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위해 쓴 편지가 내 불안을 가라앉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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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40주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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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3월 1일은 결혼 40주년이었다. 만난 지 46년이 되는 해이기도하다. 또한 순례자로 산 지 4년째가 되는 해이다.


아트좀파의 폐허위에서


이 특별한 날에 오악사카의 자포텍(Zapotec) 문명의 고고학적 유적지, 아트좀파(Atzompa)를 방문하기로 했다. 한 문명의 흥망성쇠를 통해 시간의 숭엄함을 사색하기에 좋을 곳으로 여겨졌다.


먼저 방문했던 몬테 알반(Monte Alban)이 산 정상을 평탄화하고 정연하게 건설된 웅대한 유적인 반면 자연지형을 살린 채 위성도시로 만들어진 아트좀파가 어떻게 건설되고 어떻게 버려졌는지, 여전히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현장에서 바람의 소리를 들어보고 싶었다.


유적으로 오르는 마을, 산타 마리아 아트좀파(Santa María Atzompa)에서 버스를 내려 인근 피자집에서 요기를 하고 산으로 오를 기운을 충전했다. 이 마을은 녹색 유약 도자기로 유명하다. 주민의 태반이 도자기 제작에 종사한다. 자포텍 원주민인 이 마을의 도자기 전통은 아트좀파 문명의 점토를 활용한 종교, 의식 용품 제작 능력과 도자기 제작 기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도자기 제작하는 댁을 방문하고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있는 '산타 마리아 아트좀파 공동체 박물관(Museo Comunitario de Santa María Atzompa)'에서 아트좀파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을 살펴보았다. 지역 공동체가 직접 운영하는 박물관으로 올라(olla, 항아리), 에피지(efigie,인물·신상 형태의 그릇) 도자기와 붉은색 인물 얼굴이 새겨진 장례용 항아리 등, 1천 년 이상 된 아트좀파 유적지 발굴에서 나온 자포텍 문명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유적의 삶을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


박물관에서 유적지까지는 3km쯤을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히치하이크를 시도했다. 첫 번째 차가 기꺼이 서주었다.


우리를 태워준 이는 자포텍 부족민인 엘레오(Eleo(leodoro) Cruz) 씨와 발렌틴(Valentin Cruz) 씨였다. 엘레오 씨는 40년 전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에서 정착한 뒤 사촌 형인 발렌틴 씨를 비롯해 차례로 형제와 친지들을 불러들여 미국 시민권자로 만들고 미국에서 경제활동을 한 돈을 고향, 산 후안 테이티팍(San Juan Teitipac)으로 보내 집안을 부흥하게한 분이었다.


두 분은 뿌리에 관심이 많은 분으로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조상의 유적을 찾는단다. 그들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아트좀파 선대 유적의 뿌리를 찾아왔고 우리는 생의 후반기에 한때는 권력과 신앙, 예술이 절정에 달했던 자리였지만 이제는 침묵만이 남은 곳에서 돌무더기가 전하는 말을 듣기 위해 방문했다.


증기 목욕 시설(temazcal)까지 갖추어졌던 'Casa de Oriente(동쪽의 집)'과 정교한 건축기술과 장식을 보여주는 'Casa de los Altares(제단의 집)'로 알려진 두 귀족 거주지 폐허에서 맞은편 산정에 있는 몬테 알반을 조망했다. 우리는 함께 침묵했다.


