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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나, <두고 온 여름>

행복과 슬픔도 모두 과거에 두고

by 황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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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여름』

성해나, 창비, 2023.


소설 전반에 긴장이 감돈다. 관계가 파국에 다다르기 전, 갈등이 폭발하기 전 숨 막히는 긴장이 아니라, 상대의 존재에 느끼는 거부감과 내가 거부감을 품고 있다는 것을 상대도 알고 있다는 죄책감과 그럼에도 내게 다가오는 상대를 보며 나의 불편함이 썩 타당하지는 않다는 죄책감 등 어색하지만 참고 견뎌야 하는 관계에서 생겨날 수 있는 모든 숨 막히는 감정들이 소설을 관통한다. 그 감정들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모르기에 생겨나는 긴장이 독자에게 전해진다. 그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어서 독자도 불편함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관계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토대는 노력이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온전하게 소통하고 이해하는 일은 좀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오해와 오류와 부정확함과 불확실함이 뒤따른다. 극복할 수 없는 소통의 장애를 보완하는 것은 노력이다. 진심을 전하려는 상대의 노력을 이해하고 인정하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인간의 노력은 한정된 재화다. 모든 관계가 전력을 기울여 유지할 만큼 가치가 있고 중요하지는 않다. 사회생활 도중에 잠깐 스쳐간 타인에게까지 진심 어린 노력을 다할 필요는 없다. 그럴 때는 적당히 위장된 예의도 충분하다. 예의라는 합의가 존재하기에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관계를 최대한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선에서 유지하면서도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가족이라는, 인간의 가장 밀접하고 내밀한 관계에 타자가 침투할 때다. 이 소설의 긴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여전히 타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어느 날 나의 가족이 되어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를 맺어야 하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가족이 되었으니 가족처럼 지내고자 하는 정당한 노력과 이름만 가족이지 아무런 정도 없는 사람에게 느끼는 정당한 거부감이 충돌한다. 어색하게라도 아우르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그 노력에 거부감밖에 느끼지 못하는 자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내 노력을 몰라주나. 굳이 저렇게까지 다가와야 하나. 그래도 모두가 선한 이들이라 노골적으로 상대를 모멸하지는 않는다. 상대를 이해하는지 못하는 것까지는 아닌데 이해가 포용하는 선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이해와 불편함이 섞인 모호한 감정이 소설을 움직인다. 살아왔다면 누구든 느껴봤을 감정이. 살아간다면 누구든 느끼곤 하는 감정이. 분명 가까이 있는 데도 "내가 쫓을 수도 없을 만큼 멀리 있는 것처럼"(34쪽) 느껴지는 감정이.


소설 후반부에서 시점은 현재로 이동한다. 주인공들은 앞날이 흐릿한 상황에 놓여 있다. 살아보려는 노력은 잘 풀리지 않았고 가족을 꾸리고 생계를 이어가려는 노력은 실패했다. 그런 와중에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던 관계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제 먼저 다가가려는 쪽은 과거에는 거부했던 쪽이다. 과거에는 먼저 다가가려고 했던 쪽이 이제는 상대의 다가옴을 반기지 않는다. 상대가 "한 번쯤은 더 만나도 좋을 사람"(98쪽)이기 때문이다. 지금보다는 행복하고 평온했던 과거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일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지른 잘못에 사과하려는 욕망은 자신을 위한 욕망이면서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책임감은 잃지 않았다는 뜻이다. 등장인물은 관계에는 미숙할지언정 사람이기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과거의 모든 잘못과 불화가 해소되는 극적인 장면은 없다. 우리 삶의 관계란 그렇게 쉽게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파탄난 관계를 이어가려는 노력이 만들어내는 어색함과 불편함과 거북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소설의 주제는 변함없이 다가가려고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어색함, 다가옴을 부담으로 느끼는 불편함. 두 감정 사이의 긴장이다.


그럼에도 둘을 연결하는 토대가 있으니, 두고 온 과거에 대한 기억이다. 이제는 모조리 산산조각 난, 무너진, 사라진, 붕괴한 과거.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시절, 과거의 따뜻했던 찰나, 순간, 편린. 모질지만은 않았던 과거가 있었기에 상대의 노력을 거부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노력을 거부한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도 생기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 과거를 저곳에 둔 채 떠났고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관계를 맺을 기회도 과거와 함께 사라졌다. 남은 것은 다시 반복, 불가능한 관계를 이어가려는 무의미한 노력이 만드는 긴장뿐이다. 그 관계의 흔적은 "어딘가 숨어 있다 불현듯 나타나 기어이 마음을 헤집어 놓는 것들"이며, "이편에서 왔다가 저편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것"(88쪽)들처럼 껍데기만 남은 것뿐이다.


불편함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썼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내가 불쾌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색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불편함은 불쾌함과는 다르다. 그것은 실로 복잡 미묘한 감정이다. 이해하고 다가가고 포용하려는 노력에 애틋해하고 그렇게 노력하는데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현실에 안타까워하고 기회는 놓치면 영영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데서 오는 후회하는 감정이다. 사람이 살면서 느끼고는 하는, 한 단어로 쉽게 정의되지 않는 복잡한 감정.


그러나 그런 감정조차 느낄 기회가 없다면 회복의 가능성도 영영 없는 것이다. 소설은 결말에서 희미하게나마 회복의 가능성을 내비친다. 회복되는 것은 관계 그 자체가 아니라 관계에서 상처를 받았던 마음이다. 행복을 과거에 두고 왔다면, 불행과 슬픔도 두고 올 수 있다. 사진에는 "버티지 못하고 놓아버린 것들, 가중한 책임을 이기지 못해 도망쳐버린 것들"(88쪽)은 남지 않듯이, 행복하게 웃는 얼굴만 남아 있듯이, "우리 삶에서 가장 돌아가고 싶은 한순간"이기도 했었으니까(89쪽). 두고 온 과거가 그렇게 아픔의 이유도 치유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PS.

요즈음 성해나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혼모노>이지만, 나는 <두고 온 여름>이 처음으로 읽은 성해나의 글이었다. 이런 글을 쓴 사람이 대체 무엇을 썼길래 <혼모노>가 그렇게 난리가 났던 걸까. 빨리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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