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살롱] 박완서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창고살롱 시그니처 프로그램 ‘스토리 살롱’. 창고살롱만의 구조화된 질문과 대화를 통해 일과 삶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인데요. 살롱지기들이 엄선한 시즌2 스토리 살롱 두 번째 작품은 박완서 작가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예요.
<그 산이…>는 1995년 출간된 작품으로 박완서 자전소설 3부작 중 2부에 해당하는 소설인데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작가의 유년기부터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스무 살까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그 산이…>는 그 이후부터 결혼할 때까지 2년(1951년~1953년)간의 이야기를 밀도 있게 담고 있어요.
올해는 박완서 작가 타계 10주기 되는 해인데요. 멋진 작품을 많이 남긴 작가이기에 레퍼런서 멤버 분들과 어떤 책을 함께 읽을지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이 책을 선택한 창고살롱지기 현진은 “박완서라는 이름은 누구나 알지만 박완서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드물다"면서 “이 책을 통해 박완서 문학을 시작하면 작가의 유년기와 결혼 이후 이야기를 다룬 다른 박완서 소설로 뻗어나갈 수 있는 훌륭한 통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선정의 이유를 밝혔어요.
<그 산이…>는 결코 가볍지 않은 두께와 내용이지만 박완서 작가 특유의 표현력과 통찰력 덕분에 푹 빠져들어 읽게 되는 작품인데요. 이번 스토리 살롱은 좀 더 깊은 대화를 위해서 화요팀/수요팀 두 개 살롱으로 나누어 진행했어요.
스토리 살롱은 살롱지기들이 기획 회의를 통해서 살롱에서 대화할 질문을 만드는데요. 이번에는
1.가장 공감 가는 혹은 이야기 나누고픈 캐릭터
2.가장 인상적이었던 관계
3.인간다움을 잃었던 경험, 그때 나의 선택 그리고 조력자
3개의 질문을 던졌어요. 레퍼런서 점순님은 “창고살롱은 정말 짓궂다”면서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을 생각해 보게 한다”고 말했어요.
가장 공감 가는 혹은 이야기 나누고픈 캐릭터로 오빠의 아내인 ‘올케'를 선택한 레퍼런서 멤버가 많았어요. 의용군으로 갔다 부상을 입고 돌아온 후 몸도 마음도 부서져 버린 오빠. 올케 언니는 오빠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데요. 두 아이를 키우면서 가족들의 먹거리를 챙기며 소설 속 ‘나'와 함께 ‘보급투쟁(aka. 도둑질)’에 나서기까지 해요.
레퍼런서 젤라님은 “올케가 이 집안을 하드캐리했다"며 “이 집안에 올케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소설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말했고요. 가현님은 “올케의 모습이 겉으로는 괜찮은 척했지만 속으로 곪고 있었던 조직 속의 나 같기도 했다"며 공감했어요. 찬이님도 “의연하게 모든 걸 이끌어가는 올케가 인상적이었다"면서 “나와 올케의 우정을 넘은 관계가 아름답고 슬펐다"고 말했어요.
레퍼런서 은정님은 늘 담담해 보이던 올케가 나의 등 위에서 우는 모습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뽑았어요.
“저는 올케가 우는 그 순간 '나'의 연약함과 올케의 연약함이 맞닿았다고 생각했어요. 허깨비가 된 오빠에 대한 분노, 풍금 소리를 들으며 느낀 절망, 미천한 근본이 드러나는 낯뜨거움. 이런 것들이 '나'의 연약함으로 자리 잡았을 것 같은데요. 연약함끼리 만나 동질감, 자매애 같은 것들이 솟아난 게 아닐까요? ‘지금 나만 이렇게 그지 같은 건 아니구나. 너도 그러네’ 하고.”-은정님
레퍼런서 홍하언니님은 PX에서 만나게 되는 ‘티나 김'을 가장 인상 깊은 캐릭터로 꼽았어요.
“욕망의 모순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티나 김에게서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생존의 비린내’가 느껴졌어요. 이 여성이 갖고 있는 위치가 기존 한국 여성에게는 없는 캐릭터잖아요. 억척스럽고 성실한 올케라든지 집안의 모든 걸 끌어안은 엄마의 모성이라든지. 이 인물이 결국 미국으로 가게 되는 걸 보면서 영화 <브루클린>과도 이어지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홍하언니님
피아니스트인 미정님은 ‘나'가 PX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이자, 박완서 작가 데뷔작인 <나목>의 주인공이기도 한 박수근 화백을 언급했어요. 미정님은 “소설 속에서 ‘나'에게 자신의 작품집을 꺼내서 보여주는 장면이 통쾌했다"고 말했어요. 또 박수근 화백을 보면서 “‘예술은 무엇인가, 인간다움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됐다”고요.
