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308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 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강민지
#1
'34년 전 부모님(My parents 34 years ago) 그리고 지금 그들(And now they are)'
딸이 대비시켜 준 2장의 사진으로 결혼기념일인 어제 우리 부부의 지난 여정을 어느 때보다 경쾌하게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 장의 사진은 우리 부부의 첫 해외배낭여행사진으로 일본 어느 역사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1991년 8월의 모습입니다.
우리 부부가 만난 지 12년, 결혼 6년째로 첫 딸이 5살, 둘째 딸이 3살이 되는 때였습니다. 우리는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좀처럼 팍팍한 삶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두 딸을 고향의 부모님에게 양육을 의탁하고 더 많은 시간을 일터에서 보냈지만요.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 우리가 원하는, 가족과 함께 여백 있는 삶을 사는 목표는 좀처럼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아내도 나도 성과가 나지 않는 삶에 많이 지쳤을 때 택한 것이 배낭여행이었습니다. 배낭을 꾸려 일본으로 떠났죠.
"청년의 여행은 인생을 바꾸지만 노년의 여행은 생각만 바꿀 뿐이다."
우리가 의지한 것은 이 문장 하나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물가는 우리가 감당할 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조건 아껴야 했습니다. 도쿄에 발을 딛고 가장 싼 호스텔을 찾았지만 그 비용조차 아까워 마당에 세워진 폐차된 밴를 호스텔 비용의 1/3가격으로 빌려 지냈습니다. 모든 식사는 준비해 간 코펠과 버너를 이용했고 그렇지 못할 때는 편의점 음식만을 먹었습니다.
도시 간 이동은 '청춘18티켓(青春18きっぷ)'이라는, JR 보통열차와 쾌속열차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열차 패스를 활용했습니다. '열여덟 청춘의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패스 네이밍으로 발권에 연령제한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열여덟 청춘의 마음으로 일본을 누볐습니다. 대학 기숙사에서 잠을 자고 기숙사의 자전거를 빌려서 그 도시를 여행했죠. 대학 기숙사도, 싼 숙소도 구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기차역의 사람 통행이 뜸해진 밤늦은 시간 역사에서 혹은 공원의 야외공연장 무대에서 잠을 잤습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막다른 골목에서 절망을 이기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화양연화의 시간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진은 저희 부부의 첫 번째 해외 배낭여행으로부터 32년이 흐른 2023년 여름의 모습입니다. LA의 오리지널 파머스 마켓(The Original Farmers Market)에서 하루를 함께 보낸 46세의 청년이 찍어준 사진이었습니다. Jimmy 씨는 미국에서 태어난 교포 2세로 영화이론을 전공하고 영상 분야에서 일을 하면서 살아온 분으로 그동안 일에만 몰두했던 삶을 뒤돌아 보기 위해 4개월간의 안식월을 갖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의식과 사고의 기저를 해독해 주었습니다.
첫 번째 사진의 여행은 어떻게 아이들을 키우며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절박한 명제를 지고 떠난 여행이었다면 두 번째 사진은 살아남아 무사히 은퇴까지 했지만 비로소 주어진 여백의 시간을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명제를 지고 10년 예정으로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두 번째 떠난 길 위의 시간을 살고 있는 지금, 2년 전 떠날 때 우리가 기댄 문장도 동일했습니다.
"청년의 여행은 인생을 바꾸지만 노년의 여행은 생각만 바꿀 뿐이다."
노인이란 수십 년 가정과 조직을 책임지는 일을 해오면서 굳어진 사고 체계로 인해 생각조차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노년의 시간을 맞은 우리도 고집스러운 기성세대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고의 경화를 막을 대책으로 아내와 함께 다시 배낭을 꾸려서 '문밖의 학교'로 나온 것입니다.
