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영화관] <82년생 김지영> 대현은 그때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배우 공유가 연기한 영화 <82년생 김지영> 속 정대현은 지극히 현실적인 남편이다.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안타까워 하지만 집안일은 하지 않는 남자.
영화 속 대현은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보인다. 아들이 설거지 하면 큰일 나는 줄 아는 보수적인 집안의 장남. 아이 낳는 걸 그저 아내 닮은 예쁜 아이가 태어나는 일, 기저귀 갈고 우유 먹이면 되는 일 정도로 생각했던 30대 남자에게 아내의 병은 재난과 같았을 거다.
대현은 분명 착한 남편이다. 지영의 병이 자신 때문인 것 같다며 미안해 하고 지영을 위해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하지만 선한 의도가 늘 최선의 결과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대현은 그때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3가지 제안.
결혼 6년, 엄마 4년. 지영보다는 은영에 가까운 나는 남편과 정말 많이 싸웠다. 남편은 늘 말했다. “미안해. 내가 잘할게.” 그럼 나는 한숨 쉬며 말했다. “미안할 행동을 하지를 마.”
남편도 대현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내로 엄마로 사는 게 너무나 힘겨웠을 때 내게 정말로 도움이 됐던 건 남편이 내 짐을 온전히 함께 나눠 가졌을 때였다. 이를테면
-퇴근 후 아이 씻기기와 잠 재우기를 전담하고
-아이가 아파서 어린이집에 갑자기 못 갈 때 회사에 눈치 보며 휴가 내고
-시가에서 식사가 끝나자 마자 바로 개수대로 향하고
-시부모님에게 해야 할 말을 했을 때
아, 하나 더 있다. 내가 건조기에 넣고 깜빡한 빨래를 정갈하게 개놓았을 때.
나는 남편이 나를 돕기를 바라지 않았다. 나처럼 육아와 가사에서 주체가 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됐을 때 우리 관계가 비로소 건강해졌다고 느꼈다.
아이가 잠든 밤. 지영이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를 개고 있을 때 지영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깨끗한 식탁에 홀로 앉아 맥주를 홀짝이는 대현의 모습은 상징적이다. 대현이 아무리 자상하고 따뜻한 남편이라 해도 지영의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대현이 지영과 수건을 함께 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면 어땠을까
-아이는 내가 재울 테니 소파에 누워 쉬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내 밥은 내가 차려 먹거나 시켜 먹을 테니 저녁밥은 안 차려도 된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하루 종일 아이 보느라 힘들었는데 아이 밥은 내가 먹인다고 말했다면
-시가에서도 안타까운 눈빛으로 지영을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부엌을 지켰다면
백마디 말보다 훨씬 더 지영에게 힘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 명절에 여행 갈까.”
식탁에서 조심스럽게 묻는 대현에게 지영은 정색하며 말한다. 왜 이제 와서 그러냐고. 신혼 때부터 시가에 자주 가는 게 힘들다고 말했고 만삭 때도 명절에 시가 가지 않았냐고. 그동안 대현이 명절에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 가는 대목이다.
그 와중에도 지영은 자기 밥은 제대로 먹지도 못 한 채 아이 밥을 먹인다. 한 손에는 손목 보호대를 하고서.
친정엄마인 미숙의 생일. 대현의 워크숍 때문에 지영은 홀로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가게 된다. 그런 지영을 안타까워 하며 대현은 워크숍에 가지 말까 또 다시 묻는다.
지영은 이미 알고 있었을 거다. 명절에 여행을 가는 것도, 대현이 워크숍을 가지 않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대현 스스로도 자신 없었을 거다. 부모님의 원망을 들으며 명절에 가지 않는 것도, 불이익을 감수하고 회사 워크숍에 빠지는 것도. 그래서 애매하게 지영에게 물어봤을 거다.
대현이 “우리 명절에 여행 가지 말자”고 단호하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부모님에게는 내가 제대로 이야기 하겠다고. 우리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애매하게 묻지 않고 단호히 말한다는 건 결과를 책임질 준비가 돼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묻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본인 마음 편하려고 던진 질문이 아니라면 말이다.
지영은 복직이라는 큰 결정을 내리면서 남편과 상의를 하지 않는다. 김 팀장 회사에 합류하기로 한 후 지영이 가장 먼저 통화하는 건 남편 대현이 아니다.
이어지는 장면을 보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린이집 종일반을 고민하는 것도, 아이돌봄 서비스에 대기 신청을 걸어놓은 것도, 하원 시터를 구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는 것도, 아이 배변 훈련을 시키는 것도 모두 지영이다.
애초에 육아라는 짐은 지영 혼자 지고 있었던 거다. 지영의 대사처럼 지영만 전쟁이었다. 여기에 “아들 앞길 막는다”는 시어머니의 막말까지. 복직도 전에 지영은 지쳐버린다.
대현은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을 “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육아를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영의 복직을 위해 육아휴직을 하고 쉬면서 공부를 하겠다고 말한다. 대체 대현은 자신이 회사에 있는 동안 지영이 뭘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지영-대현 부부는 대화를 많이 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너무 배려해서, 모든 게 조심스럽다. 어쩌면 둘 다 너무 착해서.
지영과 대현이 말을 아끼는 사이 지영 자신도 모르는 지영의 병을 시어머니가 알고, 병원 의사가 알고, 회사 사람들도 간접적으로 듣게 된다. 아픈 사람은 지영인데 그 사실을 가장 늦게 아는 게 지영이다. 시어머니가 미숙에게 전화를 걸어 지영의 병을 알리는 대목은 그야말로 호러다.
-지영이 노을이 질 때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고 했을 때 두 사람이 좀 더 이야기를 나눴다면 어땠을까
-지영이 빵집 알바라도 하겠다고 했을 때 “하고 싶은 일이야?”라고 묻지 않고 그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왜 굳이 하려 할까 궁금해 했다면
-지영의 하루가 어땠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뭐가 힘들었는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도 자주 나눴다면
“김지영의 삶은 단순히 같이 사는 사람의 성격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잃을 수밖에 없는 많은 복합적인 요인들, 사회제도를 비롯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문제”라는 공유의 인터뷰처럼(<씨네21>), 대현이 어떻게 하느냐와 무관하게 지영의 삶은 불행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구조는 멀고 사람은 가깝다. 지영과 가장 가까운 존재인 대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지영의 삶은 조금씩 나아질 수 있다. 영화의 결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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