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레슬링 PWS 평택 경기 관전기

못 갖춤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쾌함

by 가장귀해하고

프로라는 화려한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게 경기장은 흙먼지가 날리는 시골길 한 가운데, 식자재마트 맞은 편에 있었다. PWS라는 프로레슬링 신생 단체인데, 근처 미군 부대를 감안한 건지 스튜디오가 경기도 평택에 있다. 하지만 관중의 8할은 초등학생과 그들의 부모님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몇 차례 경기를 본 프로 관객들로서, 선수들의 대립 관계를 다 파악하고 있고, 입장곡, 챈트(응원구호)들을 꿰고 있었다. 보라색 머리띠를 예쁘게 한 작은 여자 아이가 거구의 악역 레슬러를 향해 거칠게 야유를 날리는 이질적인 분위기가 완성도 높은 엔터테인먼트임을 짐작하게 했다.

어느 무명 레슬러


PWS 이전에 프로레슬링 경기를 직관한 건 10여 년 전이 마지막이다. 우리나라 프로레슬링의 레전드 이왕표 선수의 은퇴식이었다. 밥샙이라는 거물급 게스트도 섭외했고, 특히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프로레슬링 관람 기회이기에 들뜬 마음을 안고 갔다. 하지만 WWE로 대표되는 미국식 엔터테인먼트의 화려함을 기대했던 입장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를 기리는 경기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선수들은 노쇠해서 동작이 굼뜨고 합이 잘 맞지 않았다. 조명이나 무대연출 역시 무료 경기의 한계인지 조악함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한국적인 장면도 있었다. 치고 받던 악역들이 갑자기 도열해서 챔피언의 은퇴 소감을 경청하고, 스폰서 회장이나 지역 유지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던 것이다. 잠시 뇌를 내려놓고 원초적 유희를 즐기리라고 기대했는데, 현실의 쓰디쓴 질서가 환기되고 말았다. 같이 간 동료는 헛웃음을 지었고, 뒤에서 혀를 차는 소리도 더러 들렸다.

그런데 그날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사람은 챔피언 이왕표나 전기톱 들고 나타난 밥샙도 아니고,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어느 무명 외국 레슬러였다. 기대에 못 미치는 구성으로 인해 경기장 전반의 분위기가 식고 있을 무렵에 그 레슬러는 혼신의 힘을 다해 과잉 연기를 펼쳤다. 미국식 프로레슬링처럼 한 대 맞으면 두 바퀴를 뒤로 굴러버리는 정도까진 아니어도, 타격을 받으면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2층 관객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한껏 크고 과장되게 표현했다. 공격할 때도 정의를 꼭 구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느껴질 만큼 동작이 힘찼다. 이날 경기의 실망감과 시무룩함에도 불구하고 그 선수의 액션만큼은 또렷이 각인되었다. 귀가하는 차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저 선수는 진짜다.


가짜와 못 갖춤


무언가가 엇나가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일 때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그 경기에서 몰입 못 하고 무안함에 진땀 빼던 레슬러처럼 스스로 느껴질 때가 있다. 친구들이나 동료들은 가정 얘기, 집 얘기, 승진 얘기에 합을 맞추며 웃는데, 못 갖춘 나는 허우적대기도 한다. 당황한 레슬러는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다. 관객들은 약속된 환호가 아니라 한숨 짓는 것 같아 신경 쓰인다. 나는 애써 결핍을 얼버무려 감추고, 불편하게 자리를 회피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는 자신의 그런 못 갖춤을 비웃고 있는 냉소적인 관객이 된다.


그런데 가짜를 만드는 건 못 갖춤 자체가 아니라 못 갖춤을 견디지 못하는 태도다. 위작, 가짜뉴스 등은 원본의 권위를 빌리려 자신의 결함을 숨기려 한다. 하지만 프로레슬링은 굳이 격투기인 척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주인공 레슬러를 마주했을 때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공포를 느낀 듯 표정 짓는 악역 레슬러와 ‘쫄? 쫄?’을 폭발적으로 연호하는 어린 관객들 사이에 있으면, 못 갖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한 선수가 합을 틀려서 선수와 관객들이 순간 서로 머쓱해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기술을 멋지게 접수할 때 모두 유쾌하게 환호하면 그만이다. 조금 민망해하던 레슬러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폴(판정승)을 따내 동료와 손을 웅장하게 들어올린다. 믿으면 믿어진다.


진짜 프로레슬링


PWS 경기가 끝나고 일사분란하게 줄을 서고, 관계자들은 접이식 의자를 정리하며 팬 사인회를 준비한다. 어린 관객들은 시호떡 부채를 들고 있다. 시호라는 악역 선수가 있는데, 시호떡이라는 야유 챈트가 있다. 왠지 미국식 야유인 suck을 적당히 잘 순화해서 차용한 것 같다. 어린 자녀와 함께 줄 선 어른들도 내심 흡족한 표정이다. 그들을 뒤로 하고 나오며 나는 진짜 프로레슬링을 봤다는 생각에 내심 만족스러웠다. 내일 아침에는 프로레슬러 커트 앵글의 입장곡을 틀어놓으며 당당히 출근해서 두 바퀴를 굴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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