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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더티브 Dec 10. 2018

애없이 떠난 제주, 풀 한 포기도 아름다웠다

[엄마의 PLACE] 애 엄마가 제주로 2박 3일 MT를 간다는 것 ①

10월의 어느 월요일부서원끼리 점심을 먹는 날이었다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를 한술 뜨려는데 부장이 공지했다


11월 말에 제주도로 2박 3일 부서 MT 갈 거니까 시간 비워두세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MT라니제주도라니그것도 2박 3일이라니. 집에는 태어난 지 35개월 된 아이가 있다. 우리 부부는 딱 그 시간만큼 단 한 번도 배우자를 홀로 남겨둔 채 외박한 적이 없다. 나와 남편은 둘 다 출퇴근이 규칙적이어서 웬만하면 같이 아이를 돌봐왔다. 누군가 자리를 비우면 남은 사람 혼자서 먹이고 놀아주고 씻기고 재우는 일을 다 해내야 하는데, 그게 너무나 힘든 걸 잘 아니까 죽어도 같이 죽는다는 심정으로 함께했다. 
  
아이 돌보는 일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꽤 쉬워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아이는 절대 순순히 부모 말을 따르지 않는다. 건장한 성인 둘이서 생명력 넘치는 아이 하나를 겨우 감당해내는데, 체력과 정신 모두 탈탈 털리는 밤 두 번과 아침 한 번을 남편 혼자서 감당하라니. 내가 MT를 가게 되면 우리의 ‘연대책임’에 균열이 나게 되고, 
서로에게 빚지지 않으려 노력해온 시간들이 무너지게 된다
  
나에게 2박 3일 MT는 배우자를 지옥에 볼모로 두고 홀로 천국을 만끽하는 거나 다름없다. 늦은 귀가는 어떻게 양해를 구해도 외박은 유죄다. 부장에게 아이 때문에 못 간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나와 같은 직장맘인 부장은 더 단호했다. “이것도 일이니까 하루라도 가도록 하자. 아이가 그 정도 연령대면 해볼 만해.” 결국 1박 2일 일정으로 비행기 표를 끊었다. 
  
남편은 아무 문제없다는 듯 허락해줬지만(속마음은 정반대였던 것 같다), 나는 출발 날짜가 다가올수록 심란해졌다. 고생할 남편과 두 밤 연속 엄마 없이 지낼 아이에게 미안하다가도 제주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면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설렜고, 그 마음이 죄스러워 어디에 얘기하지도 못했다.


단단히 묶어뒀던 끈이 풀리다


드디어 출발 당일. 제주행 비행기에 앉자마자 책을 펼쳤다. 출퇴근하는 수많은 평일 중 하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음이 들뜨지 않았다. 상공에서 제주를 내려다보기 전까지는.
  
“우리 비행기는 이제 곧 제주 공항에 도착합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승무원의 안내 방송이 나왔다. 반사적으로 창문을 봤다. 맑고 투명한 바다를 지나자 제주 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직사각형의 논과 아파트들로 반듯하게 구획된 김포의 풍경과 달리, 그곳은 밭도 집도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울퉁불퉁한 돌담을 닮은 유선형의 세계를 내려다보면서 드디어 내가 제주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이곳에서 나는 아이를 찾으러 오후 7시까지 돌아가야 하는 ‘애데렐라’ 엄마가 아니었다. 
몸도 시간도 공간도 오롯이 혼자만의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이었다. 내면 깊은 곳에 잠들었던 ‘나’라는 인간이, 지극히 개인적인 자아가 깨어나는 듯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하는 순간, 아이도 남편도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엄마라는 이성과 의지로 단단히 묶였던 나의 감정과 욕구는 그렇게 봉인이 해제됐다.


별거 아닌 공항 풍경마저 사랑스러웠다.


제주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서울은 롱 패딩을 꺼내 입을 정도로 추운 반면, 제주는 여전히 초가을처럼 포근했다. 나는 한 입사 동기와 함께 급행 버스를 타고 숙소가 있는 서귀포에 먼저 가기로 했다. 가는 데만 한 시간 반이 걸리는데, 버스가 오기까지 20분이나 더 남아 있었다. 
  
동기는 시간이 너무 걸린다며 미간을 찌푸렸지만, 나는 
기다림의 시간마저 황홀했다. 혼자서 멍 때리는 게 대체 얼마 만인가. 홀로 벤치에 앉아 감격에 젖은 채로 공항 밖 풍경을 감상했다. 도로 한가운데 우뚝 선 야자수부터 ‘제주’라고 적힌 택시 번호판까지 전부 낯설고 신기했다.
  
우리를 태울 버스가 왔다. 동기와 양옆으로 떨어져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버스는 중산간을 통과해 서귀포로 가는 여정이었다. 마침 해가 지고 있었고, 멀리 보이는 한라산에 노을이 걸터앉았다. 제주의 이름 모를 산들에 펼쳐진 억새들이 반짝였다. 그 모습이 감격스러워 사파리 버스에 탄 아이처럼 창문에 매달려 사진을 찍었다. 동기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며 애써 나를 외면하려는 모습이었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된 것들


저녁 시간. 서귀포의 한 식당에서 문어숙회에 제주 에일 한잔을 곁들였고, 숙소로 돌아와서도 와인에 과일을 안주 삼아 새벽 3시까지 술자리를 이어갔다. 시시한 이야기에 깔깔 웃다가 잠시 딴생각에 잠겼다엄마가 되기 전의 나는 어떠했나. 자발적으로 신데렐라처럼 살았다. 회식이나 모임에 나가면 밤 12시를 기점으로 귀가해 하루를 손쉽게 마감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피곤하니까. 사람들은 언제든 또 볼 수 있으니까. 
  
엄마가 된 나는 왜 잠을 참아가며 이 밤의 끝을 잡고 있나. 
절실함의 차이였다. 아이를 낳은 뒤로 저녁 약속은 남북통일처럼 요원해졌다. 약속이 잡히더라도 밤 9시 전에는 어떻게든 자리를 떠야 했다. 엄마가 그리운 아이와 나의 일손을 원하는 남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좋아하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시간제한 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건 언제든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제주에서의 밤을 1초라도 더 지새우고 싶어 졌다. 돌아가지 않아도 될 때 마음껏 머물러야 했다. 공항 앞에서, 버스 안에서 제주의 풀 한 포기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쓴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 나는 교환학생 신분으로 일본에 있었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그곳에 적응하고 나니 한국의 많은 것들이 간절해졌다. 포장마차에서 후후 불어가며 먹는 오뎅부터 5초 안에 모든 게 해결되는 초고속 인터넷까지 전부 다. 1년 후 귀국해 서울의 지옥철을 탔는데 울컥했다. 순대 소처럼 빈틈없는 공간에서 서로 밀착을 허락한 채 기대고 기대게 해주는 마음씨가 얼마나 아름답던지. 한국을 떠나고 나서야 일상 속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깨달았다.


서귀포로 가는 버스에서 찍은 사진. 꿈같았던 시간.


제주에서의 첫날밤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어딘가에 메모해뒀던 문장이 떠올랐다.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 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육아의 시간은 그간 내가 지나쳐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 놓았다. 제주의 시간은 내게 무엇을 돌려줄까. 떠나온 지금이 너무나도 좋은데 아이가 기다리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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