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되는 글쓰기

아무도 안 읽는 곳에 글 올리는 병장과 그걸 또 읽고 있던 어떤 중사

by 가장귀해하고

벌써 민방위도 다 끝난 나이지만, 공군 병사 시절의 글쓰기만큼 여운이 남는 피드백을 받아본 적이 없다. 당시 공군 부대에는 내부망(인트라넷)에 독후감을 쓰면 점수를 주는데, 그걸 모아 포상 휴가를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나 역시 휴가에 목마른 군인 중 한 사람이었기에 부지런히 독후감을 올렸다. 그때 웹상의 글쓰기가 얼마나 카피에 취약한지도 경험할 수 있었다. 휴가는 간절하지만 글쓰기는 어려운 병사들이 직접 쓰지 않고 남의 독후감 그대로 붙여넣는 일이 횡행했던 것이다. 내 독후감도 검색해보니 누군가 1문단만 빼고 나머지는 복붙으로 가져간 걸 찾은 적이 있다. 그렇게 내 독후감 도둑을 찾기 쉬웠던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거의 안 올리는 책에 관한 독후감을 올렸었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일본 역사소설 <대망>인데, 한 권에 700~1000p나 되는 책이 32권이나 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단일 작품은 아니고 여러 대하 소설을 엮어서 우리나라에서 한 번에 출간된 것이었다. 아무튼 방대한 양이었는데, 군대에 있기 때문에 읽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군대는 핸드폰도 없었고, 나도 군번도 꼬여서 리모콘 결정권이 없었기 때문에 생활관에 돌아오면 딱히 할 게 없었다. 그래서 미뤄왔던 책이나 실컷 읽어보자란 마음으로 대망 읽기 프로젝트를 자체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가뜩이나 분량도 많은데, 일본 역사 소설이라 주인공 이름이 자꾸 바뀌어서 읽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점호 이후 연등 시간을 비롯해 시간 날 때마다 읽었다. 부대 내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지만, 나만의 도전이었다.


그렇게 시리즈 한 권 한 권마다 독후감을 써서 올리다보니, 이미 독후감으로 받을 수 있는 포상 점수가 금방 한계에 도달했다. 하지만 방망이 깎는 노인마냥 자신만의 고집스러운 투쟁(?)에 빠진 병사에게 이미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어서 점수를 못 받는 시점에도 독후감은 계속 올렸다. 다른 말년병장들은 ‘말년’답게 한가로이 지낼 적에, 어떤 병장은 도깨비와 씨름하듯 자기만의 목표 달성에 매진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끝내 26권까지밖에 못 읽고 전역하게 되었다. 그리고 1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남은 6권을 여전히 읽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아버렸지만, 그 과정에서 예상과 달리 독서가 아닌 글쓰기의 기쁨을 알게 해준 사건이 있었다. 읽는 사람은 적고 올리는 사람은 많은 독후감 사이트에 여느 날처럼 올린 뒤, 쌓인 목록을 보고 뿌듯함을 느끼려 내가 올린 글을 검색했는데 댓글이 있었다. 다른 부대 중사님이 읽고 재밌다고, 다음 편도 또 올려달라고 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누가 장난 치는 건가 싶을 만큼, 애초에 그 플랫폼은 댓글이 달리는 경우가 거의, 아니 아예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발견될 거란 기대를 안 하고 있던 말년병장에게 그 댓글 하나는 마음에 예기치 못한 파동을 남겼다. 아무도 없는 산에서 허공을 향해 보낸 무전에 누군가가 답변한 듯한 놀라움을 느꼈다.


애초에 온라인 플랫폼에서 알지 못하는 독자와 소통한 것도 처음이었거니와, 그게 다른 곳도 아닌 군대라는 점에서 나에게 신선한 경험이었다. 전역하면서 가장 아쉬운 게 대망 프로젝트를 마치지 못한 것이고, 돌아보지 않고 떠나려다 신경 쓰인 게 그 일면식도 없는 독자가 될 정도로 엉뚱하게도 커다란 의미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때의 글쓰기와 호응이 특별했던 이유는 뭘까. 아마도 일개 병사로만 지내던 곳에서 내 글쓰기와 독서에 집중했던 것, 그리고 나만의 목소리를 빈 공간에 조용히 내고 있다가 우연히 발견된 기쁨 때문이 아니었을까.


전역하고 10년이 더 지났고, 그동안 내가 객식구가 아닌 주가 되는 직장에서 나름 내 목소리를 내며 지내왔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이 선사한 기쁨만큼의 감정을 느낀 적은 그리 많지 않다. 그때는 내 존재가 미약한 사회에서의 결핍을 채워준 경험이라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글쓰기로 소통한다는 경험은 사회적 성취와는 아예 다른 차원인 듯하다. 그래서 브런치를 시작하는 것도 그때의 사소하고 거대한 체험의 여파가 있다. 그 우연한 경험이 남긴 싹이 몇 년을 기다려 움튼 셈이다. 물론 브런치에는 카피 독후감 사이트와는 달리 너무나 뛰어난 필력과 경험을 가진 분들이 이미 많겠지만, 내 글에도 우연하고 엉뚱한 발견이 이뤄지길 바라면서 망망대해에 내 편지가 담긴 유리병을 띄우는 마음으로 글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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