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스스로를 돌보아야 하는 이유
'또또각, 또또각...'
부모교육을 가는 길이었다. 전철을 타기 위해서 걸어가는데 그 날 따라 구두굽 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몇 일 전 무릎을 다쳤다. 익숙하던 구두발 소리가 어색하게 들리기에 한시적으로 절름발이 신세가 되었구나 싶었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둘째 아이가 내 무릎 위에 앉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나서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마음은 먼저 자리를 떴는데, 몸이 타이밍을 못 맞춰서 나오다가 다리가 식탁에 걸렸고 무릎의 인대를 다친 것이다.
"당분간은 많이 걷지 마세요."
무릎의 상태를 하루정도 지켜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한의원을 찾았다. 침을 맞고 부항을 뜬 뒤 당부말씀도 들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원장선생님은 내가 진료를 받으러 갈 때마다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시는, 자그마한 체구의 중년여성이다.
"틈틈이 좋은 거 먹어주고, 쉬어주고, 몸 챙기면서 일하고 애들도 돌보셔야해요. 엄마가 쓰러지면 큰일 나요."
그녀 역시 아이 둘을 키우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얻은 깨달음이 남다른 것 같았다. 나이 50을 바라보는 선배엄마가 해 주는 진정성 가득한 인생코칭이었다. 그래서인지 한의원에 다녀오면 왠지 모르게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구나' 하는 위안과 '남들도 걷고 있구나. 엄마의 길을'하고 생각하는 순간, 모종의 연대의식이 솟구치기 때문이다.
어느 날엔가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들이 바로 교육자와 엄마들"이라고 하시면서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돌보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라고 하셨다.
'나 돌보기'
초보엄마시절 자녀교육서를 읽기 시작했을때도 내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내용은, '아이보다는 부모가 자신을 먼저 돌보아야한다'였다. 어색했다.
'내가 나를 돌본다는 게 뭐지?애 둘 키우며 일하는 엄마에게 가당키나 한 소리야?'
아이들을 낳고 일을 하면서 매일 같이 깨워서 밥을 챙겨 먹이고, 옷을 입히고, 등원을 시키고 출근을 했다. 퇴근 후에는 그와 반대의 동선으로 움직이면서 애둘을 데리고 불꺼진 집안으로 들어서던 시절이 있었다.
방 불을 켜기가 무섭게 어린이집 가방을 확인하고, 저녁을 먹이고, 씻겨서 재우는 것만도 벅찼던 그 때는, '나'라는 사람은 잊혀지고 없었다. 퇴근이 늦은 남편을 기다리며 내 마음에 찾아온 생각은 오로지, '아, 오늘도 간신히 버텼다. 내일도 이 노릇을 어떡하나...'였다.
육아며 집안일이며 남편까지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날엔 나조차 내 편이 아니었다. 급기야 이런 생각까지 찾아왔다.
'아...내일 아침 눈뜨지 말았으면...'
일하는 엄마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감정이 몇 가지 있다. 아이들 앞으로는 미안함, 걱정, 불안함, 죄책감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돌봐주는 분들께는 죄송함과 고마움, 동시에 불만과 얼마간의 불신도 있다.
이렇게 엄마들은 마음 속에 커다란 돌덩이들을 얹어놓고 살고 있다. 마음이 그러고 지내는 동안에 당연히 몸도 소리없이 지쳐간다.
몇 년전, 나를 위해 큰 맘 먹고 한약을 지을 때였다. 약값을 결제하기 위해서 내민 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을 때 눈치챘다. 엄마가 되고 난 후부터 나를 돌보는 일에 너무 무심했다는 것을.
하지만 이번에 무릎을 다치고나서는 나돌보기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곧 낫겠지'하는 마음으로 파스만 붙여대지는 않았다. 무심코 지나쳤다가는 내 몸과 마음이 몹시 서운해할테니까.
자각, 덕분이다.
내 몸이 아프면,
결국 엄마 역할에도 소원해지거나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게 될 것이 뻔하다. 남편에게도 몸이 아픈 걸 호소하느라 고운 말이 안 나올 것이다.
그러고보면,
엄마란 사람은 자녀를 잘 키우겠다 다짐하기에 앞서 자기를 먼저 사랑하고 있어야 한다.
남편의 성공과 내조를 위해서도 여자는 자신을 내려놓아서는 안된다. 배우자를 위해서 모든 걸 내던진 아내를 남편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차라리 그에게 당당하고 매력적인 아내가 되는 건 어떨까?
나에게 없는 것을 누군가에게 줄 수는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녀를 사랑으로 키우겠다는 양육은 희생이고 곤욕이다. 엄마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돌보지 않는 육아는 고행이며 절름발이 모성이다.
엄마가 자기자신을 제일 먼저 사랑하고, 그 따뜻한 사랑이 차고 넘쳐서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흘러가는 것이 모성이 아닐까?
모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사랑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엄마역할도 사랑이 있어야 행복한 인생배역이 된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어색한 엄마들일수록, 요즘 들어 못견디게 애들이 미워질수록, 남편이 '남의 편' 같다는 생각이 들수록 그러한 시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디스 스탑 이즈 신도림, 신도림 스테이션..."
부모교육이 있는 문래동으로 가기 위해서 전철을 갈아타야 했다. 문이 열리자 쏟아져 나가는 사람들 틈 사이로 절뚝거리면서 내렸다.
'또또각 또또각'
걷는 동안 나에게 물었다.
'무릎이 많이 아프지?'
답이 돌아왔다.
'견딜만해. 그래도 다음주에는 한 번 더 한의원 가줘.'
혼자 이런 저런 질문과 답을 하면서 걷고 있는데,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그들만의 속도로 나를 앞질러 지나갔다. 무리중에 대여섯살 된 아들 손을 잡고 끌다시피하며 걸어가는 한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미간은 잔뜩 찌푸린 채로 간간히 아이에게 화를 내며 무어라 말하는 듯했다.
'저 엄마도 나 돌보기가 필요한 건 아닐까?'
밥솥 안에 밥이 있는 지 열고 확인해보는 것처럼 나는 수시로 내 안에 사랑이 있는지 열어보고 있다.
나는 엄마이기 전에 나였으니까
나사랑이 먼저.
자식사랑, 남편 사랑은 그 다음 일이다.
'또또각 또또각'
꽃샘추위에 연신 옷깃을 여미면서 절뚝거리며 걸었지만 마음은 행복했다. 이 추위가 지나고 나면 곧 봄꽃이 만발할테니 그 기대감에 내일이 기다려졌다.
'따뜻해지면 아이들에게 봄꽃을 많이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가 다시 표현을 고쳤다. '나에게 예쁜 꽃을 많이 많이 보여주어야지' 하고 말이다.
봄꽃 만개한 길을 걸으면서는 나는 절뚝거리지 않을 것이다. 따사로운 봄햇살 아래 꽃길을 걸으며 나는 웃고 있을 것이다. 그 곁에서 아이들도 남편도 즐거워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내 안에 벅찬 사랑과 행복이 아이들에게까지 전해질껄 생각하니 엄마로서 뿌듯해졌다.
나는 이제 절뚝거리는 엄마사랑은 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