기원전 500년경에 자포텍족에 의해 건설된 몬테 알반, 기원후 300년경 인구 4만여 명의 전성기를 지나 700년 경에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800년경에 버려졌다.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결과는 내부의 갈등, 외부의 침략, 자원 부족 등 복합적 요인으로 보고 있다. 아트좀파는 서기 650년경에 건설되었지만 몬테 알반과 운명을 같이했다. 후에 이 두 유적은 믹스텍족에 의해 매장지로 재사용되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이 이 유적을 버렸을 때와 같은 처지를 살고 있습니다. 믹스텍족과 때로는 화친하고 때로는 전쟁하면서 이곳을 떠나 분산되었지만 자포텍족도 믹스텍족도 함께 아즈텍 제국에 점령되어 조공을 바치는 삶을 살았고 아즈텍 제국의 테노치티틀란이 스페인의 침입자,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에 의해 1521년에 멸망하자 우리는 함께 그들의 착취에 편입되었습니다. 1821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우리의 영토는 1846년부터 1848년까지 발생한 '멕시코-미국 전쟁'으로 텍사스는 미국에 합병되면서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애리조나 등 멕시코 국토의 절반을 미국에 잃었습니다. 여전히 강대국 미국 아래에서 정치적, 경제적 긴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지금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탐욕 속에서 우리는 식민지 상태를 경험하고 있는 셈입니다."


엘리오 씨가 침묵을 깨고 역사를 반추하며 자포텍의 정체성이 소멸되어가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아트좀파 유적은 몬테 알반의 일부로 오악사카 역사 중심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현재 멕시코 국립인류학역사연구소(INAH, Instituto Nacional de Antropología e Historia)의 관리하에서 발굴과 보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망루에서 유적을 지키는 관리자가 폐장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앞장서 걷던 엘레오 씨가 길 양옆으로 가득한 구아헤 나무(Guaje)의 꼬투리를 따 열어 보이면서 말했다.


"오악사카의 이름은 이 나무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어요. Guaje는 Huaxyacac의 스페인어 변형이고 Huaxyacac는 나우아틀어이죠. 나우아틀어는 아즈텍 제국의 언어에요. 그들의 군대가 이곳에 왔을 때 산의 곳곳에 이 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 이 지역을 '구아헤 나무가 있는 언덕 끝'이라는 나우아틀어로 명명한 것입니다. 실제 자포텍어 이름은 베에나아(Be’ena’a)로, '구름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이름은 아즈텍 제국에 의해 뺏겼고 아즈텍제국에서의 이름은 다시 스페인 제국에 의해 다시 그들의 음운 편의에 맞추어서 변형되었습니다. 우리 것은 이렇게 모두 사라졌습니다."


현재 자포텍어로 베에나아라고 하는 토착 후손들 40만 명 정도가 그들의 고유한 문명의 발상지인 몬테 알반의 고대 도시를 중심으로 한 오악사카 밸리 일대에서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고대 자포텍족의 지배층은 자신들이 구름 속에 사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후손이며, 죽으면 다시 구름으로 돌아갈 것을 믿는다고 했다.


2천 살 어르신, 툴레나무


엘레오와 발렌틴 씨 제안에 의해 두 분의 고향마을 산 후안 테이티팍(San Juan Teitipac)을 방문하기로 했다. 아트좀파 유적에서 40km 가까이 되는 거리였다.


20km 쯤 전 삼거리 길목에 산타 마리아 델 툴레(Santa María del Tule)가 있다. 툴레 나무(Árbol del Tule)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마을이다.


마을이 생기고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나무 주변에 성당이 세워지고 광장이 만들어지고 마을이 생겨났다. 나무 자체가 자연의 생태적 상징이 되었고 마을이 생기고 축제가 만들어졌으며 나무를 신성시하면서 영적 중심지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의 기원이 된 거대한 아후에후에테(Ahuehuete, 멕시코 낙우송)는 수령 2천 년이 넘는 나무로 세계에서 가장 큰 줄기 직경을 가진 나무이다. 지름 약 14m, 둘레 58m, 높이 약 42m로 키보다 몸통이 더 큰 나무이다. 'Ahuehuete'는 나우아틀어로 '물가의 노인'이라는 의미로 물과 생명을 상징한다. 이 그늘 아래에서 회의와 축제와 의식이 거행되었다.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 1769 ~ 1859)는 1803~1804년 멕시코 탐험 중 오악사카에서 이 툴레 나무를 직접 측정하고 기록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굵은 나무로 그의 저서 <Political Essay on the Kingdom of New Spain(1811)>에서 묘사했다.


