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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더티브 Nov 11. 2019

내가 부럽다는 남편, 가슴이 뻐근했다

[엄마의 영화관] 86년생 정유미가 본 82년생 김지영


나도 그랬다 


    

아이가 없을 땐 몰랐다. 브런치를 즐기는 유모차 부대가 부러웠다. 출근 시간은 있으나 퇴근 시간은 없는 대부분의 평범한 회사원의 시선이었다.     


온몸이 예민한 센서로 무장한 아이는 낮이건 밤이건 두 시간 이상 자지 않았다. 다른 엄마들은 잘도 하는 수면교육도 못하냐는 핀잔 속에 자괴감만 들었다. 아이를 안고 붙박이 가구처럼 집에만 있어야 했다.     


품에 안겨서도 30분 이상 깊게 자지 않는 아이는 분명 내 뱃속에서 나왔건만 여전히 떨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기띠를 하고 화장실에 가거나 싱크대에 서서 대충 밥을 국에 말아 마시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아주 가끔 찾아오는 또래 엄마와의 점심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외출이었다. 아이를 위한 외출이 아닌 '내' 약속. 그 한두 시간의 콧바람을 쐬기 위해 아이가 갑자기 큰일을 보거나 토를 하거나 칭얼거리거나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응급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짐을 쌌다.     


피난 보따리마냥 한 짐을 챙겨 나와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아이를 안고 서서 어르고 달래면서도 그 찰나의 외출에 숨통이 트였다. 그토록 어렵게 집 밖으로 탈출해 만난 사적인 약속에서도 자연스레 아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이어졌다.     


기저귀 특가 세일, 이앓이에 좋다는 치발기, 요즘 효과를 보고 있다는 유산균. 여전히 음식은 서서 쓸어 담는 수준에 여유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지만 그렇게 바깥공기를 쐴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위안이었다. '나'도 살아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모습은 누군가에게 '팔자 좋은 전업주부'라 읽고 ‘맘충’이라 불리는 혀를 끌끌 차게 만드는 대상으로 불리고 낙인찍혔다.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놀리고     




"부럽다."     



출근하는 남편이 던지고 간 말에 가슴 깊숙한 곳이 뻐근했다.     


분명 그도 천사처럼 잠든 아이를 놔두고 발걸음이 떨어지기 아쉬웠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이와 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넌 참 좋겠다"로 애써 해석해본다.      


잠깐 놀아주는 것과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는 것의 차이는 극명하다. '밖에서 돈 벌어오는 존재'와 '집에서 애 보는 존재'라는 말에 담긴 비수를 재차 확인한다. "피곤해"라는 한 마디에 스며들어있는 진짜 속마음.     


'넌 편하게 집에서 애 하나만 보면 되지. 하루 종일 일에 탈탈 털린 멘탈을 간신히 붙잡고 집에 돌아왔는데 나한테 애까지 보라고?'     


합의하에 부모가 되었는데 견뎌야 하는 짐의 무게는 왜 이렇게 다른 걸까. 하루 종일 내 새끼 밥 먹이고 치우고 씻기고 청소하고 왜 나를 뺀 가족들을 돌보는 존재로만 남게 되었을까. 물음표만 쌓여갔다.     


제대로 한 끼 편하게 먹고, 두 다리 뻗고 자고, 마음껏 화장실을 가는 인간의 기본권이 왜 엄마한테는 예외여야 하나. 왜 엄마도 누군가의 금쪽같은 자식이라는 점은 늘 배제되는 것인가.     


이렇게 집에서 애만 키울 거면 애초에 그토록 치열하게 인생을 살 필요가 없었다. 전공도 학위도 경력도 구태여 필요치 않았다.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놀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굴레 속에서 더이상 현실을 불평하거나 "다 그렇지 뭐"로 치부하지 않기로 했다.


이건 잘못됐고 당신이 알고 있는 건 사실이 아니며 그 누구도 그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고 잣대를 내릴 수 없다는 것.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들을 얘기할 의무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들을 때까지, 귀에 못이 박힐 때까지 반복해서 말하고 인식시켜야 한다는 걸. 내가 침묵하면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고 "원래 그런 거야" "당연하지"의 프레임으로 이어진다.    

   



희생의 아이콘이라는 진부한 클리셰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등장은 순종과 여자다움, 희생을 암묵적으로 강요당해 온 여성들의 삶에 이제 용기를 내어 말하는 세대가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영화 속 어린 지영은 해말간 얼굴로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왜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공부는 엄마가 제일 잘했어도 청계천에서 밤낮으로 미싱을 돌려 남자 형제들의 등록금을 댔다.     


“그땐 다 그랬어.”     


엄마의 이루지 못한 교직의 꿈은 지영의 언니에게로 전이된다.


가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지영의 병을 알게 된 엄마는 한걸음에 달려온다.      


“엄마가 가게 얼른 정리할게. 애기 다 봐줄 테니까 우리 지영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지영은 그녀의 할머니가 되어 얘기한다.     


“애미야. 그러지 마라. 너 청계천에서 미싱 돌리다 손 그렇게 돼서 왔을 때 엄마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애들은 알아서 할 거다. 너도 네 인생 살아야지.”     


지영이 그토록 원하던 복직 소식을 알렸을 때 시어머니는 앞길이 구만리 같은 아들이 육아휴직을 하기로 했다는 얘기에 격분한다.


지영이 아프다는 사실을 그제야 어렵사리 꺼내는 남편의 마음도 복잡하긴 매한가지다. 육아휴직 후 자리가 없어지거나 한직으로 밀려나는 동료들을 볼 때면 한숨이 밀려온다. 그래도 그들은 그들만의 결정을 내린다.



엄마의 내일을 준비하는 오늘     



영화는 소설과 다른 결말을 제시한다. 누구누구의 엄마, 누구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각자의 삶이 있을 때 가족이라는 공동체 역시 균형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은 평화로워 보이는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은 어떤 싱크홀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     


당신이 지영이로, 맘충이라 불리는 사람이 되어보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다. 노을이 질 무렵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마음도, 빈껍데기처럼 내 안의 나는 소멸된 그 공허함도.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거나 바라지 않는다. 그래도 한 가지는 명확하다. 그 누구도 '맘충'이라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은 없다.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는 이 작품을 통해 저마다의 다른 생각과 상황에 공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건 어쩌면 이 땅의 수많은 지영이를 80년대에서 끝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소설과는 또 다른 지영이의 새로운 오늘처럼.          



by. 정유미(포포포 매거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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