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책장] 신나리 <엄마 되기의 민낯>
광화문의 한 치킨집. 일로 연을 맺은 몇몇이 모여 연말 송년회를 열었다. 내 테이블에는 아내이자 엄마인 여성 2명(나 포함), 아내이지만 엄마는 아닌 여자 2명이 앉았다. 자연스레 결혼, 임신, 출산, 육아를 주제로 대화가 이어졌다.
아직 출산을 겪지 않은 한 여성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슬슬 2세를 계획하려는데, 아이를 낳는 게 너무 두렵다는 고민이었다. 두려움의 근원은 두 가지였다.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쓸 수 없는 프리랜서여서 아이 낳고 돌아오면 일할 곳이 없을까봐. 그러다가 홀로 집에서 독박육아를 하게 될까봐.
이미 출산을 겪은 한 여성은 마시려던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단호히 답했다.
“엄마의 삶만 흔들리는 거, 거기에서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는 거예요. 아빠의 삶도 휘청휘청 해야 해요. 그래야 불안할지언정 함께 오래갈 수 있어요. 혼자 고민하지 말고 남편에게 ‘당신은 뭘 할 건지’ 물어보세요.”
경험에서 진하게 우러나온 현실 조언이었다. 엄마는 아이를 위해 삶의 궤도를 틀 준비를 하는데 아빠만 꼼짝 안 한다면? 두 사람의 간극은 출산을 계기로 한없이 벌어지게 되고, 부부의 불행은 거기서 시작된다는 것.
돌직구 조언을 날린 그는 <엄마 되기의 민낯>의 저자인 신나리씨. 이 책은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거나, 노오력으로 대기업 CEO 성공신화를 이룬 주인공의 자서전이 아니다. 소속도 정체성도 없이 살림하고 아이를 돌보며 살아가는 한 사람의 기록물이다. 그림 하나 없이 글로만 363쪽이 가득 차 있지만, 읽다 보면 내가 활자를 눈으로 훑고 있다는 감각을 잊은 채 그의 현실세계로 빠져들고,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그의 내면에 함께 요동치게 된다.
특히 육아의 책임을 남편과 동등하게 지기 위해 분투한 역사가 압권이다. 부모가 될까 고민하는 사람, 부모가 될 사람, 막 부모가 된 사람 모두 읽어보면 좋을 교과서 같은 책. 그 정도로 생생하고 정확하고 적나라하다. <엄마 되기의 민낯> 감상 포인트 셋.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엄마들의 각종 사연을 읽다가 남편을 ‘아들’이라고 부르는 걸 본 적이 있다. 집에 오면 대자로 뻗을 줄만 알지 애 재울 줄은 모르는 남편. 그런 순간마다 싸우기 지쳐 아들 하나 더 키운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엄마 되기의 민낯> 저자도 출산 후 독박육아에 고립됐지만 남편을 아들이라며 포기하지 않았다. 남편에게 진정한 아빠가 될 기회를 주기 위해 끝까지 묻고 싸웠다. 그는 한 사람이 희생하는 평화보다 다 같이 나아가는 불화가 가족을 더욱 단단히 묶어줄 거라고 믿었다. 남편이 서툴러도 계속 육아를 맡기고, 책임을 나누고, 함께 가정을 돌봤다. “그 없이 못 살아서”가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아이에 대해 아빠가 되라는 거, 우리가 이룬 가족이 가족답게 살기를 바라는” 진심 때문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왜 그리 남편을 못살게 구느냐고 말한다. 아이와 보내야 하는 시간이, 성인으로서 자기 돌봄이 왜 ‘못살게 하는’ 요구로 둔갑하는 걸까. 이는 육아라는 위대한 경험에 대한 모욕이며 남편을 성숙한 성인이 아니라 아이로 취급하며 무시하는 처사 아닌가. 나는 일생에 두 번 다시 겪을 수 없는 어린 자식과의 소중한 시간을 남편에게도 주고 싶다. 또한 남편을 성인으로서 존중하고 싶다.”
나 역시 아이를 낳고, 남편에게 서운한 감정이 울컥 밀려오곤 했다. 다른 살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데, 육아만큼은 딱 내가 알려준 것만 성실히 해냈다. 주변에서는 뭐라도 ‘도와주는 게’ 어디냐며 남편을 극찬했다.
한동안은 ‘좋은 남편’이라며 감사하려 노력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의식이 뚜렷해졌다. 어린이집 도시락통은 닦지만 어린이집 견학 일정은 확인하지 않고, 밤에 잠을 줄여가며 음식을 만들지만 아이를 위한 반찬은 무얼 만들어둘지 계획하지 않는 기이한 현상. 나는 아이의 생애주기에 맞춰서 해줘야 할 걸 놓칠까봐 늘 조사하고 공부하지만, 남편은 내가 그걸 알려주기만을 기다리는 상황. 노동은 있는데 결정은 하지 않는 구조.
고민과 사유, 지루한 토론 끝에 무엇이 우리는 갈라놓았는지 깨달았다. 궁극적으로 육아는 남편의 입장에서 ‘해주는’ 일이라는 것. 그와 나의 차이였다. 아내와 같이 해야 하는 일이지만, 결정적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는 게 남편의 육아였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남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하다못해 추운 날씨에 아이가 장갑을 끼지 않고 나가면 ‘애 감기 걸리겠네’라는 말을 듣는 건 남편이 아닌 내 몫이다. 책임이 없으니 나보다 육아에 대한 장악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었을까.
