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책장] 마이라 스트로버 회고록 <뒤에 올 여성들에게>
일을 하지 않는 내 모습은 단 한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내 커리어는 흔들림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이와 커리어 사이에서 나만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육아휴직이 끝나고 복직한 지 한 달 만에 알게 됐다. 여성이 일과 육아를 함께 하며 살아간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결코 노오오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일과 육아 사이에 끼어 나는 늘 어쩔 줄 몰라 했다.
가장 답답한 건 롤모델의 부재였다. 나는 일을 잘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아이가 없는 것처럼 일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도 육아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의 일하는 엄마 중 슬프게도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소진되다 결국 나도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가 초등학교 갔을 때쯤 나가 떨어져버리는 건 아닐까. 답답함과 두려움이 참을 수 없이 차올랐을 때 나는 퇴사를 선택했다. 다른 길을 찾아보고 싶었다. 후배들은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질 수 있도록.
<뒤에 올 여성들에게>를 읽으며 생각했다.
‘그래 바로 이런 이야기가 필요했어.’
이 책의 저자 마이라 스트로버는 노동의 관점에서 성차별주의와 싸워온 경제학자다. 가사노동의 가치를 정량화 하고, 돈이 잘 벌리는 특정 직종에는 남성이 많고, 어떤 직종에는 여성이 많은 이유를 연구했다. 또한 보육 서비스 개선을 위해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경제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 책의 주요 배경이 1970~1980년대라는 것, 그녀와 내가 다른 시대 사람이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시대는 달라도 그녀와 내가 처한 현실은 슬프게도 그다지 다르지 않으니까. 나는 든든한 멘토를 만났다.
<뒤에 올 여성들에게> 감상 포인트 셋.
스탠퍼드대학교 경영대학원 최초의 여성교수가 쓴 회고록이라고 하길래 흔한 ‘성공신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이 얘기는 하나도 없이 명예 남성처럼 일해서 성공한 이야기나, 모성의 힘으로 노오오력 해서 모든 걸 극복했다는 이야기(주로 애들이 명문대 갔다는 결론으로 끝나는).
책은 1970년, 마이라 스트로버가 종신교수 트랙 고용을 거부당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뒤에 올 여성들에게>는 두 아이의 엄마인 대학교수가 어떻게 여성을 둘러싼 차별과 모순을 극복하고, 일과 가족 사이에서 살아남았는지 생생하게 들려준다.
결혼 후 아이를 언제 가질 건지 계속 압박 받고, 임신 사실을 숨긴 채 고용 면접을 보고, 아이가 태어나자 도저히 일할 시간을 낼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고, 출산휴가 정책이 없는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 낳자마자 일에 복귀하고... 마이라가 아이를 낳은 게 1960대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이 처한 현실과 놀랍게도 비슷하다.
현명하고 유능한 여성인 마이라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게다가 엄마라는 이유로 성차별이라는 자물쇠에 번번이 가로막힌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함께 가슴을 쳤다.
마이라는 말한다. 자신에게는 종신교수가 될 수 있는 열쇠가 있었지만 아무리 자물쇠에 열쇠를 열심히 넣고 돌려도 문을 열 수 없었다고. 왜냐고? 자물쇠가 바뀌어 버렸으니까.
마이라가 버클리가 아닌 팰로앨토에 살아서 종신교수 트랙에 오를 수 없다고 말하던 버클리대 경제학과장은 마이라가 ‘안 되는’ 진짜 이유를 말해준다.
“어린아이가 둘 있는 데다, 한 명은 돌도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마이라는 속으로 생각한다. 자신이 만일 어린아이가 둘 있는, 그 중 하나는 아직 갓난애인 ‘남자’였다면? 아마 학과장은 마이라가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게 기를 쓰고 도와줬을 거라고.
여성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남성과 똑같은 일을 하고도 낮은 임금을 받는다. 반면 남성은 처자식을 부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고용안정을 보장받고, 더 많은 임금을 받는다. 2018년 현재, 한국 여성은 남성과 똑같은 일을 18개월 동안 해야 남성의 1년치 임금을 받을 수 있다.
