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오악사카로 온 지 31일째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그렇듯, 떠날 날을 기약하지 않고 도착한 곳입니다.
이 도시의 삶이 궁금해서 골목을 걸으며 일주일을 보냈고, 마주치는 사람들이 좋아서 다시 일주일을 연장했습니다. 매 주말 펼쳐지는 Calenda(결혼식, 성인식, 지역 축제에서 음악·춤·폭죽·거대한 인형(Monos de Calenda, Mojigangas)이 어우러지는 전통 행렬)와 이곳 출신의 화가들이 도시의 문화적 인프라를 구축한 그 정신에 반해 다시 일주일, 기원전 500년경에 몬테 알반(Monte Albán)을 건설하고 마야·믹스테크·아즈텍 문명의 선행문화 역할을 해온 사파테크와 16개에 달하는 원주민 공동체들이 궁금해서 또 1주일을 연장하다 보니 한 달이 삽시간에 흘렀습니다.
호스텔에는 등과 가슴에 배낭을 멘 여행자들이 매일 도착하고 또 매일 떠납니다.
40년 전에 하얼빈에서 시카고로 이민 왔다는 중국인 부부는 작년에 은퇴한 뒤 1년간 미국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올해는 멕시코로 여행 반경을 넓혔다고 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함께 작은 사업체를 운영했습니다. 일은 그만하자고 남편과 의견 일치가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 특히 중국계 미국인들 중에 50대에 은퇴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평생을 통틀어 가장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 그 은퇴 결정이었어요 'Money is never enough(돈은 언제나 충분하지 않다)'잖아요."
65세의 콜로라도에서 온 한 남성은 40세에 은퇴하고 25년째 여행 중이라고 했습니다.
"미술용품 수입상이 잘 되어 이만하면 평생 돈은 벌지 않아도 되겠다 싶을 만큼의 돈이 쌓였어요. 회사를 넘겼죠. 북한을 비롯해 세계에 가보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일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부동산 개발을 해볼까 싶어요. 하지만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시작할지를 정한 것은 아니에요. 뒤늦게 다시 일에 대한 의욕이 생긴다는 것이 참 이상하지요?"
일과 돈과 삶의 의욕의 상관관계에 어떤 규칙성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단지 개인의 선택일 뿐이겠지요.
그동안 오악사카에는 건물의 바닥이 심하게 흔들리는 지진이 있었고 머지않은 곳의 산에 산불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매일 새벽 노점 부스를 만들기 위해 한 시간 이상 공을 들이고, 늦은 저녁이면 그것을 걷느라 또 그만큼의 시간을 쓰는 옷 장수의 일상은 변함이 없습니다.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을 앞두고 마을마다 갖은 분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삶의 고단함을 잊고 더 좋은 날을 기대합니다.
이곳의 계절은 건기와 우기, 두 계절뿐입니다. 지금은 건기로 맑고 건조한 날씨가 6개월이나 계속됩니다. 건조한 열기에 특화된 검질긴 인디언 무화과 선인장의 패드(nopal) 조차 수축해 겨우 견디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밤에는 쌀쌀해져 고슴도치처럼 몸을 말아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제 새벽에는 웅크린 모습이 아닌 채로 눈을 뜨고 기온이 확실하게 바뀐 것을 알았습니다. 낮의 소칼로 광장 벤치에서는 연인에게 선물 받은 꽃을 무릎에 올리고 하얀 이가 햇살을 반사해 눈이 부실 정도로 웃고 있는 여성을 여럿 보았습니다. 밸런타인데이인 줄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밸런타인데이가 언제인 줄은 몰랐지만 설날이 언제인지는 알았습니다. 고향 떠난 불효한 마음이 커서, 특히 명절이면 무거워지는 마음을 주체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진정 어리 마음으로 세상을 만나려는 노력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삶의 여러 역할을 사는 중에 혼돈에 놓이는 경우는 수시로 찾아오곤 했습니다. 길 위의 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혼돈에 직면하고도 좀 더 차분해진 것입니다. 정답이 없는 삶 속에서 누구에게나 한계의 울타리는 마찬가지이고 그것을 벗어나거나 안주하거나의 선택도 나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피투성으로 주어진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각기 다른 최고와 최선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오악사카를 언제 떠날 수 있을지, 어디로 떠나게 될지는 알 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곳이 어디이든 지금의 자리가 가장 귀한 곳이며 이 시간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좀 더 속도 조절을 잘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충분히 느린 속도이기를 원하며, 조우하는 삶의 풍경에 정을 한 스푼 더 할 수 있는 속도이기를 바랍니다.
오늘 베니토 후아레스 시장(Mercado Benito Juárez) 입구에서 수를 놓고 있는 어르신을 뵈었습니다. 어르신께서 수놓은 토르티야 보자기를 완성하는 그 속도면 참 좋겠습니다.
새해 아침, 모두에게 오악사카 커피 한 잔씩을 올리고 싶습니다. 부드럽고 균형 잡힌 질감에 꽃향기와 과일향이 은은하게 어우러진, 따뜻한 풍미의 그 한 잔을 마시는 시간만큼의 느림을 선물 드리고 싶습니다.
_오악사카에서 이안수·강민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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