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책장] 젠더 고정관념 없이 아이 키우기 <핑크와 블루를 넘어서>
첫째 딸아이는 자동차나 공구놀이 장난감을 유독 좋아했다. 요즘은 친구들과 유튜브의 영향으로 주방놀이를 즐기기도 하지만 여전히 과격한 싸움 놀이와 공룡 놀이를 가장 좋아한다.
번개걸이 아닌 번개맨의 열성팬이 되어 한 달 내내 번개맨 옷만 입은 적도 있다. 원피스와 치마를 입는 것은 질색하며 여유 있게 맞는 편한 바지와 티셔츠를 고집하는 아이다.
이런 딸아이의 취향을 보고 어른들은 한결같이 "여자애가 특이하다"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내가 둘째 아들을 낳자 "얘가 남동생을 보려고 그랬나 봐"라는 말이 이어졌다.
둘째 아이는 첫째 아이보다 대근육 발달이 현저히 빨랐다. 뒤집기도, 기기도, 걷기도, 뛰기도 2-3달 정도 일찍 그리고 빠르게 익혀나갔다. 처음 뒤집기를 한 날부터 줄곧 "역시 남자애라 빠르다"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난 이런 말을 들으면 어색하게 웃어넘기곤 한다.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와 취향이 비슷한 여자아이들이나 반대로 주방놀이를 가장 좋아하고 정적인 남자아이들을 많이 봤다. 친한 친구의 딸은 둘째보다 대근육 발달이 한 달 넘게 더 빠르기도 했다. 꼭 여자, 남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성향, 특징이라는 걸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딸, 딸, 아들 삼 남매 중 둘째인 난 자라면서 한 번도 형제간에 차별을 받은 적이 없다. "여자니까 00 해야 해, 00 하지 말아야 해"라는 말을 들은 적도 거의 없고. 나의 경험 때문인지 내 아이들이 젠더 고정관념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 점점 불편해졌다.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어 그런 말들을 두 배로 듣게 되니 불만은 점점 쌓여갔다.
그리고 더 궁금해졌다. 정말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는 선천적인 취향·재능 등에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 또 이런 젠더 고정관념이 아이들의 삶에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이런 말들로부터 아이들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 같은 것들. 그리고 이 질문의 답을 갖고 있는 책을 만났다.
'젠더'가 아이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20여 년간 연구해 온 발달심리학자이자 두 딸의 엄마인 크리스티아 스피어스 브라운의 <핑크와 블루를 넘어서>. 그는 책의 절반 이상을 할애해 과학적 근거를 조목조목 대가며 선천적인 젠더 차이는 거의 없다고 강조한다.
"하이드는 백만 명 이상의 표본을 대상으로 124가지의 젠더 차이를 비교했고, 78%의 연구에서 젠더 차이가 전혀 존재하지 않거나 극히 약간만 존재한다고 밝혀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다시 말해, 남녀 간의 차이를 밝히기 위해 시행한 연구 중 대다수가 실제로는 젠더 차이가 전혀 없거나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연구 중 대부분은 통상 남자와 여자가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고 여겨지는 영역들, 즉 감정, 언어 능력, 수학 능력 등에서 젠더 차이를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p116
"2005년에서 2007년까지 실시된 전미수학 표준 시험을 분석한 결과 수학 능력에서 젠더 차이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학과 관련된 젠더 차이가 있기는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정관념과는 정반대로 실제로는 고등학교 시절 내내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보다 수학 과목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 p122~123
"성차 연구자이자 매사추세츠 애머스트 대학교의 신경내분비 연구 센터의 센터장 헤이르트 더프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수십년 동안 연구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남녀 간 두뇌 차이 대부분의 기능적 의미를 알아내지 못했다". (중략) 그렇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사이에는 차이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실제 차이는 대중매체에서 보도하는 것보다 훨씬 작고, 어느 누구도 이 차이가 남자아이, 여자아이에게 정확히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부모로서 맡은 바 임무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모든 차이는 경험이 만들어 낸다." p188~189
위 연구 결과들처럼 남성과 여성의 선천적인 차이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자니까 이렇고, 남자니까 이렇다'라고 너무나 쉽게 말하곤 한다. 책은 이에 대해 선천적으로 범주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 가장 그룹을 나누기 쉬운 기준인 '젠더'로 범주를 나누면서 젠더에 대한 강한 고정관념이 형성됐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마치 남자아이들을 위한 것 같은 파란색 물건들과 여자아이들을 위한 것 같은 분홍색 물건들 그리고 '예쁜 여자아이', '강한 남자아이' 같은 말로 빈번하게 젠더를 강조한다. 그러면서 젠더를 기준으로 나눠진 남성과 여성이라는 범주는 더욱 찾기 쉬워지며 강고해진다. 사실은 실재하지 않는 젠더 차이인데 말이다.
