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효용

Ray & Monica's [en route]_470

by motif

스네일 메일


[꾸미기]20260209_112258.jpg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ᐧ강민지


#1


길 위의 삶은 그리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


나와 아내의 배낭 2개와 노트북 가방, 식품을 담는 에코백이 지난 3년간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밤을 보낼 단칸 방 하나, 그 방값을 지불하고 하루 두 끼로 제한한 식사를 위한 식재료를 사고, 이동할 버스 티켓을 살 돈이면 충분했다. 이것이 정착하지 않는 삶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소유물이다.


그 외에 부가로 생기는 것이 있다면 길을 가다 보면 자연히 거추장스러워지니 삶의 에센스가 아닌 것과는 곧 이별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물리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조우하는 이들의 처지와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감수성이다. 감수성보다는 덜 중요할지라도 좀 더 깊은 심중의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언어능력이다. 최근에 기술 발달로 급격하게 언어장벽이 허물어지고는 있지만 감정 교류라는 것이 즉시성이 있고 언어가 함유한 다양한 문화적, 감정적 무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쓸모 있는 도구이다.


또 하나는 가족들과 어떻게 물리적 거리를 극복할 수 있을까이다. 비용 없이 혹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세계 어디서나 무제한 영상통화가 가능한 상황으로 바뀐지 오래이지만 스마트폰 화면으로 만나는 것만으로 한 장소를 공유하는 정서적 유대를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엽서를 활용한다. 전화 통화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부분을 일정 부분 보완하는 효과가 있다.


오악사카에 도착한 후 갤러리를 다니며 가족에게 보낼 엽서를 골랐다.


가족 모두를 위해서는 모카 포트(Moka Pot)를 표현한 판화를 집었다. 작가가 직접 사인한 작품으로 오악사카의 플로럴·과일 노트가 풍부한 커피 한 잔씩 내려주고 싶은 마음을 반영했다.


또 다른 한 장은 더 마음을 썼다. 루피너스(Lupinus, 층층이부채꽃)가 긴 꽃대를 세우고 좌우에 나비 모양의 꽃을 가득 달고 있고 총상꽃차례에서 벌새 셋이 꿀을 먹고 있는 모습을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표현한 엽서이다.

곧 출산을 앞둔 아들 내외가 곧 새 식구를 맞아 세 식구로 늘어난 가정이 만들어갈 화목의 풍경을 상상했다.

그제, 보낸 엽서를 받았다고 식구들이 기뻐했다. 한 달 열흘 만에 도착한 스네일 메일은 속도가 미덕인 시대에도 여전히 속마음을 전하는 유효한 도구 같다.


#2


사랑하는 나리, 주리, 효정, 영대에게,


"No viajamos para escaparnos de la vida. sino para que la vida no se nos escape(우리는 삶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서 도망치지 않도록 여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Oaxaca, Andaina Hostel 3층 벽에 그려진 벽화 속 문구이다.


모든 여행자들이 교차하는 호스텔의 열린 공간에서 매일 다양한 여행자들을 만난다. 떠나온 곳도, 향하는 목적지와 목적도 제각각이지만, 이야기의 끝은 결국 삶을 더 붙잡고 더 사랑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 더구나.


각자의 일로 스스로 눈가리개를 하고 경주마처럼 달리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들 때 목표가 아닌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렴.


나는 그것이 여행이라고 생각해. 멀리 떠나가지 않아도 좋다. 평소 발길 하지 않았던 동네 골목 산책도 좋고, 최근의 나리처럼 멀지 않은 산사에서의 하룻밤도 좋지.


그곳에서 나로부터 저만큼 이탈하고 있는 삶과 다시 친해져 함께 돌아올 수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좋으리라.

종종 자신의 자리를 원경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떠나길 바래!


2026년 2월 5일

멕시코 Oaxaca 호스텔의 로비에서

아빠ᐧ엄마가

___


사랑하는 손녀, 이수를 환영해!


이수야,


할머니는 네 이름만 불러도 절로 즐겁구나.


네가 우리 가정으로 오기로 한 날부터, 할머니는 만나는 모든 아이들이 너로 보이기 시작했단다. 엄마 품속에서 웃는 아이, 할아버지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는 아이 모두가 말이야.


그게 작년 봄이었는데, 이수가 2주 후에 태어난다니!


먼 외국에서도 네 아버지가 보내주는 영상 속, 엄마 배속의 눈·코·입, 손과 발의 경쾌한 움직임을 볼 때마다 할머니는 이미 네 곁에 있는 듯 설레는구나.


네 엄마, 아버지는 물론, 우리집 할머니, 할아버지, 큰고모 작은 고모 모두가 너를 환영할 마음으로 나날이 즐겁단다.


우리 모두가 너의 너른 놀이터가 되어줄게.


"어서 와, 이수!"


20260205

멕시코 오아하까에서

할머니·할아버지가


#3


2022년의 사진입니다.


엄마아빠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 롱블랙 @longblack.co 인터뷰하던 날의 사진입니다.


롱블랙의 사진작가님께서 아빠의 에너지를 그대로 담아주셨죠.


운이 좋게도 저와 엄마 막냇동생이 모두 모티프원에 있어 우리의 사진도 너른 마음으로 담아주셨습니다.


저 날을 마지막으로 아빠 엄마는 한국을 떠나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벌써 햇수로 4년 차에 접어듭니다.


그 후 영국에서 살던 막냇동생은 한국으로 들어와 결혼을 하고, 다음 주면 이쁜 딸도 태어난답니다. 예정일은 15일 내일모레입니다.


부모님은 여행을 떠나 동생의 결혼식에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손녀의 탄생도 멕시코에서 축하할 예정이라며 그들의 마음을 전달했습니다.

_


오늘 멕시코의 부모님으로부터 엽서가 왔습니다.

우리 형제, 그리고 새로 태어날 손녀를 맞이하는 엽서입니다.

_by 큰딸 나리 @motif.1

[꾸미기]20260209_112226tt.jpg
[꾸미기]20260209_112614.jpg
[꾸미기]20260209_113023.jpg
[꾸미기]KakaoTalk_20260312_221023391t.jpg
[꾸미기]KakaoTalk_20260312_221023391tt.jpg
1280IMG_0553tc.jpg
가족 (1).jpg
가족 (2).jpg
가족 (3).jpg
가족 (7).jpg
[꾸미기]20260209_111436.jpg
[꾸미기]20260209_111553 복사.jpg
[꾸미기]20260209_111949.jpg
[꾸미기]20260209_112226tt.jpg

#이수 #엽서 #오악사카 #멕시코

작가의 이전글헤이리 예술마을의 상징, 북스테이의 대명사 : 모티프원