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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고 쓴 글

<그림자와 새벽>

알 수 없는 글을 읽는 법

by 황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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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와 새벽』

윤경희, 시간의흐름, 2023.


난해한, 알 듯 말 듯 하면서도 아무래도 모르겠는 책. 저자는 자신의 의도를 밝히는 여는 글도 책을 정리하는 닫는 글도 없는 책은 항상 수수께끼다. 저자는 한 권의 책을 쓰고 엮으며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이 책을 쓰며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제목이 말하는 "그림자와 새벽"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실 아무래도 좋은 것 아니었을까. 이 책은 시간의흐름 출판사가 기획한 '말들의 흐름'이라는 시리즈의 한 권으로, 이 시리즈는 한 저자가 두 낱말로 제목에 붙이면 다음 저자는 두 번째 낱말을 이어 받고 새 낱말을 붙여 제목을 달고, 그러면 다시 다른 저자가 앞선 책의 두 번째 낱말에 새 낱말을 이어 새로운 제목을 만드는, 출판사의 말대로 "열 권의 책으로 하는 끝말잇기 놀이"다. 『그림자와 새벽』은 이 시리즈의 일곱 번째 책인데 여섯 번째 책의 제목은 『농담과 그림자』고 여덟 번째 책의 제목은 『새벽과 음악』이다. 두 작가가 한 낱말을 두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 사이에서 어떤 화학반응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는 놀이다. 그 화학반응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쓰여지지 않은 문학으로서 책과 책 사이에 존재"하며, "이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잠재"한다고 한다. 애시당초 구체적이고 명확한 의도를 전달하기 위한 기획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면 이런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나 주제를 굳이 찾으려 들지 않고 그냥 문장 하나하나에서 나름의 의미를 건져내고, 도저히 읽히지 않는 문장은 흘려보내고, 그렇게 저자와 저자들이 자기들끼리의 화학반응을 하듯이 독자도 독자 나름대로 책과 각자 좋은 방식으로 화학반응을 하면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읽었다. 윤경희가 말한대로 "읽기는 사실상 강력하게 파괴적인 행위"(117쪽)이기에, 나는 텍스트를 내 마음대로, "읽어가며, 읽은 것을 잊어가며, 몇 편의 인상과 몇 개의 낱말만 남아, 감상과 숙고를 구실로 몇 줄을 오려 베끼며"(117쪽), 찢고 분해하고 파괴하고 재조립하며 읽었다. 그렇게 읽으니 독창적인 관점과 흥미로운 통찰이 보였다. 그러니 그렇게 얻어낸 통찰의 파편만 여기 몇 개 옮겨 본다.


조약돌과 글쓰기

어떤 사람(마녀가 되었든 여행자가 되었든 누구라도 좋다)이 너무 배가 고픈데 가진 것은 조약돌밖에 없어 꾀를 낸다. 그는 조약돌을 큰 단지에 넣고 수프를 끓이는 시늉을 한다.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조약돌로 수프를 끓이느냐고 묻자, 그는 재료 몇 개만 더 있으면 훌륭한 수프가 된다고 말하며 맛보고 싶으면 재료를 몇 개 더 가지고 오라고 한다. 궁금해진 사람들이 각기 하나씩 감자니 고구마니 야채니 등등 재료를 가져오고, 그렇게 조약돌로 시작해 진짜 음식이 들어간 수프가 만들어진다.


윤경희는 이 이야기에서 글 쓰는 방법을 발견한다. 글감이란 조약돌과 같아서, 그 하나만으로는 아직 아무 글도 되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조약돌 하나가 수프가 되듯이, 글도 무엇이라 정확히 지칭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실체, 어떤 감각, 어떤 의도에서 시작된다. 중요한 것은 일단 조약돌을 단지에 넣듯이, 자기의 삶, 존재, 생각하고 말하고자 하는 무언가에 직결되는 낱말 하나를 던지는 것이다. 그 낱말에 다른 낱말이 붙어 문장이 되고 문단이 되고 결국에는 글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쓰인 글이 쓴 이의 허기와 갈망과 욕구를 달랜다.


윤경희는 더 나아가 조약돌과 수프 이야기에서 무엇이 좋은 글인지 알아낸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재료를 가져온 사람 모두와 수프를 나눠 먹듯이, 조약돌에서 시작된 글도 글쓴이의 허기만을 달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읽는 이에게도 온기와 즐거움을 나누어줄 때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글쓰기도 세상과 독자에 말을 거는 행위다. 지하철에서 외치는 누구도 듣지 않을 선언이나 호소나 구호가 소음일 뿐이듯이, 독자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소리치는 글도 글이 아니라 눈을 피로하게 만들 무늬일 뿐이다. 이것이 이 책을 부수어 내가 얻은 첫 번째 파편이다.