자연을 하나의 살아 있는 전체로 보는 시각을 가졌던 그의 태도를 빌리면 오늘 숨 쉬는 내 모든 신체의 기관들이 결국 이 툴레 나무와 연결된 유기적 전체인 셈이다.(그는 몬테 알반을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고고학 보고서를 통해 오악사카 계곡의 유적을 중앙아메리카 문명의 중요한 증거로 평가했다.)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1933 ~ 2015)는 2000년, 아메리칸 양치식물 학회(American Fern Society) 회원들과 함께 오악사카에 서식하는 약 700여 종의 양치식물을 관찰하기 위해 오악사카를 열흘간 방문했다. 그때 마침내 툴레 나무와 대면한다. 그 순간은 그가 생물학을 공부하던 중 훔볼트가 언급한 이 나무에 대한 기록을 보고 오래된 사진으로 찾아본 이후 50년을 기다린 상면이었다. 그는 엄청난 둘레에 놀랐다. 오랜 세월 동안 자라난 줄기의 굴곡과 옹이가 만들어낸 사자 머리, 코끼리 다리 등의 동물 형상들을 아이들이 돈을 받고 설명해 주었다고 전한다. 그는 몬테 알반, 야굴(Yagul), 미틀라(Mitla), 석회암의 석화된 폭포 히에르베 엘 아구아(Hierve el Agua), 산 바르톨로 코요테펙(San Bartolo Coyotepec) 의 방문을 이어간다.

아내와 나는 경외스러운 마음으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몇 바퀴를 돌면서 인간이 지구에 행하는 모든 악행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엘레오의 고향마을 '산 후안 테이티팍'


툴레 나무에서 긴 시간 지체하는 바람에 San Juan Teitipac으로 접어들었을 때 해는 이미 서산을 넘어버렸다. 음력 보름을 이틀을 앞둔, 통통하게 살이 오른 달이 사라진 해를 대신해 발레스 센트랄레스(Valles Centrales)의 광활한 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둘러 도착한 마을에서 우리를 제일 먼저 안내한 곳은 산 후안 바우티스타 성당(Templo de San Juan Bautista) 이었다. 16세기 도미니코 수도사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 지은 성당과 수도원 복합 건물이었다. 성당의 예배 공간인 나베(Nave) 대신 수도원 건물(Exconvento) 내부로 들어가는 현관인 포르티코(Portico)에서 발길을 멈췄다. 벽에는 검은 단일색(monocromático)으로 표현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중심으로 한 장면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 놀라운 벽화를 보세요. 이 벽화는 성당과 수도원이 건립된 직후인 16세기 후반 수도사들에 의해 제작된 오래된 단색화입니다. 당시 글을 읽지 못하는 주민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려졌다고 해요.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장면이고요, 수도사들이 시신을 운구하는 행렬, 성모가 가시관을 받는 장면, 사다리, 집게 채찍 등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함께 묘사되어 있죠."


엘레오의 말처럼 특별한 보호 조치 없이도 5세기 동안이나 살아남은 벽화였다. 그러나 그가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수도원 밖에서 했다.


"그들은 조상과 태양, 비, 옥수수, 번개 등을 상징하는 다양한 신을 믿었던 우리에게 낯선 신을 소개하고 다른 모든 신은 신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산 너머에 금광이 있었던 얘기를 했다.


"스페인 침입자들은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을 동원해 금광 채굴을 했어요. 그 모두가 다시 성당을 짓는데 동원되었죠. 그들은 오직 금과 은에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 금의 역할에 오일이 더해졌죠. 그때나 지금이나 착취는 여전한 셈입니다. 방식만 달라진 셈이죠. 지금의 미국이 그때의 스페인 침입자들과 무엇이 다른지 구분하기가 저는 쉽지 않아요."