#2
딸이 두 장의 사진과 함께 보내준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현금입니다. 생일과 결혼기념일마다 아이들이 함께 돈을 보내주곤 하는데 종종 우리는 그 돈을 식사에 사용치 않았습니다. 그들 때의 우리처럼 여전히 바듯한 날들을 살고 있는 아이들이 준 돈을 한 끼의 식사로 사라져버리는 것에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사실을 아는 딸은 오늘 아침에 확인 전화까지 왔습니다. 보내준 목적에 준하는 용도로 사용했는지를 묻는... 그래서 이번에는 식대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가보고 싶은 곳이 있기는 했습니다. 숙소 인근에 있는 '카페 뽀르케노?'(Por Qué No? Café)'라는 곳이었습니다. '왜 안돼? 안될게 뭔데?'라는 뜻으로 흔히 사용하는 영문 'Why not?'에 대응하는 말이죠.
이 레스토랑은 우리 숙소의 맞은편 블록의 코너에 있어서 보지 않고 지나칠 수 없는 곳입니다. 한 번도 줄을 서지 않는 경우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예약을 하지 않으면 거의 자리를 얻기는 어려웠습니다만 이번에는 우리가 일착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뽀르케노?'는 혀를 만족시킬 목적보다 '문밖 학교'가는 마음으로 갔습니다. 간판도 없는 이 좁고 어두운 음식점이 어떻게 사람들을 줄 세울 수 있는지...
양해를 구하고 2층부터 살폈습니다. 경사 80도 정도의 나무 계단을 로프를 잡고 올라가면 만나는 공간은 2층이 아니라 양철지붕 아래의 고미다락이었습니다. 작은 정사각형 테이블이 6개 있고 벽은 온통 방문객들의 낙서로 가득했습니다. 어두운 펜던트 조명이 테이블의 넓이만큼을 비춥니다. 공간의 벽은 액자를 비롯한 여러 조형물들이 공간을 채우는 재즈와 함께 이 집의 독특한 정서를 만듭니다. 계단을 내려오는 것은 오르는 것보다 훨씬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일입니다. 아래층은 주방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경계를 만드는 3인용의 카운터 좌석, 그리고 2개의 작은 테이블이 있을 뿐입니다.
두 명의 쿡과 한 명의 바텐더가 모든 일을 감당합니다. 바텐더는 음료를 만드는 일 외에도 웨이터의 역할을 비롯한 쿡이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접시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곡예를 해야 하는 것도 그였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쿡과 바텐더의 모든 동선을 살필 수 있는 카운터 좌석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주문을 하고 짬짬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요약하면 14년 전 요리사 Jose Carlos가 시작한 이 모퉁이 레스토랑은 '가장 잘할 수 있는, 단순한 메뉴로, 적은 시간 일하면서, 경쾌한 서비스로' 일하는 목표를 구현한 곳이었습니다.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하루 4시간, 6명의 스태프가 3명씩 교대 근무하므로 충분히 휴식한 후 최선으로 집중할 수 있는 환경입니다. 일할 시간이나 공간을 더 늘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벽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Learn from yesterday, live for today, hope for tomorrow."
고객은 대부분 보헤미안적인 분위기를 즐기는 외국인 여행자들입니다. 나는 공간이 너무 작아서 서로 친밀하거나 겸손할 수밖에 없는 이곳에서 작년에 영국군에서 전역한 뒤 홀로 여행을 즐기는 40대 같은 60대 은퇴자와 영국이 집이지만 독일 회사에 적을 두고 세계를 이동하며 일하는 30대 여성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한 테이블의 일행이지만 모두 실내에 앉을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되지 않아 몇몇은 줄을 선 사람들을 등지고 인도에 걸쳐앉을 수밖에 없는 이 모퉁이 레스토랑을 찾은 사람들은 이 불편한 곳을 안티구아의 수많은 레스토랑 중에서 TOP 3에 꼽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보내준 돈을 용도에 맞게 사용했는지 확인 전화를 준 딸 덕분에 이르빈(Irvin) 세프가 집중해서 만든 Grilled eggplant, Pomodoro Shrimp, Beef Tenderloin Steak을 와인과 즐기며 '이렇게 살면 왜 안되죠?'라고 반문하는 사람들과 유쾌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30년, 우리 부부를 지탱해온 2가지
https://blog.naver.com/motif_1/221880369894
●젊었을 때 여행해야 하는 이유
https://blog.naver.com/motif_1/223240635137
●세상이라는 대학으로 등교하는 삶
https://blog.naver.com/motif_1/2231937745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