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두아와 아비투스

by 가장귀해하고

최채우가 환기한 아비투스의 기억


넷플릭스 드라마 <레이디 두아>는 배우 신혜선과 아비투스라는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요소를 갖춘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팬인 주연의 뛰어난 연기와 추리를 해나가는 서사적 구성이 극적 긴장감을 형성한다. 욕망을 쫓던 주인공의 흥망성쇠 구조가 굉장히 현대적인 <스카페이스>인 것 같다고 느껴 흥미롭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극중에서 꽂힌 부분은 배종옥 배우가 아비투스를 다루는 내용이었다.

아비투스는 문화적 자본이라고도 번역한다. 부르디외가 주장한 이 개념은 계층마다 생활 방식, 사고 방식, 태도 등이 다르기 때문에 명시적인 계급이 없어도 신분 또는 계층이 구분이 된다고 전제한다. 극 중에서 사라 킴의 졸부 친구 정여진은 백화점 회장 최채우(배종옥)를 보고 인사하려 하는데, 최채우는 그런 졸부와 자신들이 어떻게 다른지 선을 그으며 망신을 준다. 그 장면에서 최채우는 갑자기 다큐멘터리 스토리텔러가 된 듯 친절하게 아비투스를 설명해준다.


대학교 교육학 시간에 처음 이 개념을 접하고 뒤통수가 얼얼했었다. 나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움을 넘어 당연한 일들이 누군가에겐 완전히 접근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가령, 식사는 경제적 하위층에겐 ‘많이 먹는 것’, 중산층에겐 ‘맛있게 먹는 것’, 상위층에겐 ‘보기 좋은 식사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자란 농촌 마을에선 많이 먹으라고 인사하고, 할머니는 먹거리가 다양하지 않은 그곳에서 항상 뭘 더 챙겨주려고 하셨던 듯하다. 물론 아비투스는 단순히 동시대 계층으로만 구분할 순 없고, 생활 환경과 집단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요새 아이들은 인스타에 예쁘게 플레이팅한 식사를 올리니, 농촌 사람들의 아비투스와는 크게 다른 셈이다.


살면서 이런 아비투스의 차이를 실감할 기회는 의외로 그다지 많지 않다. 보통은 동질적인 집단에서 지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 아비투스의 차이를 제대로 경험해 볼 기회가 있었는데, 바로 모든 사람을 한 무리에 넣는 군대였다. 도서 <계층 이동의 사다리>에서는 세상의 반경은 하위층에겐 ‘동네’, 중산층에겐 ‘국가’, 상위층에겐 ‘세계’라 말한다. 공군이라 그런지 유독 유학파가 많았는데, 사우디에서 고등학교를 나와서 우리나라에서 대학을 다니고 홍콩에 취업 예정이라는 말에 그때는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다. 아비투스로 보면 그만큼 나와 그 사람은 지도가 달랐던 것이다. 반면, 고등학교와 지역에 소동을 일으키는 꾸러기 친구들은 항상 동네 수호대를 결성하는 걸 관찰했었다. 세상의 끝까지 갔는데 알고 보니 오행산 부처님 손바닥이었던 손오공처럼, 자기 세상의 끝은 사실 아비투스마다 달랐던 것이다.


부끄러움과 정체성


사회인이 되면서 마주하게 되는 아비투스의 차이는 일종의 수치심 내지 열등감을 유발했던 듯하다. 하다못해 (말로만 주문하던 시절의) 서브웨이, 빕스조차도 이용법을 잘 몰라서 식은 땀 나며 당황했던 기억이 나는데, 계층, 출신 또는 열악한 경험의 차이는 말해 무엇하랴. <계층 이동의 사다리>에 따르면, 유머 코드도 계층마다 차이가 나는데 상위층의 유머는 주로 격식과 에티켓을 어긴 것을 비웃는다고 한다. 영화 <버닝>에서 부자들이 해미(전종서)의 말을 그냥 들어주기만 하는 장면에서도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모두가 똑같이 교복을 입고 수능을 준비하던 고등학생이었다가, 사회인이 되자 밥을 먹는 일상도 다르다는 간극을 느꼈을 때 정체성의 혼란과 주눅듦으로 방황했던 듯하다.


그럼에도 아비투스 개념를 이해하는 건 결국 개인의 뿌리를 긍정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자란 시골은 항상 나누는 걸 미덕으로 했다. 단순 물질뿐 아니라 노동이든 도움이든 상부상조를 중시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정반대 방향으로 간다는 할아버지를 차에 태워서 내려다주던 걸 보고 의아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책에 의하면 이처럼 경제적 ‘하위층’은 모으는 것보다 나누는 걸 중시한다고 한다. 그래야 다음 어려울 적에 이웃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궁핍한 공동체 역시 나눔으로써 곤궁한 생활을 지탱했던 것이다. 그러니 재산의 구분이 더 강한 귀농인이 시골 문화를 텃세라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닐 테다. 나 역시 사회초년생이 되고 나서, 돈은 아끼기만 할 게 아니라 투자를 해야 한다는 걸 가르쳐주지 않은 부모님의 경제적 관념의 결핍을 원망했었다. 하지만 아비투스로 보면 그저 무지하고 늦은 게 아니라, 환경에 따라 당신들의 가치를 추구하고 배려와 나눔을 실현했을 따름이었다.


인물의 말을 빌려 아비투스를 설명한 <레이디 두아>도 결국 그러한 계층의 상징과 신호들이 허영이고, 그걸 부추기는 사회가 부조리하다는 걸 폭로한다. 애초의 명품의 세계에서 동떨어져서 사는 나는 그 폭로가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또 누군가에겐 공감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아비투스를 배격할 필요는 없고, 인지만 해도 충분할 듯하다. 허위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인간사의 ‘상징’이니 말이다. 아무튼 흥미로운 소재와 쫀득한 구성이 돋보였고, 배우 신혜선은 역시 최고의 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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