정희님은 “엄마를 혐오하면서도 엄마의 자존심을 지켜주려 하는 양가감정이 와 닿았다"면서 소설 속 ‘나'에게 가장 공감이 갔다고 말했어요.
이 책에는 주인공 ‘나’를 둘러싸고 다양한 관계가 펼쳐져요. 살롱지기들은 크게 ‘애증'과 ‘조력자'로 소설 속 관계를 나눠 보았는데요. 많은 레퍼런서들이 엄마와 나의 관계에 집중했어요. 책 속 ‘나'가 “아아, 지겨운 엄마, 영원한 악몽"이라고 부르는 엄마 말이에요.
은진님은 아래 문장을 읽고 엄마와 자신의 관계가 떠올라서 울어버렸다고 말했어요. 구구절절 공감이 갔다고요.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온몸을 내던진 울음은 앞으로 부드럽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통과의례, 자신에게 가하는 무두질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엄마하고 나하고 만날 수만 있었다면 둘 다 울지 않았을 것이다. 따로따로니까, 서로 안 보니까 울 수 있는 울음이었다.”
은진님은 “자신을 밑바닥까지 치열하게 들여다보지 않고는 이런 소설을 쓸 수 없을 것 같다"며 “자신을 잘 알고 자신의 바닥을 글로 드러내는 용기가 대단하고 부럽다"고 말했어요.
지섭과의 관계에 집중한 레퍼런서 멤버도 있었는데요. 은애님은 “마지막에 두 남자 사이에서 배우자를 선택하게 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고 했어요.
“함께 있으면 끊임없이 이야기가 오가고 그 사람이 없을 때는 서울이 텅 빈 것 같이 느껴졌던 사람이 아니라, 결국 다른 사람을 남편으로 선택하는 장면을 보면서 소설 속 ‘나'가 하루하루 꾸역꾸역 살아감에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은애님
레퍼런서 점순님은 근숙 언니와의 관계를 언급했어요. 남쪽에 피난 가는 길. 근숙 언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요. “서둘지 말고 천천히 보통으로 걸어.” 점순님은 “조급해 하면 오히려 일이 잘 안 된다"면서 “근숙 언니가 걸음걸이마저도 쉼이라는 걸 알려주면서 ‘나'에게 여유를 갖게 만든 것 같다"고 말했어요.
혜린님은 “표에서 가까운 가족들이 애증의 관계에 포함돼 있는 게 눈에 띈다"고 했어요.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영화를 좋아하는데요. 미움과 슬픔이 있어야 행복과 사랑도 존재할 수 있잖아요. 애증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박완서라는 사람을 더욱 성장시켰을 것 같아요. 보통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좋은 것만 해주고 싶고 미움은 숨기고 싶어 하는데 자연스레 서로를 미워하는 과정도 겪어야 하는 것 같아요.”
가현님도 “나를 성장시킨 관계에서 애증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고 말했는데요. 레퍼런서 멤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애증’의 관계와 ‘조력’의 관계가 결코 별개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어요.
<그 산이…>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어려운 전쟁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인간다움에 대해, 건강한 생존에 대해 고민하는 작품인데요. 레퍼런서 멤버들 삶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었던 경험이 언제였는지 궁금했어요. 그때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또 조력자가 있었는지도요.
민정님은 얼마 전 다리가 다치는 사고를 당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예상치 못한 생리 현상 때문에 더 급박해졌던 ‘웃픈' 경험을 나눴고요. 두란님은 “인간다움을 잃는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건 유머인 것 같다"고 강조했어요.
한혜진님과 써니님은 가까운 가족, 친구의 죽음 앞에서 인간다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경험을 솔직하게 이야기했고요. 성애님은 힘든 상황 속에서 타인의 좋은 일에 진심으로 축하할 수 없었던 순간을 떠올렸어요. 출산과 수유 과정에서 내 몸이 “임대”된 것처럼 혹은 “포유류"나 “젖소"가 된 것처럼 느꼈던 경험을 언급한 멤버도 많았어요.
현주님은 “치열하게 살다 보면 인간다움을 잃게 되는 것 같다"면서 “멈추는 게 필요한데 제게는 창고살롱에 들어오는 게 멈춤의 일환 중 하나"라고 말했어요.