그걸 알게 된 후로 나는 남편이 육아의 책임을 늘려갈 수 있도록 가정개혁(?)에 나섰다. 남편에게 2019년도 유치원 입학 추첨의 전권을 맡긴 것. 정보력과 실행력에서 다른 부모들(정확히는 다수의 엄마들)보다 뒤처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눈을 질끈 감고 맡겼다. 이럴 수가. 남편이 나보다 더 부지런히 조사하고 꼼꼼히 자료를 챙겨 지원한 덕에, 생각지도 못한 좋은 곳에 무사 합격했다.
남편이 육아에 대해 책임질 기회를 그동안 내가 노파심에 주지 않았던 건 아닌지 돌이켜보게 됐다. 나 또한 남편만 믿고 무지했던 가사 영역을 숙련해가는 중이다. 그렇게 각자의 책임을 늘려가고 있다. 분담하며 외면하는 게 아니라 나누되 책임을 함께 지는 법을 익혀가는 중이다.
처음부터 아이 키우기를 잘하는 엄마는 없다(고 믿는다). 기저귀를 잘못 입혀 이불에 대참사가 일어나기도 하고, 분유 물 온도를 잘못 맞춰 아이가 먹다가 경기를 일으키기도 하면서 배워나간다. 매일 먹이고, 입히고, 치우고, 재우는 일을 반복하기에 차츰 손에 익어가는 것일 뿐, 유전자 어딘가에 숨어 있던 육아 능력이 아이를 낳으면서 소환되는 게 결코 아니다.
엄마의 육아가 숙련노동이라면, 아빠의 육아도 마찬가지다. 계속해야 실력이 는다. 반복이 곧 답인데, 그러려면 아이와 집에서 부대끼기 위한 시간과 체력을 투입해야 한다.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맡기지 않으면, 계속 남편은 육아를 하지 못하는 사람에 머무르게 된다.
저자는 투쟁 끝에 남편의 육아휴직을 쟁취했지만, 며칠간은 남편이 못 미더워 집 밖으로 나서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계속 맡겼다. “깨끗하고 산뜻하던 집이 망가져 갔지만” 후퇴하지 않았다. 두 달 뒤, 남편은 딸아이의 머리를 묶고 국 몇 가지를 끓일 수 있는 사람이 됐다. 무엇보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 전에는 예뻐하기만 하고 화 한 번 안 냈는데, 육아를 적극 하면서 “말을 안 듣네”라는 푸념도 하고 아이에게 목소리 높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저자의 남편은 아이를 향한 감정이 애틋해졌다고 고백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간은 서로의 속에 침투해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일으켰다. (...) 두 달 사이, 남편이 아이에게 느끼던 사랑, 그 사랑의 성질이 달라졌다. 아이를 낳았다고 자동으로 모성애가 생기는 게 아니듯, 아빠에게도 부성애가 절로 생기는 게 아니었다.”
내가 엄마가 되어 가듯이 남편도 아빠가 되어갈 수 있다. 아빠에게도 부성애를 키우고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다.
2세를 맞이하기로 결정한 시기, 남편은 어떻게 하면 일을 늘려 돈을 더 많이 벌까 고민했고, 나는 어떻게 하면 일을 더 줄이고 애를 볼까 알아봤다. 남편은 커리어를 더 키워하는 방향으로, 나는 축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했다.
애 낳고 육아 지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우리는 방향을 틀었다. 함께 흔들리기로 했다. 내가 육아휴직을1년 쓰는 동안 남편은 저녁 회식에 대부분 불참했다. 내가 저녁이라도 편히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내 복직과 맞물려 남편은 4개월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애가 세 돌이 지난 지금도 남편은 퇴근 후 곧장 집으로 온다. 업무를 못 끝내면 일감을 집으로 가져와 애가 잠든 후 마무리한다. 저녁 약속이나 술자리는 잘 잡지 않는다. 그런 남편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가장(?) 앞길 막을 일 있냐’는 협박과 ‘제발 한번만 외출을 허락 해달라’는 간청까지 받곤 했지만, 이 자리에서 고백하건대 내가 시킨 게 아니다. 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누군가는 홀로 육아의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걸, 남편 스스로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특히 남편은 직접 육아휴직을 하는 동안 그 잔인한 구조를 온몸으로 깨달았고, 애가 좀 클 때까지는 같이 고생하자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2개월간 육아휴직한 저자의 배우자도 비슷한 경험을 했나 보다.
“육아휴직이 끝난 후에도 남편을 일찍 집으로 오게 하는 건 나의 요구가 아니었다. 눈에 밟히는 아이, 엄마로는 대체 불가능한 아빠라는 존재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이었다. 아이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남편은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주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줄여가는 근무시간만큼 후퇴해 가는 자신의 커리어 사이에서 갈등했다. 육아는 ‘남편의 문제’가 되었다.”
한 사람이 KTX처럼 빠르게 직진할 수 있도록 밀어주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우리 부부는 비둘기호처럼 나아가기로 했다. 느리지만 함께 달리려 한다. 속도가 더디고 빙 돌아가야 할 테지만, 적어도 누군가 멈추거나 방향을 틀지 않아도 되니까. 끝까지 함께 갈 수 있으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추천
- 마음의 준비는 안 됐는데 2세 계획이 있다면
- 출산 후 배우자와의 불화로 힘들다면
- 육아는 엄마의 일이라는 통념에 지쳤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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