일하는 엄마인 마이라는 일터에서도 가정에서도 슈퍼우먼이 되어야 했다. 시터가 있다고 해서 육아와 가사의 부담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니다. 게다가 사람을 고용하는 건 중산층 여성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마이라의 아이를 맡아준 시터는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가족에게 맡겨야 했다. 여성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여성의 희생이 필요하다.
마이라는 연구 활동과 육아, 집안일을 병행해야 했다. 반면 남편 샘은 오로지 자신의 일에만 집중했다. 마이라는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잠을 줄이면서 모든 짐을 홀로 떠안는다. 의사인 남편이 자신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으니까. 갈등을 원치 않으니까. 페미니즘 경제학 연구를 하면서 그녀는 점점 자기 안의 모순을 깨닫는다.
“진실은 그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보여주는 모델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교육을 아주 많이 받은 전문직 여성조차 남편을 따라 움직였다. 남편의 커리어가 우선이었다.” p.259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겠다는 마이라에게 “모두가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할 권리가 있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을 인용하며 대학교수의 길을 제안한 건 다름 아닌 샘이었다. 하지만 마이라가 힘과 영향력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보자 샘은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결국 샘은 이혼을 요구한다.
“나는 잘못된 결혼을 한 것 같아. 나는 자기 커리어가 이렇게 힘겨운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 나와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어. 나와 똑같아지려는 사람이 아니라.”
샘은 말한다. 당신이 커리어를 쌓는 데는 아무 불만이 없지만, 내가 집안일을 더 할 수는 없다고. ‘아내의 커리어를 응원하고 지지한다’는 말은 너무 쉽다. 반짝이는 말이 진정성을 얻으려면 육아와 집안일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 구체적이고 치열한 고민과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남편과 아내 모두 자신의 커리어를 지키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서로의 ‘헌신’이 필요하다. 마리아는 말한다. 누구와 결혼하느냐 혹은 동반자가 되느냐가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아이를 빨리 갖느냐 늦게 갖느냐는 고민보다 중요한 건, 알맞은 파트너를 찾는 거라고.
“힘겨운 커리어, 아이와 가족을 모두 건사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모두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두 누리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가족과 힘겨운 커리어에 함께 헌신한다면 양쪽 다 성공하는 것은 가능하다. 단기적으로 여가 활동을 거의 포기해야 할 수도 있고, 두 사람 다 출장이 잦은 일을 한다면 ‘세 번째 부모’를 고용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공할 수 있다. 핵심은 서로 헌신하는 것이다. 각자 상대의 커리어가 핵심이라는 데 동의해야 하며, 모두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가족에게 쏟아야 한다.” p.390
커리어와 가족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부부가 세심하게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끊임없이 보정해 나가야 한다는 것. 이 부분에 깊이 공감했다. 남편과도 공유하고 싶은 대목.
책에는 답답한 고구마만 있는 건 아니다. 마이라가 성차별이라는 이름의 자물쇠를 부수고 새로운 문을 만드는 모습을 보며, 후련하고 통쾌하고 찡했다. 이 모든 건 마이라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자매’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어느 날, 마이라는 놀이터에서 아이 하원을 기다리다 같은 반 남자애 엄마와 이야기를 나눈다. 마이라의 사정을 들은 루스는 또 다른 여성 지인을 통해 마이라가 스탠퍼드대 교수 면접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들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마이라 같은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일터에서 평등을 누리려면 사회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혼자만의 힘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 마이라의 인생 고비마다 다른 여성들 그리고 마이라가 추구하는 가치에 공감하는 남성들이 마이라의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서로의 고통을 알아보고 연대하는 것. 자매애는 참 힘이 세다.
“셰릴 샌드버그의 <린 인>이 성공을 거둔 것은 어려운 직업에서 성공하고 싶어 하는 여성의 강렬한 열망을 증명한다. 하지만 성실함과 끈질긴 노력, 효과성으로 직업에서 형평성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환경은 무척 중요하다. 여성이 힘을 얻으려면 우호적인 법적 환경, 젠더 평등을 촉진하는 사회 이데올로기, 여성의 열망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제도, 여정 내내 손을 내밀어주는 남성과 여성 동지에게도 의존해야 한다.” p.385
398쪽 분량의 두꺼운 책을 단숨에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도 ‘뒤에 올 여성들에게’ 힘을 보태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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