뻔하디 뻔한 말이다. 그러나 그런 말이 정확히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해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작가의 능력이다. 작가가 제시한 답을 받아들일지는 독자의 몫이다. 나는 김연수가 내놓은 답이 모래폭풍을 헤쳐나가는 데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대전은 왜 노잼도시가 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