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광체의 글쓰기

by 가장귀해하고


나이의 앞자리가 바뀐다는 건, 몇 년간 미뤄둔 자기 자각을 일시불로 체감하는 느낌이다. 난 그저 무빙워크에서 가만히 서 있었는데, 어느새 저만치 밀려난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곤 한다. 멀어져버린 학생 시절과 사회 초년생 시기를 떠올려 보면, 막연히 생각만 했던 것들을 이루기도 했고, 남들이 쉽게 하는 듯한 걸 끝내 가지지 못하기도 했다. 어떤 것에서는 열심히 살았다는 기분이 들며, 보람과 성취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지난 시간을 반추하다 보면, 뿌듯함과 동시에 결핍이 느껴지기도 한다. 목표 달성과 사회적 인정이 있더라도 그걸로 다른 한 모퉁이에 자리 잡은 결핍을 채울 수는 없다.


직장은 내 정체성의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곳에서의 인정과 성취만으로는 그 공허를 채울 수 없다. 어떨 때는 달리는 차를 뒤쫓은 강아지마냥 외적 성취와 문제 해결을 위해 전력질주 해볼까 싶다가도, 불쑥 찾아오는 허전함이 나를 주저하게 한다. 단순히 보상 체계가 만족스럽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일상에도 분명 성취감과 유대감이 있지만, 텅 빈 집에 돌아오면 공허를 마주하게 된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짧은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균형을 놓쳐놓고 후회하는 건 아닌지.


그렇다고 어느 오락 영화의 안일한 접근처럼 일을 던져두고 그리 끌리지도 않는 예능 같은 것에 갑작스레 전향할 수도 없다. 오히려 어떤 이들은 더욱 경력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걸 보면서, 나의 공허가 나태함의 탓은 아닐까라는 우려도 든다. 어릴 적엔 신기하고 새삼스레 감탄이었던 것도 반복되면서 무료해진 거라면, 남들 하듯이 도전하고 성장해서 영향력을 넓혀가는 길을 택해야 할 것 같은 보편적으로 많이 가는 길이 주는 안정감이 유혹한다. 성장을 회피하며 개인적인 즐거움을 찾다가 혹시라도 나중에 후회해버리면 어떡하나. 숲 속의 두 갈래 길 중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가 나중에 한숨만 쉬는 우를 지금 범하고 있는 거라면?


그러던 차에 대통령 연설비서관으로 유명한 강원국 작가의 특강을 들었다. 작가께서는 대통령실, 대기업 회장실에 있었을 때가 반사체의 삶이었다면, 글을 쓰고 특강을 하는 지금은 발광체의 삶이라고 하셨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행정부, 대기업의 수장 곁에 있을 때는 그들의 뜻을 그대로 표현해야 했지만, 지금은 대화하고, 메모하고, 강의하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자아를 따르고 있다는 걸로 난 해석했다. 공명심으로 구름 위를 날 수 있을 듯한 자리에 계셨던 분의 진솔한 고백에서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의 방향을 어렴풋이 잡았다.


바닷가에 있는 카페에서 통창 너머로 있는 파도를 보고 있으면, 뭔지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지만 표현하고 싶다는 꿈틀거림이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작곡을 하고, 누군가는 평일 낮에 해수욕장 광장에 도착한 어떤 사람의 사연를 지어낼 수 있다. 잠들어 있을 뿐 어딘가에 분명 있는 걸 깨운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남고생이 과도한 감성과 자의식으로 투박한 랩 가사 쓰는 것도 그런 의미에선 인생의 멋진 도구를 하나 가진 거란 생각에 부러움이 든다. 대단치 않게 여기면서 지나가다 이제야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미뤄뒀던 글을 좀 써볼 생각이다.


어떤 생각들은 표현하지 않고 너무 오래 방치해둬서 찾아보려 하면 켜켜이 쌓인 먼지 때문에 손사래를 치고 기침을 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일단 어설프게나마 써야겠다. 10년 전에 목포를 여행하며 나에게 보낸 낡은 편지에는 이런 말을 썼었다. “삶에는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다고 생각한다” 글쓰기가 채워줄 알지 못하는 기쁨과 위로를 기대하며 글쓰기 습관을 들이고자 한다. 그리고 남을 위해 사는 것에서 나를 찾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 사는 것에서 나를 찾을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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