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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더티브 Dec 13. 2018

"여보, 나 하루만 더 놀다 갈게"... 남편 반응은

[엄마의 PLACE] 애 엄마가 제주로 2박 3일 MT를 간다는 것 ②

제주에서의 둘째 날. 쇠소깍으로 갔다. 제주올레 6코스 시작점이다. 이곳에서부터 이중섭거리까지 14.4km를 완주하는 게 이날 일정이었다.

  
나는 올레든 둘레든 걷는 건 딱 질색인 사람이었다. 고도로 발달한 대중교통을 놔두고 굳이 왜 두 다리로 힘들게 걸어가는가.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MT도 일이라고 하니 눈 딱 감고 일단 걸어보기로 했다. 
  
육아는 운동 포비아인 닝겐도 걷게 하는 걸까. 생각 이상으로 즐거웠다. 걸으면 걸을수록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오롯이 두 발로 걷는다는 건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것도 제주의 바다를 옆에 끼고 걷는다는 건. 아이와 함께 이 길을 걷는 장면을 잠시 상상해봤다. 뛰어가는 아이를 붙잡으러 쫓아가고, 안 걷겠다고 떼쓰는 아이를 들쳐 안고... 여기가 제주인지 올레인지도 모른 채 애 보느라 바빴겠지. 그러니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해졌다. 
  
잠시 전망대에 서서 쉬어가기로 했다. 나는 추락주의 팻말 옆에 기대어 서서 순간을 만끽했다. ‘아이와 함께 오면 참 좋았을 텐데...’ 제주에 오면 이 생각이 자주 떠오를 줄 알았는데, 웬걸.
 ‘혼자 와서 참 좋다좋다너무 좋다그냥 좋다남편도 혼자 오라고 해야겠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겨울인데 바위틈에 들꽃이 피어 있었다. 그게 꼭 나의 마음 같았다. 


사실 올여름에도 제주에서 3박 4일간 머물렀는데, 그땐 전혀 다른 것들을 보고 느꼈다. 아이랑 같이 갔기 때문이다. 제주의 자연을 감상하기보다는, 제주를 배경으로 깔깔 웃고 뛰는 아이를 두 눈에 담기 바빴다. 심지어 아이가 파도를 무서워해서 바닷물에 발 한 번 담가보지도 못했다.      


아이와 함께 간 해녀박물관, 아이와 함께 먹은 한라봉 피자, 아이와 함께 마신 커피... 결국 그땐 아이와 추억을 공유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반대로 이번 여정은 일(?)이었지만, 온전히 제주의 모든 것을 만끽할 기회였다. 아이와 함께한 제주도 좋았지만, 아이 없이 제주를 누리는 것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선을 넘다


제주 바다를 끼고 걷는 올레길 6코스


서너 시간을 걸었다내가 다리인지 다리가 나인지 도통 모르는 호접몽스러운 통증 속에서도 끝까지 완주하겠다며 이를 악물고 걸었다마음 편히 홑몸으로 걸을 날이 또 언제 올지 모르니 한 발이라도 더 내딛고 싶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서울로 돌아가기 6시간 전이었다다리 통증과 전날 못 잔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와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처졌다저녁 늦게 제주공항까지 가서 기다리다 비행기 타고 김포공항에 내려서 또다시 집으로 갈 자신이 없었다(돌이켜 보면 피로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남편에게 다음 날 아침 비행기로 돌아가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그래ㅋ


영혼이 0.0000000001g도 담기지 않은 답장이 왔다. 'ㅋ'이 하나뿐이라는 건 남편이 원치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비행기 시간을 다음날 오전 10시로 바꿨다(늦었지만 남편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전하고 싶다).
  
숙소에서 잠시 쉰 뒤 다 같이 방어축제장으로 갔다. 거기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야 말았다. 동기가 제조한 럼앤콕을 마셔버렸다. 나는 알코올 도수가 20도 이상인 술에 취약하다. 소주는 물론 위스키, 고량주, 보드카 같은 건 치명적이다. 대학 다닐 때 지인들에게 귀가 닳도록 들은 얘기가 있다. 내가 1학년 첫 엠티 때 소주 3잔을 연거푸 들이켜고 나서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메텔로 변해 ‘안드로메다로 가겠다’고 소리쳤다는 것이다(내 기억엔 없다). 
  