경험과 기억의 간격

윤경희는 인간이 시력으로 사물을 지각하는 행위를 깊게 파고들어, 우리가 무언가를 보는 행위가 사실은 극히 짧은 시차를 두고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즉 어떤 사물을 보는 행위는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다. 사물에서 반사되는 빛이 우리 눈으로 향하고, 눈에서 그 빛이 어떤 형태로 구현되고, 그렇게 구현된 형태가 시신경을 통해 뇌에 전달되고, 그렇게 전달된 형태가 뇌에서 정보로 처리되는 그 과정에는 극히 짧다고 하더라도 간격이 존재한다. 시각을 통한 인식은 시차를 두고 이루어지는 현상인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감각, 인식, 경험 모두 시차가 존재하는 현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차를 인지하지 못한다. 인지할 때는 극복하려고 한다. 기억과 이야기가 바로 시차를 극복하려는 행위다. 기억과 이야기를 통해 어떤 경험을 함께 겪고 공유한 사람들이 그 경험을 지키고 유지한다. 물론 기억과 이야기는 경험을 왜곡한다. 경험은 온전히 보존되거나 전달되지 못한다. 순간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보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억과 이야기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행위다.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는 행위이지만, 그래도 인간은 한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맞서 싸우는 이 행위에는 어떤 영웅적인 장엄함이 있다. 어떤 비극을, 누군가의 죽음을 잊지 않겠다는 선언에서 우리가 느끼기도 하는 벅차오름은 아마 이런 장엄함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시각적 인식을 깊게 생각해 기억과 이야기의 숭고함으로 이어지는 이 흐름이 인상 깊었다.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건진 두 번째 파편이다.


새벽과 아침의 위계

윤경희는 마르그리트 뒤라스라는 사람의 <음화의 손>이라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어떤 영화고 하니 한밤중의 도시를 찍은 장면이 그냥 재생되는 영화다. 한밤중의 모습을 찍었으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간혹 보이는 것은 어젯밤에 사람들이 즐기고 남긴 쓰레기 뿐이다. 그러다가 어느새 해가 뜨기 시작하며 새벽이 온다. 그러자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어젯밤 쓰레기를 남긴 사람들이 아니다. 프랑스의 이주 노동자들,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새벽의 어스름한 빛 아래에서 쓰레기를 치우고, 아침이 밝아올 때 사라진다. 아침이 되면 이제 파리의 '진짜' 주인공들, 파리의 '주인'들, '파리지앵'들이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아마도 쓰레기도 남기며.


이렇게 윤경희와 뒤라스는 새벽이 보이지 않는 유색인 이주 노동자의 시간, 아침은 서구 심장부의 도시를 지배하는 식민지 백인의 시간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새벽과 아침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를, 그 위계 뒤에 숨겨진 제국주의의 역사를, 이주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시간대에 머무르는 정치적 현상을 발견한다. 흥미롭고 예리한 관찰이다. 이것이 이 책에서 건진 세 번째 파편이다.


완전하지 않은 언어로 쓰고 읽기

글을 쓰다보면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과 감상을 표현할 단어와 표현을 찾지 못해 막막함을 경험하곤 한다. 아무리 쓰고 고치고 지우고 다시 써봐도 생각을 그대로 전달할 말을 찾지 못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곤 한다. 윤경희가 말하듯이 "글쓰기는 언어의 구멍과 심연의 윤곽을 더듬어 그리는 작업"(91쪽)이다. 결국 모든 글쓰기는 완전하지 않다. 이미 쓰이는 단계에서부터 저자의 의도와 생각은 훼손되고 왜곡되고 불완전해진다. 그러니 모든 글에는 언어가 포착하지 못하고 담아내지 못하는 맹점(盲點)이 있다. 글 곳곳에는 저자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해 비어있는 지점이 있다. 독자는 그렇게 비어 있는 지점을 제멋대로 상상해 채워가며 읽는다. 이미 쓰이는 단계에서 왜곡되고 결여된 의미는 읽는 단계에서 또다시 왜곡되고 결여된다. "읽기는 사실상 강력하게 파괴적인 행위"가 된다.


그래서 윤경희는 말한다. "나는 맹점을 읽는다. 또는 읽지 않는다."(91쪽) 나는 윤경희의 글을 읽었다. 또는 읽지 않았다. 윤경희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읽었다.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읽지 않았다. 윤경희가 전하지 못한 의미를 읽었다. 전하지 못한 의미를 읽지 못했다. 윤경희가 생각하지 않았던 의미를 읽었다. 생각하지 않았던 의미를 읽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부수어 얻은 네 번째 파편이다.


자연의 귀환


관상은 거리를 전제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을 자신하는 행위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이 자의적으로 설정한 거리를 모른다. 자연은 아무리 축소되고 길들여졌을지라도, 일말의 생명력을 간직한 한, 인간이 자연을 제거한 토대 위에 짓고 지키려는 생활권으로 들어오려 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자연의 귀환은 급습, 침범, 잠입 같은 무법의 사건으로, 혹은 선물을 동반한 방문 같은 우호적인 만남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자연으로서는 본래 그것 자신이었던 장소를 탈환하는 것이며 본래 그것 자신이었던 성질을 복원하는 것일 뿐이다.

『그림자와 새벽』, 99쪽.


이 부분을 읽으며 책상 앞에 둔 화분들을 보았다. 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놓여진 화분들. 내가 통제하는 화분들. 내가 통제하는 자연의 일부분. 식물 일부가 담긴 화분을 방에 가져다 둠으로써 나는 내가 인간임을 증명한다. 이 책에서 얻은 다섯 번째 파편이다.


알 수 없는 글을 읽었다고 말한 뒤 그 글에서 얻어낸 것을 이렇게 풀어보니, 꽤나 많은 것을 얻어낸 것 같다. 읽을 때는 아리송하더니 꽤나 재미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아마 내가 직접 골라서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독립서점에서 블라인드북으로 산 책이었다. 포장을 뜯어보고서야 이 책인 것을 알았고, 이왕 내 손에 들어왔으니 읽은 책이었다.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러니 아마 또 독립서점에서 봉투로 싸인 책을 보면 도전해보려 할 것 같다. 책 그만 사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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