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tif Jan 04. 2024

넓은 마당에서 들어오는 낮 햇살 밤 달빛

Ray & Monica's [en route]_94


다시 정주 

  


자발적인 노매드 생활을 택한 사람들은 정주생활의 장점인 안정감을 일정 부분 희생함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이들이지 싶다. 하지만 뿌리를 잘라서 부유하는 방식인 만큼 다양한 이유로 일정 기간 정주가 필요해지기도 한다.     

이탈리아만큼이나 긴 멕시코의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의 남쪽 도시 La Paz에 도달했을 때 아열대 사막 종단을 시작한 지 이미 2달이 지났던 때라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다. 단지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빌렸던 숙소를 사흘 연장하고 다시 닷새를 더 연장했다. 반도의 최남단을 돌아오는 여정으로 일주일을 남겨두고 있었다. 종주를 마치기 전에 다시 정주의 유혹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머무는 동안 아들 또래인 숙소 주인 옥스나르(Oxnar)와 종종 대화를 나누었다. 수의학을 전공한 그는 동물에게 남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식물 전문가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사막식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더불어 사색적이기까지 해서 짧은 대화에서 조차도 서로 흡족한 경우가 많았다.     

"사유는 나를 증오하게 만들어요."

"하지만 그 사유가 당신을 강하게 만들 거야. 스스로 그 증오를 이길 수 있을 만큼..."

"세상은 한 개인을 쉽게 잊고 말지요."

"그러나 당신은 세상이 쉽게 잊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내가 숨기기로 한 절망에 건배를!"

"희망이 절망보다 크면 절망은 저절로 숨는다. 당신의 희망을 위해 건배!"     

내성적인 그가 뚝뚝 던지는 한마디에 짧게 답하는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과 손님' 이상의 감정이 자란듯 싶다.  우리는 대화뿐만 아니라 함께 식사하고, 등산 가고, 공연 가고, 강의에도 함께 갔었다. 두 번 연장한 체류 기간도 끝나고 우리가 떠나고자 할 때 옥사나르가 말했다.      

"제 생일이 29일이에요. 29일까지 돌아와 주세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케이크가 있는데 그것을 선물해 주세요!"

그의 뜬금없는 제안에 답했다.

"우리가 돌아와도 묵을 곳이 없잖아. 이미 숙소는 모두 예약되었으니..."

"걱정 마세요. 제가 준비를 해둘게요. 새로운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내가 간혹 사용하던 안채의 공간을 리뉴얼 하려고 해요. 돌아오기 전에 그곳의 리뉴얼을 마쳐놓을게요."

"우리가 라파스로 되돌아오면 한 달 정도 이 도시에 더 머물려고해. 그동안 좀 지쳤거든."

"그럼. 그곳에 계시면 되죠."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9년쯤 더 여행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당신 집에 계속 있을 정도의 경제적 형편이 되지는 못해."

"걱정 마세요. 제가 그 형편이 되는 정도로만 리뉴얼 시켜놓을게요."

"그럼 좋지. 우리는 거실 한쪽만 사용해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의 생일에 맞추어 돌아오지 못했다. 대중교통이 들어가지 않는 곳을 히치하이크로 들어갔다가 나오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그 사실을 미리 알렸다. 미안한 마음으로 우리가 돌아왔을 때 그가 말했다.     

"오늘 밤, 제 생일 파티가 있어요. 빨리 리뉴얼을 마친 집으로 안내할게요. 케이크를 사러 가야 할 테니까요."     

그는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생일파티를 미루어 두었던 것이다. 그가 안내한 우리의 공간은 4성급 호텔 스위트룸에 버금갈 만한 공간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열심히 공사를 마쳤습니다. 키친은 4구 가스레인지를 두었고 후드는 충분히 넓은 것으로 했습니다. 싱크 불도 넓게 했고 수전도 아주 편리할 거예요. 냉동실과 냉장실이 있는 새 LG 냉장고를 준비했습니다. 키친은 레일 조명으로, 거실에는 천장조명과 플로어 스탠드를 함께 넣었어요. 침실은 분리했고 물론 화장실과 샤워룸도 편리한 구조가 될 수 있도록 했어요."     

나를 위해 책상을 별도로 들였다고 했다. 더불어 책 몇 권이 놓인 서가는 아내를 위해서, 목검은 나의 아침 운동을 위해 준비해두었다고 했다.     

그의 마음을 담은 공간에서 닷새를 보냈다. 밤에는 침대에 누워서도 달을 볼 수 있다. 아내는 햇살이 잘 드는 거실에서 하시엔다풍 넓은 정원과 마당을 바라보면서 보내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수탉 두 마리와 암탉 한 마리는 수시로 거실 앞으로 찾아와 목청을 뽐낸다. 김치를 담그면서 나온 배추나 과일 껍질을 챙겨주는 아내에게 더 바랄 것이 있다는 발걸음 같다. 아마 내일은 특별히 구해온 스시용 쌀봉지가 다시 좀 축나있지 싶다.      

#정주 #라파스 #세계일주 #멕시코여행 #바하칼리포르니아반도 #BajaCaliforniaSur #모티프원

작가의 이전글 La Paz에서 한 달을 더 머문다면 그것은 당신 때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