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천국 갈 때 나도 함께 데려가 다오!"

Ray & Monica's [en route]_443

by motif


84세 교민 사서의 은퇴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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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새해 안부를 가족 단톡에 전하면서 저희 부부가 초대받아 참석했던 댁의 설날 밥상 사진을 함께 보냈더니 딸이 이렇게 답글을 달았다.


"엄청난 12첩 반상!"


맞다. 우리 부부도 3일쯤은 준비했을 밥상을 보면서 딸과 같은 생각을 떠올렸었다.


우리를 초대해 주신 분은 유혜자 선생님. 우리가 시애틀의 겨울을 이렇게 안전하게 공부하며 누릴 수 있는 것은 유 선생께서 곁을 내주신 덕분이다.


나그네가 향수로 힘든 때가 명절 때이다. 로컬의 가족들이 재회의 시간을 나누는 동안 그 분위기와 동떨어진 시간을 보내는 나그네의 상대적 고립감이 물리적 불편보다 힘들다. 이번 새해 첫날은 어느 때보다 풍성했다. 떡국을 포함한 12첩 반상을 능가하는 상차림에 반가운 사람들과 따뜻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 선생님께서 소개해 주신 교민 황선희(Sunny Hwang) 선생님께서 우리가 시애틀에 막 도착했던 지난해 10월 첫 만남에서 우리를 위해 여러 날을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따로 준비해 나오셨었다.


단호박 수프를 쑤어오시면서 데워서 먹을 때 위에 뿌려서 먹도록 호박씨와 함께 건네주셨고 1주일을 넉넉하게 먹을 수 있는 양의 그래놀라 시리얼을 직접 볶아주셨다. 그 음식 가방을 건네주시면서 하신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선생님, 한국 사람의 DNA는 음식으로 사랑을 전하잖아요."


그렇게 긴 시간 미국인으로 살아오셨지만 한국인의 DNA가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유 선생님께서는 설날 아침, 이렇게 성대한 식탁 앞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사랑을 전하는 한국인의 DNA를 증명해 주셨다.


지난 추수감사절에 우리를 초대해서 가장 전통적인 추수감사절 식탁을 차려주셨던 Gordon과 Carolyn Aamot 부부, 조카인 Alex와 여자친구 Ashley를 초대해 친척들이 모두 모인 것 같은 한국의 설날 분위기가 되었다.


유 선생님께서는 이 화려한 메뉴를 구성하고 파티를 준비하시는데 사흘은 넘게 걸리셨지 싶다. 창의성이 뛰어난 Carolyn 씨께서는 이날을 위해 창안한 부처님 빵을 직적 구워오셨고 Alex 커플은 전통 떡을 준비해서 푸짐한 후식으로 긴 시간의 이야기도 풍성했다. 아내는 아침 일찍 기상해서 만든 두부조림으로 과한 칭찬을 받았다.


#2


새해 전날 시애틀의 대중교통은 무료였다. 하지만 새해 첫날은 유료였다. 궁금했던 그 이유를 Gordon 씨가 풀어주었다.


"아마 음주때문일 거예요. 새해 이브는 많은 사람들이 카운트다운 파티나 불꽃놀이로 음주가 잦거든요. 음주 운전을 안 하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지 않나 싶어요. 미국에서 설날은 그저 집에서 조용히 쉬면서 전날의 숙취를 해소하는 날이거든요."


설날 전날 무료라는 말에 좋아했던 우리는 당연히 설날도 무료이겠지 싶어서 기사에게 물으니 단호히 아니라고 했던 이유가 이해되면서 그들의 합리성에 수긍이 갔다.


풍성한 설날 만찬과 함께 지난해의 추억과 새해의 포부들을 나눈 뒤 우리 부부는 유 선생님댁 앞의 가스웍스공원(Gas Works Park)을 방문하고 프레몬트(Fremont)까지 Burke-Gilman Trail를 걸었다.

유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뵐 때 추켜 말씀하시곤 한다.


"두 분은 은퇴한 여행자가 아니라 치열하게 공부하시는 모습이 대학의 방문학자로 오신 분 같아요."

우리가 탐방하는 도시에서 견지하는 자세는 '방문학자'같은 태도인 것은 맞다. 단지 대학에 적을 두고 특정 학문을 연구하는 대신 로컬의 삶을 탐구하고 배운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3


시애틀에서 머문 지난 2개월 넘게 우리 부부가 가장 많이 접한 분이 유 선생님이다. 자주 뵙다 보니 꼭 톺아보지 않더라도 삶의 결이 보인다.


우리는 선생님의 댁이 마주 보이는 가스웍스공원의 언덕을 내려와 Burke-Gilman Trail를 걸으면서 한 여성이 84년 걸어온 길을 반추해 보았다. 누구나 지향하지만 실현이 싶지 않은 길을 경쾌하게 가고 계셨다.


유 선생님께서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오신 때가 69년이었으니 올해로 미국 생활 57년째이다. Indiana University에서 Masters in Library Science 전공하고 SIU Law School(Southern Illinois University School of Law)에서 30년 사서로 근무했다. 은퇴를 하고 마침내 자유인이 되는 순간, 시애틀의 워싱턴 대학교 Tateuchi East Asia Library으로부터 Job Offer를 받았다.


은퇴 후 갑작스러운 생활의 변화 대신 점진적 변화에 대한 충고를 수궁했다. 이틀하고 반나절만 4시간씩 한국도서를 Cataloging 하는 작업을 맡았다. 은퇴 후 놀 시간을 원했던 터라 딱 5년만 더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일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이 도서관에 들어오는 모든 한국도서는 유 선생님의 손을 거쳤다. 한국을 떠난 이후 한국 문화 단절의 갈증을 해소하고 한국 역사를 다시 배우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도서관의 팀워크가 너무 좋았다. 자발적으로 신명 나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함께 행사도 기획했다. 이 도서관이 교민들에게 한국의 보물이 가득한 귀중한 장소임을 알리고 Library Friends Group(UW한국학도서관친구들)을 만들어 BOOKSORI 행사를 기획해 한국에서 작가를 초청하고 강연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봉사에 앞장서는 분들도 생겨났고 도서관에 기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5년 근무 계획이 20년에 가까워졌다. 아무리 도서관이 좋아도 더 늦기 전에 스스로를 반추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종신 근무를 사양하고 2021년 9월, 두 번째 은퇴를 단행했다.


자신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그 삶의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공원 앞 작은 콘도에서 좋아하는 음악 듣고 독서하고 산책하는 일이다. 도서관 친구들과 식사하고 봉사자들과 여행하고 라인댄스로 운동하는 일이다. 매주 성당 가는 일은 친한 친구들에게 당부한다. 그리고 천국 갈 때 자신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부탁해 두었다. 누군가를 위해 밥을 살 만큼만 남기고 월급으로 받은 돈을 도서관과 박물관에 기부했다. Seattle Asian Art Museum의 plaque에서 유혜자와 유 선생님의 친구, 모니카 선생님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Gordon과 Carolyn Aamot 씨 부부의 환대와 나눔

https://blog.naver.com/motif_1/224094639200

●고향과 가정을 선물해 주신 분들

https://blog.naver.com/motif_1/224079145078

●길 위에서 만난 언니가 차려준 생일상

https://blog.naver.com/motif_1/224123437721

●UW 한국학 도서관 친구들

https://blog.naver.com/motif_1/22407607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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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자 #모니카 #SeattleAsianArtMuseum #시애틀 #은퇴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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