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지식인에서 건넨 위로

by 가장귀해하고


나는 네이버 지식인 영웅이다. 영웅 대접을 받는 건 아니고, 6단계 등급명이 영웅이다.(총 18등급) 10개나 되는 신 작위(?)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채택 답변 203개, 채택률 91%로 활동 실적을 갖췄다. 어떤 전문성을 노리고 시작한 건 아니고, 주로 직장 일을 해야 할 때 도피성으로 활동하곤 했다. 비슷한 일인데도 업무라고 안 느끼게 네이버가 잘 짠 게, 채택, 내공이라는 시스템이 게임처럼 몰입하게 만든다.


이쪽도 분야마다 ‘꾼’들이 있다. 나는 주로 국어 문법 쪽에서 활동했는데, 내가 근거를 하나하나 찾아서 답변을 달면, 누군가는 이미 답변을 달고 다른 질문에도 답변을 달았다. AI도 없던 시대에 거의 반사신경 수준으로 다는 답변 속도가 말이 안 된다고 느꼈다. 나는 정확도로 승부를 본 편이지만, 빠른 속도에 채택을 빼앗겨 버리면 약이 매우 올랐다. 그래서 하면 할수록 주인마님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안달 난 머슴마냥 속도를 끌어올려 몰두하곤 했다. 그래서 채택률도 90% 이상으로 만들고, 괜히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자꾸 눈물이 나오고 답답해요"


2월 어느 날도 ‘오늘도 꼭 대감마님께 인정받고 말티여’ 같은 맘으로 지식인 질문 목록을 보고 있었다. 해당 분야는 아무래도 중고등학생들이 주로 질문을 올리곤 하는데, 질문 말고도 가끔 친구 흉이나 학교에 대한 불만이 올라오는 경우도 있다. 그중에 자꾸 눈물이 나오고 답답하다는 글이 있기에 무슨 사연인지 읽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눌러봤다. 내용인 즉, 이번에 서울 소재 대학교에 입학하는 신입생인데, 지방에서 같이 올라오신 부모님이 내려가시니까 눈물이 나고 심장이 죄는 듯하다는 것이다. 집까지 내려가면 4시간 반이나 걸리는데, 친구들의 만류에도 내려가고 싶다고 했다.


첫 발령 때가 생각났다. 처음 온 지역으로 이사하니 짐도 얼마 없는 빈 방의 적막이 가득 했다, 디지털 신호도 안 잡혀서 화질도 안 좋았던 TV 속 무한도전 화면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며칠 뒤엔 해 본 적 없는 업무를 하고 책임이 생긴다는 게 마치 무대 오르기 전 어색한 두려움에 숨막히는 듯했다. 그 긴장 속에서 TV프로 하나에 의지해서 견뎠던 외로움이 떠올랐다. 그렇기에 그 학생이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이 ‘미친 생각’이 아니라,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집에 가라고 할 순 없으니, 외로웠던 마음에 공감한 뒤에 힘든 수험 생활도 잘 견딘 것처럼 금방 적응할 것이고, 외롭고 적적한 마음이 들면 친구들과 하고 싶은 일 목록을 써보는 건 어떤지 제안하고 응원했다. 얼마 안 되어 ‘채택’과 함께, 너무너무 큰 위로가 되었다는 댓글을 받을 수 있었다.


초록 가면


레이싱 트랙을 한창 경쟁하다, 갑자기 택시 잡는 사람을 태우고 어디론가 떠난 것 같은 뜻밖의 동행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꾼’들과 속도 경쟁하다 말고, 그 학생의 질문에 답변을 신중하게 썼던 걸까? 아마도 그 시기에 나도 학생들 졸업시키고 난 뒤, 공허와 결핍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세상으로 입문하는 성인이 된 걸 축하하면서도, 마음 한켠에선 떠난 빈 자리를 보면서 못내 아쉽고 섭섭했다. 그러던 차에 그 질문자가 우리 졸업생처럼 느껴졌고, 한번 더 격려해줄 기회를 받은 마음으로 진심 어린 답변을 적었던 것이다.


생면부지의 사람과 지식 공유 플랫폼에서 고민과 위로를 주고 받을 줄은 정말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오히려 온라인이기에 현실보다 더 진솔한 대화가 가능했다. 어느새부턴가 졸업생들에겐 잘 퇴장해주는 미덕을 지키려 노력했었다. 지나친 관심은 부담일 수 있으니, 담백하게 인사하고 마무리짓곤 했다. 하지만 그 미덕을 지키기 위해 나는 솔직해지지 못했다. 사실은 담백하지 않고 그들을 그리워했는데, 결국 그걸 안으로 삭히곤 했다. 한편 그 질문자는 부모님을 밀어내고 싶어서 가까운 대학 대신 먼 서울 소재 대학을 선택했지만, 정작 떨어지고 나니 외로움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운 교사와 외로운 학생은 현실에선 솔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식인이라는 엉뚱한 공간에서는 익명의 초록 가면을 써서 둘 다 솔직해질 수 있었다. 아니. 현실의 가면들을 내려놓아서 그게 가능했던 듯도 하다.


그 질문자가 휴학을 안 했다면,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초년생이 되었을 것이다. 여전히 새 출발은 적응이 필요하겠지만, 이제는 지식인 대신 AI를 찾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사이 더 성장해서 능숙하게 대처하는 법을 익혔을 수도 있다. 여전히 그 질문자에 대해 아는 건 전혀 없지만, 덜 울고 금방 회복해서 즐거움을 찾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 역시도 길을 잃으면 가끔 가능해지는, 영웅적인 선의를 언젠가 또 예상 밖의 공간에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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