50여 년 전 두 사람이 다녔던 초등학교를 지나 엘레오 씨가 태어난 집으로 갔다. 성당 뒤편의 한 블록 전체를 차지하는 규모였다. 그의 형 시릴로(Cirilo Cruz) 씨가 맞아주었다.


"시릴로도 30년간 미국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이 집을 지키고 있죠. 그는 LA 비버리 힐즈에 있는 호텔에서 파티시에로 일했고 파리에서도 잠시 근무했었죠. 아버지대까지는 이 대지안에 여러 채의 집들이 있었고 삼촌과 고모 등 온 집안사람들이 함께 모여살았죠. 세월과 함께 그들은 하나둘 이곳을 떠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형과 내게 이 집을 물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내 지분도 형에게 주었어요. 현재는 내가 오면 묵을 수 있는 방 하나만 내 몫으로 남겨놓았지요."


그의 몫으로 남은 방 앞의 파티오 탁자 위 액자에 한 여성의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아내에요. 3년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불과 49세였는데..."


그가 미국에서 합법적 신분을 얻은 뒤, 고향에서 8살 어린 색시를 데려가 미국에서 새로운 가문을 일구었다고 했다.


마을을 걸을 때마다 거의 모든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대부분이 Cruz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거의 집안사람들이에요. 꼭 보고 가야 할 것이 있어요. 이 마을은 전통적으로 메타테(Metate 맷돌)을 만드는 것으로 특화된 마을이었어요. 내가 10대 시절만 해도 이 마을의 중심 도로의 양옆에서 메타테를 만들고 근동에서 메타테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왔죠. 이제는 겨우 명맥만 남았습니다. 10여 가구 정도가 계속하고 있어요. 돌을 깎는 이 힘든 작업을 젊은 사람들은 더 이상 이어가려고 하지 않죠. 집안 어른이 그것을 만드는데 한번 방문해 봅시다."


엘레오가 한 댁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 어른이 모자까지 쓴 외출 복장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메타테 장인 후스토(Justo Cruz) 어른이었다. 며칠 전에 다친 다리가 계속 불편해 동네 의사를 방문하려던 참이라고 했다. 마당의 돌무더기 옆에 거의 완성단계인 메타테가 있었다. 어른은 10살 때부터 이 일을 시작해 61년째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마을 옆 산에 채석장이 있어요. 그 돌을 가져다 깨고 갈고 해서 면을 만들고 다리를 만들어요. 토르티아용 옥수수나 곡물을 갈 때 꼭 필요하니 여전히 수요가 있습니다. 위에 놓고 밀어서 가는 막대 모양의 돌, 마노(mano)와 한 쌍인데 같은 화산암으로 만듭니다. 하나를 만드는데 3일 정도 걸려요."


완성된 메타테를 보여주었다. 옆에는 꽃무늬 장식이 되어있었다. 함께 만든다는 몰카헤테(Molcajete)도 있었다. 작은 절구였다. 고추, 향신료, 허브 등을 갈아 살사나 과카몰레를 만들 때 사용한다. 옆에는 돼지머리 장식이 되어있었다. 풍요와 행운의 상징으로 전통이라고 했다. 절구에 사용하는 막대기는 테홀로테(tejolote)라고 한다.


우리는 마을 중앙의 마을공동묘지(Panteón municipal)로 향했다. 공동묘지 입구 담의 일부를 이룬 돌이 아트좀파 유적에서 온 것이라고 추측했다. 음각된 무늬가 그것을 추측하지만 어떤 연유에서 그 돌이 이 공동묘지의 담의 일부가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엘레오씨가 공동묘지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내 부모님과 친지 모두가 이곳에 묻혀있어요. 물론 내 아내, 가비나 베로니카(Gavina Veronica)도요."

