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퍼런서 살롱] 이민정 '사실은 대단한 사진관' 대표
나의 서사가 레퍼런스가 되는 곳. 창고살롱 레퍼런서 살롱 4번째 연사는 이민정님이었어요.
지난해 11월 창고살롱을 기획하면서 연사 섭외 요청을 했으니 무려 3개월 넘게 발표를 기다린 건데요. 그 사이 창고살롱지기들의 피드백과 함께 2번이나 장표를 수정하고 리허설을 했답니다. 민정님의 열정과 정성에 감동 또 감동. 오랜 시간 준비한 만큼 더욱 알차고 힘있는 레퍼런서 살롱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민정님은 자신을 ‘사진관 운영하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라고 소개했는데요.
올해로 8년째 ‘사실은 대단한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지난해부터는 은평구 우리동네배움터 중 한 곳인 ‘사실은 대단한 창작소'를 운영하며 시민교육을 기획하고 있기도 해요.
9살, 4살 두 아이의 엄마인 민정님은 살롱지기 현진과 인성 그리고 창고살롱 레퍼런서 멤버 유미님이 함께 만든 <내 일을 지키고 싶은 엄마를 위한 안내서> 10명의 인터뷰이 중 한 명이기도 해요. 최근에는 <서울의 엄마들>이라는 출판 프로젝트에 에세이를 싣기도 했고요.
다재다능한 민정님의 레퍼런서 살롱 주제는 ‘자영업자가 번아웃을 건너는 법'이었어요.
“무엇을 하는 힘과 무엇을 하지 않는 힘, 이 둘을 합치면 능력이다. 그리고 무엇을 하는 힘과 무엇을 하지 않을 힘의 관계를 바꾸는 것을 변신이라고 부른다. 무엇을 하는 힘과 무엇을 하지 않는 힘 사이의 균형을 평화라고 부른다. 이 균형을 잡으면서 우리는 자기 삶의 주체가 된다. 이렇게 마침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게 된다.” -<앞으로 올 사랑> 중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민정님은 ‘무엇을 할 힘과 무엇을 하지 않을 힘'에 대한 정혜윤 작가의 글을 소개했어요. 민정님은 “그동안 무엇을 할 힘과 무엇을 하지 않을 힘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했던 것 같다”며 “내가 그때 겪었던 일들이 결국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구나 싶었다”고 말했어요.
일과 삶의 변곡점에서 자신만의 선택을 내린 경험이 있는 여성을 창고살롱에서는 ‘레퍼런서’라고 부르는데요. 레퍼런서 민정님은 무엇을 할 것과 무엇을 하지 않을 것 사이, ‘강약조절'을 어떻게 했는지 차근차근 들려줬어요.
방송사 PD로 커리어를 시작한 민정님은 환갑 잔치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는 게 꿈인데요. 실제로 사회 초년생 시절, 방송사에서 3년 정도 일하다 퇴사 후 다큐멘터리 조연출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해요.
“일 시작하기 일주일 전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됐는데 아이 낳는 시기와 영화 나와야 하는 시기랑 겹치더라고요. 일을 배우면서 촬영하고 밤을 새우기도 해야 하는데 불가능한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작진과 상의 없이 자진해서 ‘임신해서 일을 못 하게 됐다’고 눈물 흘리면서 연락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저는 임신을 하게 됐고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물어봤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그때 당시에는 이거 아니면 저거로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임신으로 인해 꿈에 그리던 일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 그럼에도 민정님은 “일을 안 하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 없다”고 말했어요. 지금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요.
“이 기회에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 싶었어요. 원래 사진에 관심이 많았어요. 카메라는 장난감 가지고 놀듯이 다뤘고, 영상보다 더 오래된 취미였죠. 그걸로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 안 했는데 아이 돌 사진 직접 찍고 지인들 행사 사진도 찍어주다 보니 제가 사진을 잘 찍더라고요(웃음). 제가 사진관에서 일해본 적이 없잖아요. 월세 정도만 감당하면 일을 하면서 배울 수 있겠다 싶었어요. 아이가 돌 좀 지났을 때 사진관을 열었고 생각보다 반응이 빨리 왔어요. 첫 달부터 월세의 2배를 벌었고, 6개월 만에 월세 10배 이상을 벌었어요.”