이런 연구 결과, 나만 처음 본 걸까? 그동안 우리가 '남녀는 차이가 없다!'는 연구 결과를 접하지 못 한 이유가 있었다.
"젠더 차이를 다룬 연구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실제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 사이에는 차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젠더 차이를 찾지 못한 수백 건의 연구는 학술지에 잘 게재되지 않을뿐더러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할 가능성 또한 낮다." p138
조금 더 나아가 얘기하면 젠더 고정관념이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때 가장 걱정되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한계. 첫째 딸아이가 조부모님과 장난감을 사러 다녀왔을 때 이야기다. 공구놀이 장난감을 갖고 싶어 했던 아이였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는 "여자아이한테 그런 걸 사주기가 좀 그래서"라는 이유로 아이가 원하지도 않는 소꿉놀이 장난감을 골라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 뛰어들어와 당장 장난감을 뜯어달라고 했을 아이는 입을 삐쭉거리며 시무룩해 했다. 결국 포크레인과 공구놀이 장난감으로 바꾸고서야 아이의 마음이 풀렸다.
지금은 그저 장난감일 뿐이지만 이런 일들이 빈번해지면 딸은 딸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하고 싶지만 난 여자니까 혹은 남자니까 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생길 거라는 우려가 커졌다. 훗날 내가 아이들의 다양성을 얼마나 포용해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젠더 고정관념이라는 작디작은 틀로 섣불리 재단해 아이들의 꿈에 한계선을 긋고 싶지는 않다.
"젠더 고정관념에 입각한 광고를 본 여학생들은 젠더 중립적인 광고를 본 여학생들에 비해 수학 문제를 더 적게 맞혔을 뿐 아니라, 언어 기술이 필요한 직업들에 관심을 더 보인 반면 수학 기술을 이용하는 직업들에 관심을 덜 보였다. (중략) 그렇다면 젠더 고정관념들을 평생 동안 접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한번 상상해 보기 바란다." p323
두 번째는 혐오. 자기혐오와 타인에 대한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가치관이 성숙하기도 전에 '혐오'를 먼저 배우게 될까 봐 걱정이 크다.
이 시대는 자존감을 강조하면서도 타인을 외적으로 평가하는 잣대 또한 혹독해서 아이들이 자기혐오에 빠지기 쉽다.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여자아이들이 불량 화장품으로 어설프게 얼굴을 치장하고 다이어트를 한다며 밥을 굶는 일이 허다해졌다. 또 남자아이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조금이라도 더 키가 커지려고 노력하는 현실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남자아이들이 용감하고 중요한 일을 도맡아 하는 이야기를 읽을 때 여자아이의 자존감에는 어떤 일이 생길까? 모든 책이 예쁘고 날씬한("그 나라에서 가장 어여쁜") 여자아이들만을 그릴 때 어떤 일이 생길까? 모든 남자아이들이 강하고 용감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읽을 때 남자아이의 자존감에는 어떤 일이 생길까?" p256
그래서 이왕이면 아이들에게 화장이나 명품 옷 같은 겉치레보다는 내면이 더 중요하다고 자주 얘기해주려고 한다. 또 '남자니까 가장이 돼야지' 혹은 '여자니까 밥하고 애를 봐야지' 같은 부당한 성 역할에 대해서는 가벼이라도 절대 얘기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젠더 교육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여자나 남자이기 때문에 꼭 해야 하는 것, 꼭 해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없다는 걸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도록 생활 환경을 조성해나가려고 했을 뿐. 하지만 언제, 어디서 아이들에게 젠더 고정관념이 훅 치고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을 왕왕 겪다보니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필요성을 느꼈다.
