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로 하게 된 승려생활

<마음이 편해지려면 배움이 필요하다>

by 나은진

“엄마, 공부 그만할래요.”

내가 선언했다. 엄마에게는 선언으로 들렸을지 모르지만 나의 속마음은 ‘도망가고 싶어요’였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학예회준비를 해야 했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4인중창단의 메인보컬로 합격했기 때문에 2학년이 되면 반드시 학예회에 나가야 했고, 학예회 공연을 위해 1학년때부터 점심시간마다 동아리실에 모여 열심히 연습을 했다. 그런데 학예회에 입을 의상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뭘 입을까?”

“딱 붙는 청바지? “

“아니지. 딱 붙는 흰색 청바지가 좋겠다.”

딱 붙는 흰색 청바지라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나는 ‘그 바지를 입을 수 없어’라고 울면서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내 감정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나는 그저 웃고 있었다.


그때 내 바지 사이즈는 36이었다. 36인치도 아주 꽉 끼게 입어야 하는 사이즈여서 나는 36인치 중에서도 고무줄바지를 입었다. 대체 고무줄로 된 36인치의 딱 붙는 흰색 청바지를 어떻게 살 것이며, 또 산다고 해도 흰색의 두껍고 커다란 내 다리를 있는 그대로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보여야 한다고? 눈앞이 캄캄했다. 내 다리를 보고 있는 수많은 남학생들의 놀란 눈이, 함께 노래 부르고 있는 옆 친구들의 날씬한 다리와 내 다리를 비교하는 그들의 불편한 시선이, 내 머릿속을 생생하게 스쳐 지나갔지만 자존심이 상해 동아리 친구들 앞에서는 절대 내색할 수가 없었다.


이날 이후, 공부가 잘되지 않았다. 공부를 하려고 책상 앞에만 앉으면 내 다리의 두꺼움이 또 그들의 불편한 시선이, 미치도록 나를 괴롭혔다. 공부가 잘 되지 않으니 마음은 자꾸 불안해졌고, 노래에 대한 열정도 점점 사라져 갔다. 새벽부터 밤까지 돈을 벌어야 했던, 그래서 가끔밖에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엄마를 만났을 때 나도 모르게 공부를 그만하겠다는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못 배운 것이 한이었던 엄마에게 노래는 그 따위였지만, 공부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이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난 나도 모르게 공부핑계를 대며 불편하고 불안한 이 상황을 그녀가 해결해 주길 바랐다.


방학이 되었다. 엄마는 열혈 불교신자였던 큰 언니와 상의 후, 나를 포교원으로 보내버렸다. 초등학교 3학년에 미쳤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내가 또 미칠까 봐 그들은 나를 절로 보내버렸다. 절로 보내진 나는 새벽 3시에 일어나야 했다. 원래부터 새벽형 인간이었던 데다가 예민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누가 깨우지 않아도 새벽에는 잘 일어났다. 하지만 참기 힘든 일이 있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스님과 함께 300배를 하고 염불을 하는 것은 참을 만했지만, 부처님 앞에 놓인, 새벽마다 모락모락 김이나는 노란 콩고물 시루떡을 보고 있는 것은 고통 그 자체였다. 아침밥을 실컷 먹기 위해 잠을 자고, 일어나면 밥부터 먹어야 했던 나에게, 3시간 동안 밥도 먹지 못한 채 떡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재앙이었다. 겨우겨우 그 재앙을 견디고 나서 먹는 떡은 그야말로 꿀맛이었지만, 남의 시선이 신경이 쓰여 맘 편하게 실컷 먹지는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있는 떡을 다 먹어치우고 싶었지만, 떡을 좋아하는 뚱뚱한 나를 ‘떡순이‘라고 정겹게 부르는 그들 앞에서, 더는 떡순이이고 싶지 않았다.


사실, 당시의 나에게는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은 비밀이 있었다. 먹고 싶은 것을 잔뜩 먹고 토하는 습관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비만이었던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살이 점점 더 찌기 시작했고, 나를 비롯한 가족들 모두 나에게 절식을 강요했다. 절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 스스로도 강요를 했지만, 가족들도 강도 높은 강요를 했다. 늘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해야 했던 나에게 식사시간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먹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 되었고, 내 그릇의 밥이 급격이 줄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가족들 모두가 함께 먹는 반찬을 많이 먹는 방법으로, 이마저도 내가 먹는 양이 너무 티가 나면 가족들 몰래 숨어서 먹는 방법으로 내 허기를 채웠다. 이렇게 허기를 채우고 나면 살이 더 찌겠다는 불안감에 음식물이 소화되기 전에 빨리 토를 해야 했고, 남들을 속이고 몰래 먹었다는 죄책감은 나를 벼랑으로 몰았다. 하지만 이 습관은 가족과 함께 살았던 10년 내내 들키지 않았다. 그만큼 나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고, ‘부끄러워서 데리고 다닐 수없다’는 직접적인 비난은 다반사였던 일상이었다. 여기게 먹고 토하는 내 습관을 들키기까지라도 하면 비난이 더 거세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혹시라도 들킬까 봐 나는 더 정교하고 교묘하게 내 습관을 숨겼다.


그런데 이상했다. 절에서 지내는 그 시간 동안 토를 하는 습관이 점점 줄어들었다. 절에 함께 있던 그들은, 떡을 좋아하는 나를, 많이 먹고 싶어 하는 나를, 인정해 주었고 그들의 관심사는 내 몸매에 가있지 않았다. 그들은 고등학교 1학년이라는 시기에 그것도 황금 같은 방학을 절에서 보내고 있는 나를 애처로워했고, 누구도 깨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절생활을 잘 해내고 있는 어린 나를 대견해했다. 새벽마다 법당에서 만나는 스님의 눈빛에는 따뜻함이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스님 방문 앞을 서성거리게 되었다. 무책임하게 동아리생활을 접은 것에 대한 괴로움, 뚱뚱한 몸에 대한 비참함, 내가 했던 몹쓸 습관들에 대한 죄책감, 성적이 뜻대로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 나를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감정들을 스님에게 위로받고 싶었고, 스님에게 묻고 싶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루라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까요?‘

하지만 제대로 묻지 못한 채 21일간의 승려생활이 끝이 났다.


나는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왔고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또다시 먹고 토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전화를 걸 수 있는 곳이 생겼다. 마음이 감당이 안될 만큼 힘들 때, 집으로 돌아오는 공중전화 앞에 멈춰 서서 다이얼을 돌렸다.

“스님, 은진이에요.”

“어~”

“스님, 마음이 죽을 만큼 괴로워요.”

“그럴 땐 말이야. 네 마음을 가만히 놓아두렴. 그럼 더러운 찌꺼기는 가라앉고 맑은 물이 생긴단다. 소용돌이치는 흙탕물을 가만히 두면 맑은 물이 생기듯이.”


이때 알았다. 마음이 편해지려면 배워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마음이 편해지는 배움을 얻기 위해 불교 책을 옆에 두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