창업 3년 만에 사진관을 확장이전하게 됐다는 민정님. 예상치 못했던 두 번째 임신을 했을 때는 이미 향후 1년 정도 스케줄이 잡혀 있는 상태였는데요. 임신한 상태에서 다큐멘터리 스태프 일하는 걸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임신한 사진사 레퍼런스’도 민정님에게는 전무했다고 해요.
“입덧이 너무 심했는데 임신해서 촬영 못할 것 같다는 말을 하기 어렵더라고요. 레퍼런스가 없으니까 어느 정도까지 촬영할 수 있을지 기준을 알 수 없었어요. 촬영하다 쓰러지지 않는 이상 한번 해보자, 약을 먹고 링겔을 맞으며 입덧 지옥을 버텼어요. 아이 낳으러 가기 하루 전까지 작업하면서 보냈어요.”
조리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돼 바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는 민정님. 복귀 후 예전처럼 다시 바빠졌지만 두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하는 건 아이가 하나일 때와는 전혀 달랐다고 해요. 일과 육아,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수만 가지 일들이 민정님을 짓누르기 시작했다고요.
“내가 아니면 안 되는 너무 많은 일들이 펼쳐져 있었어요. 첫째, 둘째 어린이집도 다르고 돌봄 선생님도 따로 있고. 연락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애들 어린이집 보내면서 각자 어린이집 선생님한테 연락해서 아이 상태 나누고. 그럼 오전이 싹 사라졌어요. 힘들어도 나아지겠지, 도전하고 시도하면 나아지겠지, 계속 저를 시험했어요. 가족과 일 그리고 나. 비중을 좀 달리했다면 모르겠는데 모두 밸런스를 유지하려고 하니까 오히려 너무 많은 갈등과 선택의 연속이었어요.”
그러던 중 민정님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남편이 커리어 성장을 위해 노동 강도가 높은 직장으로 이직을 결정하게 되는데요. 남편과 둘이서 분담하던 육아를 온전히 혼자 부담하게 되면서 민정님은 번아웃을 경험하게 됐다고 해요.
민정님은 번아웃의 징후를 상세하게 설명해 줬어요. 다른 레퍼런서 멤버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요.
“저는 결정을 빨리 하는 편인데 결정을 못하겠는 거예요. 일을 좋아했고 할 일도 많은데 출근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 자신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죠. 남편이 언제 쉴지 알 수 없으니 내가 쉴 수 있는 시간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어 무기력해졌고요. 효율성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급기야는 일을 제대로 못 하겠더라고요. 집에는 활발한 남자애 2명이 있는데 굉장히 시끄럽거든요(웃음). 저는 아이들은 뛰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욱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도 ‘애 때문에 일 못한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아무도 나를 온전히 이해 못 할 거라는 생각이 드니까 고립감이 느껴졌어요.”
민정님은 현재 자신에게 가장 부족한 게 ‘시간'이라고 판단하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고 해요.
1)“절대적으로 일을 줄였어요. 토,일은 항상 스케줄이 꽉 차있었는데 일요일에는 아예 일을 안 하겠다고 선언했어요. 매출 절반이 줄어드는 걸 감수하는 결정이었어요. 저는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당장의 매출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2)“지출을 줄여야 일을 덜 할 수 있겠다 싶어서 그 다음으로는 가장 많이 나가는 고정비인 월세를 줄이려고 사진관을 축소 이전했어요.”
3)“이동 동선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아이 학교 가까운 곳으로 사진관을 옮겼고,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는 1월부터 3월까지는 휴식 기간을 가졌어요. 남편의 직장 상황은 어차피 제가 컨트롤 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포기하기로 했고요.”
민정님은 일/가족/나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눠서 번아웃을 건너기 위해 어떤 시도를 했는지 들려줬어요.
