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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더티브 Apr 29. 2020

'인어공주'가 다른 공주와 차원이 다른 이유

[마더티브X포포포] 물거품이 될지라도

아이를 낳고 키우기 전엔 몰랐다. ‘인어공주’의 아름다움을. 아이가 공주 이야기를 맹렬히 좋아하는 나이가 되어 온갖 공주 동화들을 읽어주다 보니 어릴 적엔 그냥 지나치던 이야기들을 새삼 곱씹어 보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단연코 ‘인어공주’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우선,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달리, 인어공주는 자신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자신이 속해 있는 세상(바다) 이외의 곳(육지)을 탐험하고 싶다는 맹렬한 욕구를 따라 지상으로 올라가고, 사랑을 얻기 위해 목소리와 다리를 바꾸는 위험한 거래에 뛰어든다.


마녀와의 거래는 공평치 않다. 목소리와 다리를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녀는 ‘왕자가 너를 사랑하게 만들지 못하면 물거품이 될것’이라고 한다. 나 같으면 거기서 손을 들었을 것이다.


‘저기요, 마녀님. 목소리하고 다리를 바꾼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마녀님이 딱히 관여하실 문제가 아닌 걸로 사료되옵니다만… 가능하시다면 뒤의 조항은 다시 한번 고려해주시는 것이 어떨런지요? 제가 물거품이 된다고 해서 마녀님에게 딱히 어떤 이득이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만…’




이 이야기가 여타의 다른 공주 이야기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그녀는 앞뒤 재며 살지 않는다. 공주로서의 안락한 삶을 버릴 준비가 된 것은 물론, 목숨을 내놓으라는 데도 주저하지 않고 나아간다.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는 독자들로서는 읽을 때마다(좋은 의미로서가 아니라 나쁜 의미로서) 심쿵하게 되는, 책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대목이다.


‘제발, 인어공주, 그만둬, 왕자는 널 사랑하게 되지 않아. 넌 물거품이 되고 말 거야. 물론 지금의 사랑이 영원한 사랑이고 다시는 이런 사랑을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 하겠지만, 아직 네가 어려서 그러는 거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또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야, 게다가 넌 공주잖아. 금수저라고.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네 인생은 탄탄대로야, 이 바보야…’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은 아마도 ‘내 딸이라면 어렵사리 얻은 그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 집 안에 가둬 놓을 텐데’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실 사랑(그 대상이 사람이든 일이든)에 빠진 사람을 그 감정으로부터 꺼내는 것은 말로 설득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쁜 남자인 걸 알아도, 성공하지 못할 걸 알아도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일단 끝까지 가 보고 싶은 것이 사람이 마음이다. 그 길 끝이 절벽이라고 아무리 주위에서 소리쳐도 직접 가보고 떨어져 다치기 전까진 그 마음을 제어하기 힘들다. 그 인간적인 욕구와 고통을 직접 경험하는 동화 속 공주는, 내가 알기로 인어공주뿐이다.


이야기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자고 있는 왕자를 찌르려 칼을 들고 갔다가 그냥 돌아서는 대목이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일관된 책임을 진다. 사랑에 빠진 것은 그녀 자신이었으므로, 사랑받지 못했다고 해서 왕자를 탓하지 않는다. 그를 찌르고 다시 해저 궁궐로 돌아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인생을 택하지 않는다. 맹렬히 사랑했으나, 사랑받지 못했고, 그 결과로 죽음을 맞이한다.


결과 자체는 비극일지 몰라도 이 모든 것을 매 순간 진지하고 치열하게 고민해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인생은 ‘그 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회자되는 그 어떤 공주들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지상으로 가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고 해저 궁궐의 공주로 남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보다 더 행복하게 살았을까?


나는 그녀가 부와 권력, 아름다움 그 모든 것을 가진 채로 불행하게 살았을 거라고 99.99% 확신한다. ‘가지 않은 길’이 그녀에게 주었을 행복을 상상하느라 세상의 그 모든 좋은 것을 시시하게 여겼을 것이다.


수백 번 읽었는데도, 이 책을 집어 들고 첫 장을 넘기노라면 그녀가 경험하게 될 일과 감정의 파도에 함께 올라탈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아찔하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난 뒤엔 또 매번 같은 감정의 궤적을 밟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게 된다.


‘그래, 인어공주, 나라도 그랬을 거야. 잘했어, 좋은 인생이었어’



by. 포포포 김민지



이 글은 엄마의 잠재력을 주목하는 <포포포> 매거진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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