"젠더 고정관념은 아주 미묘하고 거의 통제가 불가능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젠더 고정관념을 드러내는 태도는 일산화탄소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무색무취의 상태로 집 안에 스며들어 아무도 모르게 모든 사람을 중독시키기 때문이다." p286~287
<핑크와 블루를 넘어서>는 젠더 고정관념에서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우기 위해 읽어야 할 지침서이기도 하다. 실제로 두 딸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자는 자신이 어떻게 아이들을 대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바로잡아주는지 등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저자는 아이들에게 mailman, garbage man, waitress 같은 단어를 mail carrier(우편배달원), garbage collector(쓰레기 수거인), waiter(종업원)로 지칭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소방관 아저씨, 경찰 아저씨, 간호사 이모 같은 말을 아저씨나 이모를 빼고 쓰는 정도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아이들이 젠더 고정관념이 짙은 말을 들었을 때는 곧바로 "꼭 맞는 말은 아니다"라고 바로 잡아주거나 아이가 선물 받은 바비 인형을 몰래 치워버리기도 한다.
'뭘 이렇게까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젠더 고정관념은 일상에서 통용되는 불편한 관습을 고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개선해 나가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랄까.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일상을 고쳐나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나도 '예민하고 유별난 사람'이라는 비난이 두려운 게 사실이다. 이 책에서 가장 반가웠던 부분은 저자가 단지 연구자나 학자가 아닌 부모로서의 고민도 고스란히 책에 담았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아이들이 젠더 때문에 제한받지 않고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시냅스를 강화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려면 매일 밤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거나 아이와 레슬링을 하고 아이를 힘껏 껴안아줘야 한다고.
또 부모가 자기 자신의 고정관념을 먼저 확인하고 아이들에게 젠더를 덜 강조하자고 하면서 유능한 역할 모델과 불안에 대안이 되는 설명을 제시하자고 강조한다. 무조건적인 배격이 아닌 내 삶에서 긍정적인 해답을 찾아가게 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고민스러운 점은, 나 자신이 이상한 엄마나 며느리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내 딸들이 '이상한 아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중략) 나는 젠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과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것 사이에서 늘 아슬아슬한 곡예를 할 수밖에 없다." p10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이 책의 또 다른 목표다. 각각의 아이들을 대할 때 젠더를 덜 강조하기, 그러면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정확히 인식하고 조화롭게 살기." p34
이 책이 궁극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아이들의 다양성 존중이다. 모든 게 비슷해 보이는 동성의 두 아이가 있어도 그 아이들은 각각의 빛나는 존재라는 것. 내가 성평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거창한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한 명, 한 명 소중한 아이들을 젠더 고정관념에서 자유롭게 키워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모두의 삶이 젠더 고정관념이라는 그늘 안에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이를 거부하고 다양한 삶을 인정한다면 아이들이 살아갈 삶뿐만아니라 우리의 삶도 더욱 건강하고 풍요로워 지리라 믿는다.
"과학은 명백하다. 하지만 고정관념은 대개 생물학을 이기고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고정관념들과 싸우는 일이 힘들다 하더라도, 어땠든 계속 열심히 싸우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이것이 훌륭한 싸움이며, 궁극적으로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남성적 특성과 여성적 특성을 둘 다 갖춘 사람들. 단호하고, 독립적이고, 다른 사람들 돌보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평생 동안 잘 살아간다. 이들은 더 행복하고,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더 낮고, 만족스러운 직업을 가질 가능성이 더 놓다. 또한 이들은 더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양육을 더 보람있게 느끼고, 더 건강한 신체를 가진다. 이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갖는 바람이기도 하다." p367
이런 사람들에게 추천
1. '예쁜 딸, 씩씩한 아들'을 강조하는 게 불편하다면
2. '딸 or 아들이라 그래' 젠더 고정관념에 반박하고 싶다면
3. 아이들이 젠더 고정관념에서 자유롭게 자라길 바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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