-“촬영 의뢰가 들어오면 거절을 잘 못했어요. 사진관 일에는 촬영만 있는 게 아닌데 제가 시간이 비어 있는데 촬영을 못 하면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일정이나 페이 등 거절하고 협상하는 걸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의 규칙을 세웠어요. 고객들에게도 휴일이나 상담 시간에 대해 공지했고요.”
-“휴대폰을 사업용과 개인용으로 분리했어요. 안 그러면 아이랑 놀면서도 계속 상담하게 되더라고요. 퇴근 후나 쉬는 날에는 사업용 휴대폰을 전혀 안 봤어요.”
-“희생되는 가족이 없어야 하는 것 같아요. 육아 부담이 다 저한테 몰리게 되면서 남편도 괴롭고 저도 괴로웠거든요. 함께 성장하는 시스템이 아니면 그 시스템을 점검해야 해요(참고로 남편은 최근에 가족을 위해 퇴사를 결정했어요).”
-“양가 부모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서 학교, 어린이집 선생님 그리고 돌봄 선생님을 더 믿고 의지하려고 했어요. 남한테 맡겼다고 생각하지 않고요.”
-“일주일에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을 정해서 확보했어요. 제가 생각했던 이야기를 창의적으로 풀어내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어요. 그날은 아이들 등교, 등원하면 아무것도 안 해요.”
-“보건소에 있는 심리 상담 카페에 가니까 무료로 심리 상담을 해주더라고요. 저한테 집중해서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져주기도 하고, 나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요. 주변 보건소에 무료 심리 상담 서비스가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보고 이용해 보세요.”
민정님은 번아웃을 건너고 나니 우울증, 공황장애 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어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어렵고 고립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먼저 이야기를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요.
지난해부터 민정님은 ‘사실은 대단한 창작소'를 시작했어요. 은평구 평생 학습관에서 예산을 지원 받아 자신이 진행하는 사진 수업과 함께 글쓰기, 독립출판, 팟캐스트 수업 등을 기획하고 강사를 섭외했어요. 수업료는 무료. 민정님은 “이제는 누군가에게 제 에너지를 나누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어요.
“성장과 치유는 유기적인 과정이라서 고유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어떤 시간에 어떻게 되라고 요구할 수 없다. 다만 그 과정을 신뢰할 수 있음을 알면 된다.”-나탈리 크납,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민정님은 발표를 마무리하면서 번아웃을 겪었을 때 도움이 됐던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이라는 책에 나오는 문장을 소개했어요.
“번아웃이 왔을 때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계속 도전했어요. 내가 여기까지 가면 엄청 힘들구나,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되돌아 보면서 저의 진짜 모습과 저의 경계를 알아가는 계기가 됐어요. 누구에게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르고 저마다 임계치가 다르잖아요. 내가 나약하다고 자책하지 말고, 어떤 식으로든 상황을 인지하고 개선하기 위해 용기 내서 변화를 시도했으면 좋겠어요. 나를 잘 믿고 이 과정을 잘 건널 수 있도록 시간을 주면 좋을 것 같아요.”
창고살롱 레퍼런서 멤버 중에도 뭐든 열심히, 성실하게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저희 살롱지기들도 마찬가지고요. 지속가능한 일과 삶을 위해서는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민정님의 이야기가 더욱더 와닿고 또 필요했던 것 같아요. 민정님의 이야기가 번아웃 ‘극복기'가 아니라 번아웃 ‘건너기'라서 더 좋았고요.
시즌2 레퍼런서 살롱 연사들도 정해졌는데요. 나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내 일을 만들어가고 있는 여성들의 다양한 이야기, 기대되고 궁금해요. 첫 번째 레퍼런서 살롱은 오픈 세션으로 진행되고요. 두 번째, 세 번째 레퍼런서 살롱은 오직 창고살롱 멤버만 참석 가능합니다. 창고살롱 레퍼런서 살롱에서는 일방적인 발표나 강연이 아니라 연사와 일과 삶에 대해 대화하며 고민을 나눌 수 있어요.
레퍼런서 살롱 3회 참가권이 포함된 시즌2 멤버십 신청은 오는 3월 2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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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편집 : 창고살롱지기 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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