그 이후로 맥주나 와인 이상의 술은 웬만해선 입에 안 대려 했는데, 이날은 40~70도 수준의 럼이 들어간 걸 마셨다. 달짝지근하기도 했고 마지막이니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이었다. 나는 럼앤콕 두 잔에 속된 말로 맛이 가 버렸다. 기자의 길은 걷고 계신 선배에게 뜬금없이 “왜 가수 안 하냐, 지금이라도 진로를 바꿔 보시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추락주의 옆에 선 애 엄마의 자태(입사 동기 제공 사진)


딱 거기까지 해야 했는데, 2차로 부채새우라는 고생대 생물처럼 생긴 갑각류를 먹으러 가서 또 소주를 한잔했다. 동기의 말에 따르면, 다들 정리 후 숙소로 돌아가는데 나만 ‘혼자서 산책하겠다’며 방향을 틀었다. 자정을 앞둔 시각이었다. ‘길도 모르면서 한밤중에 어딜 간다는 거냐’고 타일러도 막무가내였고, 결국 부장이 끌고 들어갔다고 한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그때의 마음만큼은 복기할 수 있었다. 
2박 3일이 너무 짧다는 허무함.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아쉬움. 그런 감정들 때문에 숙소로 선뜻 돌아가지 못하고 방황한 게 아니었을까. 밤 12시를 알리는 종소리에 서둘러 성을 빠져나가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본 신데렐라처럼.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다음 날 아침정해진 시간에 맞춰 김포행 비행기에 올랐다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제주를 바라보며 나는 헛된 상상을 했다


만약 엄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더 행복했을까.


아이를 낳은 뒤로 일상을 제어할 수 없을 때마다 불쑥 솟아오르는 가정법이다. 엄마만 아니면 하고 싶은 걸 하고, 가고 싶은 곳에 갈 텐데. 엄마로 사는 게 고되고 힘이 들수록 아쉬운 것들이 넘쳐흘렀다. 언제나 돌아가야 하고, 모든 선택을 책임져야 하는 엄마라는 역할이 이렇게 무거운 줄 몰랐다. 항상 긴장하고 사는 게 버거워질 때마다, 다 내려놓고 싶어 질 때마다, 나는 이뤄질 수 없는 가정을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더는 엄마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걸. 말랑말랑한 볼, 보드라운 피부, 깔깔거리는 웃음, “엄마가 제일 좋아”라고 말하는 목소리. 
아이가 주는 감각 없이 내 세계는 존재할 수 없으며, 아이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게 됐다. 혼자만의 자유에 유혹되면서도 결국 다시 돌아가는 이유다. 
  
가끔은 미치도록 혼자이고 싶지만, 이 아이의 엄마이고도 싶다. 이렇게까지 힘들 줄 몰랐지만, 내가 이 세상에 데려왔으니 할 수 있는 데까지 지켜주고 싶다.
  
“엄마, 보고 싶었어.” 집 현관문을 여니 아이가 달려 나와 안아줬다. 
그렇게 다시 엄마로 돌아왔다


분명 제주 바다에 있었는데 눈 떠보니 볼풀이었다... (털썩)


결과적으로 제주에서의 2박 3일은 아이와의 시간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 놓았다다만 제주에 가기 전과는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다. 엄마라는 책임감이 느슨해지고나의 욕망을 위한 공간이 조금 더 늘어난 기분이다. 잔뜩 긴장했던 어깨도 힘이 풀렸다. 허파에 제주 바람이 든 걸까. 나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제주 올레의 모든 코스를 다 걷고 싶다내년부터는 남편과 번갈아 가며 홀로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제주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경애의 마음>이란 소설을 읽었다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받은 경애는 상수에게 마음을 어떻게 폐기하느냐고 물었다상수의 답이 인상적이어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다.


"폐기 안 해도 돼요.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 김금희 <경애의 마음>


나는 열심히 엄마로 살아가고 싶다. 그러나 그때 제주에서 느낀 마음을, 다시 제주에 가려는 꿈을 폐기하지 않기로 했다. 두 개의 욕심 다 지킬 생각이다. 떠나려는 이기심과 돌아오려는 이타심의 줄다라기 어쩌면 엄마라는 인생의 숙명 같은 것일지도.


[이전 글 : 애 엄마가 제주로 2박 3일 MT를 간다는 것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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