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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tif Nov 07. 2024

만 가지를 행하는 여행

Ray & Monica's [en route]_253

십자가의 길(Calle Los Pasos)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 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새로운 도시를 대면한 설렘이 이렇게 지속된 것은 오랜만이다. 어제의 새로운 대면이 다음날 더 새로운 것들로 덮여 어제가 금방 잊히는 시대에 참 이상한 일이다 싶다.


안티구아를 대면하면서 내가 갖출 수 있는 가장 겸손하고 격조 있게 다가갈 것이라 다짐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의 삶이 겪어온 굴곡에는 적나라하게 소통하고 싶었다.


우리 부부는 이 10년간의 은퇴여행이 단순히 이국적인 경치나 명소를 즐기는 구경거리 여행으로 끝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런 만큼 관광과 구분하는 마음을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 우리의 여행을 '수행' 혹은 '만행'으로 부르고 있다. 그래서 지난해 초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또한 한국을 떠나서도 이 글 시리즈 제목을 '출가'로 했고 그 제호로 52편까지 썼다. 


●출가_52 | Inside America_25 | 12년 전의 앨범에 담긴 쉐릴엄마의 위대한 '모정'


https://blog.naver.com/motif_1/223160402029


그러나 미국 서부에서부터는 좀 더 경쾌해지고 싶어 타이틀명을 Ray & Monica's [en route]

로 바꾸었다


●Ray & Monica's [en route]_1 | 히스토릭 코어


https://blog.naver.com/motif_1/223162488241


하지만 여정을 임하는 태도는 여전히 출가자의 마음에 변함이 없다.


안거(安居)는 여름과 겨울 각각 3개월씩 출가한 승려들이 한곳에 모여 외출을 금하고 수행하는 불교의 수행법이다.


안거를 마치고 해제를 하면 많은 승려들은 산문을 떠나지 않고 수행을 이어가지만 여러 곳을 다니며 시중의 문화를 익히고 사유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만행(萬行)을 하기도 한다. 이는 글자 그대로 '만 가지 행'을 말한다. 그동안 공부하고 익힌 법을 행하는 모든 선한 행위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만행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는 여섯 가지 실천 덕목이다.


내가 아닌 이들에게 물질적 혹은 정신적 도움이 되는 행위인 보시(布施), 자신의 행위를 삼가고 도덕적 규범에 철저한 지계(持戒), 타인의 비난을 감수하고 갈등 상황을 이해하고 관용하는 인욕(忍辱), 수행과 초심을 지키며 나아가는 정진(精進), 명상과 정진으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 성찰을 지속하는 선정(禪定), 진리에 대한 탐구와 이해, 바른 판단의 능력을 키우는 지혜(智慧) 등이다.


안티구아는 눈길 닿는 곳이 성당이다. 화산폭발과 지진으로 무너진 폐허의 성당을 예배 공간을 복원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도시이다. 우리 숙소로부터 한 블록 다음은 'Calle Los Pasos(십자가의 길)'이다. 길가에 일정한 간격으로 건축하고 장식해서 예수가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는 과정의 14개 주요 장면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했다. 이 길을 1619년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형제들이 정하고 예수의 고난을 기념하는 의식을 행했다고 하니 4백 년이 넘는 시간만으로 경외심이 든다. 사람들은 이 길을 걸으며 예수의 고난을 되새기며 기도하고 묵상하고 자신의 죄를 반성한다. 


나는 이 도시에 도착하는 순간, 이 곳은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거대한 사원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Calle Los Pasos'를 수시로 걸으며 한국을 떠나면서 결심했던 '출가'라는 초심을 소환했다. 그리고 그 실천 덕목인 육바라밀을 되새겼다. 


그 연도의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대문을 열고 우리를 내밀한 곳으로 초대한다. 그 환대를 통해 이곳 사람들의 가슴속에 만개한 화원을 본다. 그리고 방문을 마치면 사원을 나오듯 뒷걸음으로 물러 나오며 그들의 가정과 가슴에 가득한 긍정과 낙관에 존경을 올린다.


#안티구아 #CalleLosPasos #VíaCrucis #십자가의길 #세계여행 #모티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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