그가 각 무덤의 묘비명에 핸드폰 랜턴을 켜서 이름을 확인시켜주었다. 우리 부부는 쉰 살을 넘기지 못하고 가족을 떠난 부인의 묘소에 예를 갖추었다.


마을을 되돌아 나오는 어둠 속 밭을 가리키며 발렌틴 씨가 말했다.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이 밭들은 옥수수를 비롯한 채소가 잘 자라던 곳입니다. 그러나 기후 변화로 물이 말랐고 농사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소나 염소를 먹이는 사료작물인 알팔파(alfalfa)를 심어요. 예전에는 땅 어디를 파도 지하수가 나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물이 나오는 우물조차도 오염되어 먹을 수가 없는 우물이 대부분이에요. 사람들도 농사를 짓는 대신 이제 오악사카 시내로 가서 품을 팝니다."

현재 마을 이름의 의미를 물었다. 엘레오가 답했다.


"'Teitipac'도 나우아틀어에요. '돌 위에'라는 뜻입니다."

"자포텍 마을이니 아즈텍어 전에 불렸던 자포텍어의 이름은 없었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이 말은 '답을 모르겠다'라는 의미라는 사실로 정의해 준 캐나다의 존 어르신의 말씀이 기억났다. 엘레오는 '좋은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다른 얘기를 한참 이어갔다.


" 아버지는 스페인어와 더불어 자포텍어를 구사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이 마을에서 자포텍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지나는 길에 인사드렸던 그 할머니가 유일해요. 저도 자포텍어를 모릅니다."

"할머니의 남편을 생존해계시나요?"

"돌아가셨어요."

"그럼 할머니께서는 누구와 자포텍어로 대화할 수 있나요?"

"그게 문제입니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나우아틀어와 스페인어에 의식이 점령당했고 지금 아이들은 영어만 배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문화적 다양성 복원의 일환으로 학교에서 자포텍어를 가르치려는 움직임이 있어요. 아, 제토바(Zetobaa)라고 해요. 마침내 자포텍어 마을 이름이 생각났어요. '다른 무덤'이라는 의미라고 들었어요. 인근 미틀라(Mitla)에 화려한 무덤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같아요."


디아스포라의 40년


오악사카 시내로 진입했을 엘레오 씨가 말했다.


"우리가 호스텔까지 모셔다드릴 테니 우리 집에도 잠시 들렀다 갑시다."


두 분은 베니토 후아레스 자치 오악사카 대학교(UABJO : Benito Juárez Autonomous University of Oaxaca) 앞에 각자의 집을 가지고 있었다. 방이 여러 개인 큰 집이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발렌틴 씨가 메즈칼 병을 내왔다. 큰 잔에 한 잔씩을 들이켰다.


"이 대학 학생들에게 방들을 렌트하고 있어요."


도로변 공간은 레스토랑으로 내부와 2층은 학생들의 기숙 공간이었다. 독주를 한 잔씩 한터라 아래층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택시를 타고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기어코 우리의 숙소까지 대려다 주고 싶어 했다.

"제가 잘 아는 유명 틀라유다(Tlayuda) 집이 있어요. 호스텔에서 멀지 않은 도심에 있으니 저녁을 그곳에서 먹고 숙소를 가면 됩니다."


Tlayudas Libres Doña Martha에 도착해 보니 불야성이었다.


"이곳은 오직 틀라유다만 파는 곳에요.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영업을 하는 곳으로 오악사카 시내에서 현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고 할만해요. 45년간 영업을 해온 곳입니다."


엘레오는 사흘전에도 다녀갔다고 했다. 자리가 난 곳을 차지하고 앉고 보니 밤 10시였다.


"도대체 한밤중에 누가 먹으로 오는 거지요?"

"주로는 술꾼이죠. 술을 마시다 시장기가 돌면 이곳으로 옵니다."


