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와 '베풂'의 나날

Ray & Monica's [en route]_465

by motif

호스텔의 메이드, 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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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나는 지금 몇 페이지쯤을 살고 있을까. 사실 그 책이 몇 페이지로 이루어진지조차 알 수 없다. 마지막 장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내 아이들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들이 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가 덮이는 순간을 곁에서 지켜볼 테니.


오악사카에 도착한 날이 1월 18일이었으니, 3월 5일 오늘로 꼭 49일째가 된다.


우리는 처음 짐을 푼 안다이나 호스텔을 한 번도 옮긴 적이 없다. 지난주, 함께 오래 머물던 몇몇 여행자들이 떠난 뒤, 우리는 3개월째 묵고 있는 애틀랜타 출신 Bud 씨 다음의 최장기 투숙객이 되었다.


오악사카에는 온갖 종류의 숙소가 넘쳐나지만, 이곳을 떠나지 못하게 붙드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건물은 오래되었어도 공간은 넉넉하다. 중정을 비롯한 공용 공간이 넓어서, 어느 책상에 앉더라도 자리를 내어줘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 도심에 자리한 덕분에 시내 어디든 걸어서 닿을 수 있고, 주변에 큼지막한 시장이 여럿 있어 장기 체류자에게 식재료 구입의 부담이 없다. 이 도시에서 주변 마을로 향하는 버스는 목적지마다 터미널이 제각각인데, 그 터미널들이 마침 인근에 모여 있어 어디든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이곳을 장기 체류지로 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다. 진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청결함이다. 각 층마다 청소 담당자가 배치되어 있어 매시간 쓸고 닦는다. 더욱 결정적인 다른 하나는 세계 곳곳에서 찾아오는 다채로운 사람들이다. 스물 초반부터 팔순에 이르기까지, 살아온 삶의 결이 저마다 다른 이들이 이 공간에서 교차한다.


주변 마을로 나서지 않는 날이면, 나는 호스텔 안에서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단 한 권도 같은 문장이 없는 여러 권의 인터랙티브 책을 탐독하는 셈이다.


#2


도착한 첫날부터 유독 눈길이 머문 사람이 있었다. 게스트가 아니라, 우리 방이 있는 층을 도맡아 관리하는 여성이었다.


출근부터 퇴근 시까지 한시도 소홀함이 없었다. 야무진 베딩은 물론, 공용 화장실 청소는 하루에 세 번씩 한다. 이동할 때는 늘 종종걸음이다. 그 덕분인지 벌레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한다.


그녀의 이름은 로시오 마르티네스(Rocio Martinez), 두 손녀를 둔 쉰아홉 살의 여인이다.


어제는 아내가 토르티야를 사 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내일 제가 오악사카 사람들이 즐겨 먹는 큰 숯불 토르티야를 가져다드릴게요."


오늘 아침 출근하자마자 큰 토르티야를 내밀었다. 틀라유다(tlayuda)에 쓰이는, 지름이 40센티미터는 족히 될 법한 크기로 숯불에 구워 바삭하게 익힌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당신에게 제 속마음을 얘기하고 싶군요. 전 지난 50여 일간 변함없이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당신의 모습에 감동하고 있답니다."


그녀는 잠시 미소를 머금더니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도 선생님 내외분의 따뜻한 마음을 늘 느끼고 있었어요. 저는 매일 아침 해가 떠오를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의 생명을 주신 것에, 일할 수 있는 건강을 허락하신 것에, 일할 수 있는 곳을 주신 것에, 그리고 그 일로 가족과 형제자매를 도울 수 있게 해주신 것에. 그러니 열심히 일하는 것은 저에게 의무가 아니라 기쁨입니다."


"자녀들도 어머님의 그 심성을 닮았겠지요?"


"아이들은 본래 누군가 도움을 필요로 하면 조건 없이 내어주는 마음을 타고납니다. 저는 그 순수한 본성이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곁에서 격려했을 뿐이에요. 지금 아이의 아버지가 된 제 아들은 여전히 아무런 대가 없이 정기적으로 헌혈을 하고 있고, 어르신이 도움을 필요로 하면 늘 먼저 달려갑니다. 작년에 세상을 떠나신 저희 어머니께서 늘 말씀하셨어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베풀어야 한다고."


그녀의 책, 모든 페이지에는 '감사'와 '베풂'으로 가득했다.


그녀가 막 청소를 끝낸 샤워룸의 샤워커튼에 프린트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You are right where you are meant to be(당신은 지금 있어야 할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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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베풂 #오악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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