수요 스토리 살롱에서 성애님은 박완서 작가 구술 총서를 소개했는데요. “매우 무거운 책인데 이사할 때 소중하게 챙겨왔다”면서 박완서 작가 작고 이틀 전 남긴 일기를 공유했어요. “이 글귀 소개를 듣고 코끝이 찡해졌다”고요.
“(…) 살아나서 고맙다. 그동안 병고로 하루하루가 힘들었지만 죽었으면 못 볼 좋은 일은 얼마나 많았나. 매사에 감사. 점심은 생선초밥으로 혼자 맛있게.”
성애님은 줌 화면을 통해 두꺼운 책을 보여줬는데요. 멤버들 모두 소중한 보물을 발견한 기분으로 흥미로워했답니다.
두 번째 스토리 살롱 글쓰기 사후 과제는 ‘나의 조력자(들)’이었는데요. 레퍼런서 멤버들이 쓴 글 일부를 공유할게요.
“머리가 복잡할 때 잡생각 안 하려고 했던 뜨개질. 슬플 때는 슬픈 노래/ 기분전환할 때 들었던 노래.
콧바람이라도 쐬려고 나간 동네 공원 산책. 사람들 위로나 조언 듣기는 싫지만 책 읽는 건 괜찮았던 그때 읽었던 에세이, 시집, 소설. 원망하고픈 마음도 많을 때 썼던 블로그 비공개 일기. 혼자 머물 수 있었던 아주 고요한 카페와 차 한 잔. 책상에 앉아서 끄적였던 그림. 그중에서 그림 그리고 일기 썼던 것이 저의 일상을 많이 지켜준 것 같아요.”-레퍼런서 써니님
“남편은 늘 저에게 “너는 이렇게 있을 애가 아니야!!”(나 완전 이렇게 있어도 되는데;;;)라며 빨간 모자 교관님처럼 끊임없이 저를 닦달하고 잔소리를 합니다. 제가 게을러지지 않고 안주하지 못하도록 일으켜 세운다는 데서 훌륭한 조력자인 것 같아요. 저보다 저를 더 믿어주고 알아봐 주는 저의 닭벼슬 교관님 덕분에 제 삶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는 것이 문득, 감사하네요.” -레퍼런서 윤승님
“왜 조력자란 단어에 아들이 생각났는지 모르겠지만 이 꼬맹이야 말로 내 삶에 진정한 조력자이자 일상의 옥시토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중략)...늘 재미있는 경험을 찾아 나서고, 가족들과 친구들을 웃게 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아이다.”-레퍼런서 한혜진님
“제 지난 과거는 실패의 연속이라 생각했는데 감사하게도 실패의 끝에 남는 소중한 동료들이 있더라고요.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비춰주며 '넌 멋진 사람이야'를 변함없이 이야기해 주는 지난 옛 동료들이 현재 저의 큰 조력자입니다.”-레퍼런서 가현님
“2017년의 콘서트에서 RM은 <Born Singer>라는 곡의 가사 중 "얌마, 니 꿈은 뭐야. 나는 '랩스타가 되는 거야"를 "얌마, 니 꿈은 뭐야. 나는 '진짜 내'가 되는 거야"라고 개사해서 부른 적이 있습니다. 방탄의 노래 가사를 들으면서 마치 잃어버렸던 청춘의 마음을 되찾는 것 같았습니다. 방탄 덕분에 '나는 뭘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건 뭐였지?'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레퍼런서 ‘더쿠작가'님
“생각해보면 그때그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으며 지금까지 온 거 같아요. 육아하면서 동화책 말고는 읽은 책이 거의 없는데 창고살롱 하면서 소설책도 완독하고요. 어설프지만 글도 쓰고 있고요. 노션이라는 낯선 세상도 알게 됐네요. 육아를 핑계로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조금은 내 구역이 생긴 거 같아 행복합니다.”-레퍼런서 정은님
“살면서, 언제나 조력자를 만나면서 살 텐데, 잘 알아보는 눈을 길러야겠다, 고마운 마음을 잃지 않아야겠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또한,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게 또 의도해서 그런 조력자가 되어 살아가겠죠?”-레퍼런서 민정님
세 번째 스토리 살롱에서 함께 읽을 작품은 <위험한 요리사 메리>인데요.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많은 시사점을 주는 책이에요. 다음 스토리 살롱도 기대됩니다:)
정리/편집 : 창고살롱지기 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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