토르티야에 검은콩(fríjoles), 오악사카 치즈(quesillo), 고기(Chorizo, Sesos, Asada), 채소, 살사 등을 올려 숯불에 구워낸 틀라유다는 오악사카의 대표적인 전통 음식이다. 숯불에 구워서 겉은 바삭하고 속재료가 들어가 속은 촉촉하다. 접어서 두 조각을 낸 거대한 틀라유다를 받고 비로소 고백했다.


"사실 저희는 오늘이 40주년 결혼기념일입니다. 오늘 전망 좋은 식당에서 디너를 하려고 했던 계획보다 더 흡족합니다."


우리의 기념일 공표가 일찍 부인을 떠나보낸 분에게 미안했지만 그는 짐짓 '오히려 자유로워졌다'라고 말했다. 3년의 시간을 통해 슬픔이 좀 누그러진 듯 부인과 자녀들 사진을 스마트폰에 띄우고 자녀와 손자들 자랑을 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만 자라서인지 조상의 뿌리에는 관심이 없어요. 회사의 경진대회로 멕시코시티까지 오고서도 고향 방문은 안 하고 돌아갔어요."


10대에 코요테(Coyote 미국 국경을 불법적으로 넘는 사람들을 돈을 받고 안내하는 사람)를 따라 미국으로 들어가 정착한 뒤 형제와 사촌들까지 미국의 정착을 도와 오늘의 경제적 자유를 얻었지만 더욱더 뿌리에 집착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집에도 내 공간이 있고 오악사카 시내에도 내 집이 있고 산타모니카 해변을 산책할 수 있는 곳에도 내 집이 있으니 내일 내가 어디에 있을지를 지금은 나도 몰라요."


엘레오가 강조하는 '자유'라는 축복 속에서도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이의 디아스포라의 40년 상실이 느껴졌다.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우리 부부도 그가 말하지 않은 심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밤이 깊어서야 활기가 살아나는 골목식당은 우리 뒤에도 긴 줄이 만들어져있었다. 호스텔 문 앞에 우리를 내려준 형제가 떠나자 비로소 피로가 몰려왔다. 가장 긴 하루를 보낸 결혼기념일이었다.


노을이 아름다운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전하려고 했던 편지를 아내에게 전했다. 편지를 읽은 아내의 눈이 충혈되었다. 사실은 아내를 위해 그 편지를 쓰는 동안 내 불안이 가라앉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뜸을 들인 아내가 말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남의 은혜 때문인 것 같아요. 조상님의 차례를 모시는 일을 대신해 주고 마을 공동체의 의무를 감당해 주고 있는 시누이와 조카딸, 아들 며느리 혼인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우리의 불비에도 오히려 우리를 격려해 주신 사돈 내외, 부모 쳐다보지 않고 제각각의 길을 잘 가고 있는 아이들까지..."


"당신 말이 맞소. 이렇듯 우리가 낯선 나라, 낯선 문명을 공부하는 산책자로 살 수 있는 것도 우리가 용기를 내는 것만으로 어찌 가능하겠소.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경계 없이 받아주고 알려주고 손잡아 주서이지. 또한 아이들이 자라서는 부모의 슬하를 떠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독립하고는 부모도 아이들 그림자 밖에 머무는 것이 중요한 듯해요. 멀리 있어도 여전히 서로 곁에 있다는 정서적 존재감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우리가 떠나온 후에 깨닫게 되는군요. 우리가 우리의 길을 독립적으로 잘 가는 것이 가족을 돕는 일이고 세상에 누를 끼치지 않는 일 같군요. 하지만 노을 아름다운 식당에서의 저녁 한 끼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루비 노을


3월 1일, 사십 년 전 오늘의 의미를 돌이켜봅니다.

부부로서 2인 3각의 동행 약속을

친지와 벗들께 공표했던 날이지요.

수많은 계절을 함께 걸으며

홀로는 불가능했을 일들을 이루어왔습니다.

그 계절의 모퉁이마다 당신의 노고가

얼마나 깊이 깃들어있는지 잘 압니다.

당신의 마음과 손길로 어루만져 세 아이들 모두

제각각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 수 있도록 이끌었고,

이제 손녀의 탄생을 눈앞에 두었습니다.

양가 부모님께서 하늘로 돌아가실 때까지 잘 배웅해 드렸습니다.

내가 욕심을 낸 일들로 소홀할 때 당신은 곁에서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렸고 필요를 채워드렸습니다.

함께 해야 할 일을 당신 홀로 감당한 것에

빚진 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무를 끝냈다고 여긴 때에

일에 대한 욕심을 떨쳐내고

우리의 삶에 집중하겠다는 결심을 해주어 고맙습니다.

육신이 감당할 수 있을 때 나라밖 낯선 땅을

십 년쯤 순례하는 산책자로 살자는 요청을 동의해 주어 감사합니다.

낯선 길을 함께 걸은 지 네 번째 해,

길 위에서도 당신에게 배우고 있습니다.

당신은

걸식하는 남루한 모녀와 부녀 앞에 멈춰 서고,

슈퍼마켓 대신 먼 전통시장의 마늘 몇 단을 맨 행상과

과일 몇 종류의 좌판을 찾습니다.

호스텔 끼니가 궁색한 어르신에게 접시 하나 더 마련하고,

김치 그리운 동양 여행자에게

직접 담근 양배추김치를 내놓습니다.

청년의 맨몸 투혼에 당신의 노자를 나눕니다.

당신은 여전히 나의 스승이며 누군가의 보호자입니다.

오늘, 루비 웨딩 기념일.

우리는 루비처럼 붉게 저무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붉은 노을에 발길 멈추고 아름다움에 감응하였던 날들처럼

이제 우리 스스로 아름다운 노을을 짓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허락되는 때까지

세상의 신비와 조화로움, 존재의 경외와 아름다움을 산책합시다.

그 길에 당신과 함께임을 감사합니다.

2026년 3월 1일

노을이 아름다운 오악사카에서

_당신의 도반으로부터"


*알렉산더 폰 훔볼트 | 독일 출신의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 1769–1859)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상속 재산을 활용해 라틴아메라카를 탐험하며 방대한 과학과 인문학 자산을 남겼다. 라틴아메리카는 훔볼트의 삶과 업적에서 가장 중요한 무대였으며 특히 그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스스로의 자연과 문명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멕시코에서는 훔볼트를 '두 번째 발견자'라 부르며, 그의 저술을 국가적 자산으로 여긴다. 그의 저술들은 수많은 학자와 저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서술 방식에 영향을 받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였다. 우리 또한 멕시코 여행하는 중에 곳곳에서 그가 지나간 발자국들을 발견하면서 새삼 그의 위대함에 경탄하면서 자연의 모든 대상을 유기적인 힘의 세계로 바라보고 들은 그의 눈과 귀를 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연을 하나의 살아 있는 전체로 보는 시각을 가졌던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과학의 방법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일깨운다.


*올리버 색스 |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1933 ~ 2015)는 어린 시절 19세기 영국의 고사리 열풍(pteridomania, fern fever)에 영향을 받은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고대 식물 사랑을 이어받아 양치식물에 대한 관심이 이어졌다. 그는 이 분야의 아마추어의 열정으로 아메리칸 양치식물 학회(American Fern Society) 회원이 되어 다양한 양치식물의 생존방식과 적응력 관찰을 즐겼다. 그는 2000년에 그 학회의 회원들과 함께 열흘간 오악사카를 방문했다. 그때 양치식물의 관찰뿐만 아니라 몬테 알반, 툴레 나무, 오악사카의 시장과 음식들의 경험을 일기로 남겼고 그것이 2002년 'Oaxaca Journal'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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